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智慧묵상/[지혜묵상]신앙지혜

미련없는 순종

好學 2012. 9. 27. 17:57

미련없는 순종

누가복음 9:57~62

 

 

신학공부를 시작하면서 참 많이 불렀던 찬송가가 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바로 찬송가 355장이다. 2절을 보면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고 찬송한다. 확고한 결단이 없이는 쉽게 부를 수 없는 찬송이다. 그럼에도 젊은 날의 열정은 ‘이 땅을 내게 맡겨주시면 내가 감당하겠나이다’라고 거침없는 기도를 하게 했다. 누구나 한번쯤은 푸르고 푸른 청년의 때에 찬송가 355장의 가사를 진지하게 고백하며 하나님과 약속도 해보았을 것이다. 과연 중년이 된 지금도 그 열정과 생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제는 쉽지 않은 일이니 고민해보겠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책임져야 할 일들이 계속 늘어나기 때문이다.

길 가는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어디로 가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하고 헌신적인 고백을 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 말의 의미가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를 알려주신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눅9:58)이 없을 정도로 세상에서 얻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따르라고 부른 한 사람은 하루만 기다려달라고 청하였다(눅9:59절). 이유는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너의 우선순위는 죽은 자를 장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예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백부장의 종을 살리신 것처럼, 그의 부친에게도 그런 기적을 베푸셨을까? 그 사람은 처음부터 못 가겠다는 변명이 아니라, 가기는 가되 우선 가족들과 작별하고 가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즉각적인 순종이 아니라 변명을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주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눅9:62)라고 정의하신다. 남자들은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으니 나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말로, 교회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일을 되도록 회피한다. 그러나 이것만은 기억하라. 손에 쟁기를 잡고 있어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마10:29) 인생의 난제가 될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은 좋은 데, 정작 순종은 터부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특히 남자들은 신앙생활하면서 “나중에”라는 말로 미룰 때가 참 많다. 그러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면 못이기는 척 하고 순종한다. 마지못해 순종하면서 아내에게 온갖 유세를 다 부리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헌신해야 하는 순간, 왜 그렇게 주저하고 미적미적거리는 것일까? 그것은 순종의 즐거움과 축복을 경험하지 못해서이다. 그래서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수고하면서도 고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미련없는 순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남자들의 몫이다. 변명하는 신앙생활은 언제든지 나의 모든 일상생활을 변명거리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상생활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그 존재마저도 흔들 릴 수 있음을 명심하자.

남자들이여,

나의 수고와 노력으로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면서 나를 돌보실 때(마6:25~32) 진정한 평안과 만족한 인생이 될 수 있다고 믿는가?

롯의 처처럼 소돔성의 미련에 내 영혼이 포로가 되어선 안될 것이다.

미련없는 순종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의 삶을 살아가자.

그것이 남자다운 영적인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