好學의 聖經信仰/[聖書]The Bible

성경과 세계사 6

好學 2012. 10. 22. 11:03

성경과 세계사 6

 

 

아나톨리아란 터키령 소아시아반도를 부르는 이름입니다

 

 

 

지난 주에 언급한 아나톨리아고원은 터키의 소아시아반도 내륙부를 차지하는 분지모양의 고원입니다.  아나톨리아란 터키령 아시아의 명칭이며 터키어로는 아나돌루(Anadolu)라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북부의 도시 아미소스와 남부 타르수스(다소)강을 경계로 서쪽을 아시아라 했는데, 아시아라는 개념이 동쪽으로 퍼졌기 때문에 이곳은 소아시아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소아시아를 아나톨리아라고도 부르는 것은 비잔틴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7(재위 913∼959)가 아시아 영토를 14군관구로 나누었을 때, 현재의 에게해에 닿아 있는 서해안지방을 그리스어로 아나톨레라 한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의 이름의 뜻은평화라는 뜻입니다. 솔로몬은 밧세바의 두번째 소생이며 다윗왕의 넷째아들로서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에게는 여호와의 보내심을 받은 나단이 지어준 이름 여디디야가 있으니 그 뜻은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솔로몬은 그의 통치 4 2월에 예루살렘에 성전건축을 시작하여 11 8월에 준공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세번 건축되어집니다. 솔로몬성전과 유다왕국의 멸망 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스룹바벨에 의해 세워지는 스룹바벨성전, 그리고 로마가 가나안지역을 통치하던 때에 헤롯왕에 의해 세워진 헤롯성전입니다.)

 

 솔로몬은 그의 나이 21세에 이스라엘 3대 왕으로 취임하여 약 40년간 통치하였습니다(B.C. 961-922). 솔로몬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전무후무한 지혜의 왕이 되어 지혜의 재판을 했으며, 2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자신의 왕궁과 성전을 건축하는 대과업을 완수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하솔, 무깃도, 세겔에 성곽을 쌓는 위업을 실현했는가 하면, 인접국과 외교를 잘하여 국경 안팎에 태평성대한 세월을 오게 한 것이 그의 위대한 과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결정적 실수는 수많은 후비들이 섬기던 이방신을 허용한 일과 그 신상을 위하여 산당을 각곳에 지은 일과, 궁전과 성전 그리고 성곽을 수축하기 위하여 백성들에게 무거운 과세와 고역을 부담시킨 일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솔로몬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솔로몬왕의 지혜를 말하면 사람들은 시바의 여왕을 기억합니다. 시바의 여왕은 열왕기상 10장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시바는 아라비아반도의 남쪽 끝, 지금의 예멘 부근에 있었던 나라이며 정치조직, 도시, 관청 등이 구비되어 있는 문명국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솔로몬왕은 홍해 연안의 에시온게벨이라는 도시에 조선소를 만들어 이 지역에서의 중개무역에도 관여하고 있었는데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왕의 명성을 듣고 왕을 방문하였습니다. 여왕은 많은 것을 질문하여 시험해 보았으나 그는 모든 것에 다 대답하였습니다.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의 깊이와 그 왕국의 번영을 실제로 목격하고 거액의 향료,, 보석 등을 바쳤습니다.

 

분열왕국시대와 세계

 

BC931년 솔로몬의 죽자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대표는 세겜에 모여 법적 후계자인 르호보암을 왕으로 추대했다. 암몬 여인 나아마와 솔로몬 사이에 태어난 르호보암은 당시 나이가 41세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17년을 통치합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의 실정을 거듭하자 솔로몬 때에 애굽으로 도망하였던 여로보암이 돌아와 나라가 둘로 분열되게 됩니다.

뜻은백성이 번성함이라는 뜻의 이름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후계자 르호보암 에 반기를 들고 북이스라엘 10지파를 규합하여 새 왕조를 시작했습니다. 결국 나라는 르호보암을 왕으로 하는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로 구성된 남쪽의 유다왕국과,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한 나머지 열지파로 구성된 북쪽의 이스라엘왕국으로 분열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를 분열왕국시대라고 부릅니다.


