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학의 교육 2/[인터넷성경교육]

제60과 사무엘하(1): 다윗 왕국의 확립 (1-장) 6

好學 2012. 9. 14. 16:38

제60과 사무엘하(1): 다윗 왕국의 확립 (1-장) 6

 


 
2-7.요약과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의 명단(5:6-16)


  이제 사울과 다윗의 싸움은 끝이 났으며, 다윗은 유다와 이스라엘 위에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왕이 되었다. 사무엘서 기자는 바로 이 시점에서 다윗이 여부스 족속을 치고 예루살렘을 정복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다윗은 자기와 함께 하던 정예병을 이끌고 여부스 사람이 있던 예루살렘 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여부스 사람들은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다윗을 조롱했다(6). 다윗이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1) 헤브론은 유다에서 볼 때는 중심 지역이었지만, 이스라엘 전체로 볼 때에는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었다(Pulpit).

2) 예루살렘은 주위가 깊은 골짜기로 형성되었으며, 성읍 자체가 고지에 자리잡고 있는 천연적인 방어 요새였다(Wycliffe).

3)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기드론 골짜기에는 기혼 샘이 있었기 때문에 충분한 수원을 확보하고 있었다(Lange).

4) 예루살렘은 다윗이 속한 유다 지파와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의 경계지역에 있었다(수 15:7,8; 18:6). 따라서 예루살렘은 두 지파 간의 심각한 갈등을 해소시키고, 온 나라를  화합을 도무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Keil  & Delitzsch).

5)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중심부로서 중앙 성소를 짓기에 적합한 곳이었다(Leon Wood). 여부스 족속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부터 예루살렘과 그 주변 산간  지역에 거주해  왔던  족속이었다(민 13:29; 수 15:8; 18:16). 이들은 여호수아 당시 이스라엘의 침공을 받아 일시적으로 패배했지만(수 10:23,26), 완전히 정복당하지는 않았다.

 

그 후 사사 시대에 이르러 유다 및(삿 1:8)베냐민 지파의 자손들(삿 1:21)도 그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점차 세력을 확보하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그들의 방어 기지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윗에 의해서 완전히  정복을 당하게 되었다(7-9절). 여부스는 한때 예루살렘의 또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수18:16,28; 삿 19:10; 대상 11:4).

여부스 족속은 다윗이 자신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루살렘이 정복하기에 매우 어려움 성이었기 때문이다.  1) 예루살렘은 당시 가나안을 남북으로 연결시켜 주던 주요 도로인 '왕의 대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2) 남쪽과 동쪽의 성벽은 절벽과도 같은 가파른 언덕에 세워져 있었고, 3) 그  주변에는 외적의 침입을 막아 주는 기드론, 힌놈, 두로베온과 같은 골짜기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여부스 족속들은 자신 만만하게 다윗을 조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도우심을 입어 시온 산성을 정복할 수 있었다(7). 시온은 '요새'란 뜻으로, 예루살렘 남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구릉의 이름이었다. 다윗은 이곳에 세워진 산성을 빼앗아서 그 이름을 다윗 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온'은 넓은 의미로 예루살렘 전체를 묘사하는 말로 사용되었다(왕하 19:21; 사 3:16; 슥 2:10). 후에 이 곳은 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었다(사 24:23; 옵 1:17). 그때에 다윗은 부하들에게 수구로 올라가서 다윗이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 즉 여부스 사람들을 치라고 명령했다(3).

 

'수구'('친누르')는 '하수도', '배수로', '지하 통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곧 예루살렘 남동쪽에 있는 기혼 샘에서 남쪽 저수지로 흘러 들어온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수직으로 파놓은 갱도를 말한다. 이 갱도는 성안에서 성밖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난공 불락의 예루살렘 성안으로 군사들이 침입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따라서 다윗은 이곳을 통해 적 진지에 들어가 공을 세우는 자에게 푸짐한 상급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요압과 그 군사들이 이에 응했던 것이다(대상 11:6). 다윗은 지형적인 이점을 의지하고 교만하게 말했던 여부스 사람들을 비꼬아 절뚝발이와 소경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는 훗날 속담이 되어 '미운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게 되었다. 여부스 족솓처럼 자기의 힘만 믿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사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어떠한 집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다윗은 그 성을 정복한 후에 그 곳에 거하였으며 그 곳 이름을 다윗 성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윗은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둘러서 성을 쌓았다(9). 밀로는 "채운다"는 뜻을 가진 "말레아"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며, 이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이것이 흙이나 돌로 쌓아 올린 성채를 의미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이 성채는 아마도 여부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읍에서 가장 취약 지구인 북방의 방어를 위해 북동쪽이나 북서쪽 한쪽 모퉁이에 세워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윗은 이 밀로를 기점으로 해서 예루살렘에 성벽을 둘러 쌓음으로 외세 확장의 기틀과 여호와 종교를 위한 중앙 성소의 기초(대하 3:1)를 마련하게 되었다. 솔로몬과 히스기야 역시 이 밀로를 증축하였다(왕상 11:27; 대하 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