 

솔로몬의 죽음 후 이스라엘은 분열왕국으로....

 

 

 

솔로몬의 죽음 후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왕이 통치하는 님쪽의 유다왕국과,  여로보암이 통치하는 북쪽의 이스라엘로 분열되었습니다. 남쪽은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로 구성되었고, 북쪽은 나머지 열지파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레위지파는 우상숭배에 반발하여 남쪽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B.C. 931년에 시작된 이 분열왕국은 이스라엘왕국이 B.C.722년에 앗수르에게 망하고,  유다왕국이 이스라엘보다 나중인 B.C. 586년에 바벨론에게 망하였습니다.

 

북쪽의 이스라엘왕국은 세겜을 처음에 수도로 정하였다가 후에 디르사로 도읍을 옮겼다가, 오므리왕이 세멜에게서 산을 사고 그곳에 성을 건축하고서 그 이름을 사마리아로 정하였습니다. 그 사마리아라는 이름은 그 산의 주인이었던 세멜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성은 예루살렘 북쪽 약 67km 지점,  세겜 북방 11km 지점에 있는데 현재는 세바스티에 라는 이름으로 보장것 없는 동내가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성을 중심으로 그 근처를 사마리아지방으로 불리게 되는데 사마리아지방은 옛날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쳐서 취하여 12지파에게 분할해 준 에브라임, , 므낫세, 그리고 반지파에게 준 땅이 곧 예수님 당시의 사마리아입니다.

 

앗수르왕 살만에셀이 이스라엘왕국을 쳐서 취하였을 때에 살만에셀은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다른 지방으로 옮기고 앗수르 국민을 사마리아 에 옮겼습니다. 그 다음에는 마게도냐의 알렉산더가 점령하여 또 자기 국민을 사마리아도에 이주시키므로 자연히 혼혈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때 부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이방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 사마리아 인들이 협력하기 원하여도 거절 하였습니다.
결국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을 이방시 하는 유대인들에게 원한을 품고 바사(페르시아)의 인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방해 하였고,  일방으로는 그리심 산에 따로 성전을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반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원인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에는 피차 반목 질시하게 되고 유대인이 그 지역에 가지도 않고 그곳 주민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쪽의 유대지방 사람들이 북쪽의 갈릴리지방을 갈때는 중부지방인 사마리아를 통과 하지 않고 멀리 요단강으로돌아 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런 태도와 달리 사마리아지역을 통과하시다가 수가 성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생수의 원리를 가르쳐 주셨으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기도 하였습니다.

북 이스라엘왕국에서 활동한 선지자들 중에는 엘리야, 엘리사, 요나, 아모스, 그리고 호세아가 있습니다. 그 중 요나에 관한 유명한 기사에서 앗수르의 수도가 니느웨라고 나옵니다. 그 도시는 함의 손자 니므롯이 세운 성으로서 요나선지자의 활동 당시 인구가 60만명이나 되는 거대도시였습니다
.  당시
니느웨의 주위는 장방형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길이는 10km 가 넘었으며, 그 주위를 도는데만도 3일이 걸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니느웨는 티그리스강 상류, 바그다드로부터 북으로 약 40km 떨어진 모슬지역에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도망하려고 욥바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는데, 그 다시스는 지금의 스페인으로 짐작합니다. 당시 그 지역의 사람들은 다시스가 서쪽의 끝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욥바는 예루살렘 서북쪽 약 55km지점 지중해 안에 있는 항구 도시로서 그  이름의 뜻은 아름답다라는 것입니다. 그 욥바의 북쪽의 신시가지가 지금의 이스라엘의 주요도시인 텔아비브입니다.

 

 

분열왕국시대에 강국으로 등장하는 앗수르는...

 

 

<앗수르제국의 영토>

 

 

분열왕국시대에 강력한 나라로 등장하는 앗수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왕국들 중의 하나로 남방 왕국인 바벨론이 바그다드와 페르시아만 사이의 평지를 차지한 반면에 앗수르는 대체로 시리아 사막과 남쪽으로 베벨로니아와 북쪽과 동쪽으로 아르메니아 및 페르시아 산과 접경을 이루었습니다. 셈의 아들 앗수르의 후손인 이들은 족장 시대 이전에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바벨론 북쪽에 고대 왕국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유능한 왕이었던 다윗 왕 시대에 극도로 쇠약해 있었던 앗수르는 그 후 수도 니느웨를 중심으로 점차 그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였고 특히 북 왕국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물론 그 세력이 다소 약화되었던 여로보암 2세와 웃시야 왕 때에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하여 자유를 찾아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도 하였지만 앗수르 제국의 재건을 시도한 디글랏 빌레셋 3세와 뒤를 이은 살만에셀 5세의 공격으로, 결국 북 이스라엘왕국은 멸망하여 앗수르의 속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앗수르의 세력은 B.C.8세기에 황금 시대를 이루었으나 그 후 B.C. 612년에 신 바벨론에 의한 수도 니느웨의 함락과 동시에 멸망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왕국에 대한 성경에 나타나는 앗수르의 위협을 살펴봅시다. 

B.C. 853년에 살만에셀 3세는 앗수르 군대를 이끌고 아람 왕 벤하닷과 이스라엘왕 아합을 포함한 동맹군과 싸우러 왔습니다. 하지만 B.C.841년에 이르기까지는 이렇다 할 전과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을 앗수르와 정면으로 충돌시켰습니다. 이때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하나의 속국으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값진 조공을 바치는 예후의 사절단이 살만에셀의 흑색 방첩탑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고 앗수르는 다메섹의 위협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관계로 이스라엘이 이웃나라 다메섹의 압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B.C. 800년경 요아스가 조공을 바치던 때에 앗수르의 출정한 기록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결과 이스라엘은 급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와 유다 왕 웃시야는 그 뒤로 앗수르의 운명이 바뀌었을 때 남부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주도권을 쥔 군주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B.C. 745년에 이르러서는 디글랏빌레셀 3세가 앗수르 제국의 지위를 회복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 므나헴은 조공을 바쳤으나 반앗수르 요인들로 인하여 그의 아들 대신에 베가가 왕으로 지명되었는데 얼마 안 가서 베가도 앗수르가 인정하는 호세아에게 왕위를 내어놓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호세아왕 때인 B.C.722년에 앗수르가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가므로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남 유다왕국에 대한 앗수르의 위협을 살펴봅시다. 북 이스라엘의 왕 베가의 반앗수르적인 태도는 남 유다의 왕  아하스로 하여금 앗수르의 품에 들어가 보호받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유다왕 히스기야의 독립정책은B.C.701년에 있은 앗수르의 왕 산헤립의 무자비한 보복을 초래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므낫세는 바벨론에 강제로 끌려갔다 온 다음 앗수르에 줄곧 충성하였고 그로 인하여 오랜 기간의 통치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앗수르가 안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유다를 강화하였으나B.C. 609년 앗수르의 마지막 왕을 돕기 위하여 진군하던 애굽 군대를 저지하려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산헤립은 앗수르의 왕 사르곤2세의 아들로서 그 부친 사르곤이 살해되므로 앗수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바벨론의 엘람을 정복하고 B.C. 701년 서방 여러 나라를 원정하기 시작했으며, 유다왕 히스기야는 애굽에 원군을 청하여 앗수르에 도전하였습니다. 산헤립은 유다를 공격하여 46도시를 점령하고 200,150명을 포로로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그 후 예루살렘 포위 작전때 전염병이 생겨 전쟁을 포기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 사건이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되어진 것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B.C. 681년 니느웨에서 산헤립은 그의 두 아들의 손에 암살 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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