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뒤낭 (Jean-Henri Dunant)
1828.5.8~1910.10.30
앙리 뒤낭
국적 스위스
활동분야 자선사업
출생지 스위스 제네바
주요수상 노벨평화상(1901)
주요저서 《솔페리노의 회상》(1862)
국제 적십자의 창시자이며 1901년 제1회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의 생일인 5월 8일을 적십자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기자: 하얀 바탕에 빨간 십자가를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병원’을 생각하게 되죠? 모든 사람들이 차별 없이 합당한 치료를 받고 다시 건강한 몸으로 나설 수 있는 병원이라는 곳이 처음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곳이 아니었다는 것을 아시나요? 오늘은 우리가 익히 아는 적십자를 설립하신 앙리 뒤낭 선생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안녕하세요, 뒤낭 선생님!
제 1회 노벨 평화상 수상자 - 앙리 뒤낭
앙리 뒤낭: 안녕하십니까, 기자님 그리고 갓피아 여러분. 모두들 건강하시죠?
Q1. 선생님께서는 ‘전쟁 없는 나라’ 스위스 태생이라고 들었는데, 전쟁 부상병들을 돌보는 적십자 사업과 같은 사회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되신 계기가 있었나요?
A1. 스위스는 1815년, ‘어떤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겠다’라는 선포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스위스의 은행은 예금을 넣으면 이자를 쳐주는 대신 ‘보관료’를 지불해야 할 정도이지요(웃음).
스위스의 수도 제네바
저는 그런 스위스에서도 제네바라는 풍요로운 도시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풍요로운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계신 분들이셨고, ‘노블리스 오블리주’라고 하죠? 자신이 가진 것을 사회와 나누는 법을 잘 알고 계신, 정말 존경스러운 분들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시의원으로 일하셨는데 주말마다 소년원에서 자원봉사를 하셨고, 재소자들의 복지에도 관심이 많으셨죠. 어머니께서도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저에게 예수님의 박애 정신을 가르쳐 주기도 하셨지만 제가 그걸 실천할 때 더욱 기뻐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선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제 생일 선물을 고아원 친구들과 나누고 싶다고 하자 기쁘게 고아원까지 함께 가주셨죠.
그런 부모님을 보고 자란 저와 제 형제들은 크면서 자연스레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 재소자들, 그리고 우리 나라 너머에 사는, 우리는 당연히 누리고 사는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자랐습니다. 사회 사업이라는 말로 표현하니 상당히 거창합니다만, 제가 자라며 배운 것은 사회 사업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존엄성을 함께 지키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Q2. 역시 훌륭한 부모님의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으셨군요! 고아원으로 생일 선물을 나누러 간 것 같이 기억에 남는 유년기, 혹은 청년기의 활동이 있으신가요?
YMCA 스포츠활동
A2. YMCA(기독교 청년 연합회)라고 잘 아시죠? 제가 십대 청소년이었던 1844년 영국 복음주의자들이 만든 이 사회 운동에 매료되어 YMCA의 창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비록 아버지의 후원을 받으며 시작했지만 제가 ‘사회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운동에 처음으로 발을 담그며 자의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인지, 아직까지도 기억이 생생합니다(웃음).
이 YMCA 운동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흩어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다가갈 수 있었고,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사랑의 돌격대’라는 모임을 만들어 고아원이나 양로원 등을 열심히 찾아 다니며 봉사를 했었죠. 그리고 여기에서 탄력을 받아 훗날 성인이 되었을 때 알제리의 원주민들을 돕는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알제리에 처음 갔을 때 저는 ‘폴 류랑엘소테’라는 은행에서 근무했습니다만, 우연히 출장차 들른 알제리 원주민들의 삶이 너무나 참혹해서 회사를 그만두고 알제리에 정착할 마음으로 시작하게 된 사업이었죠.
Q3. 알제리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적십자 처음 활동 당시
A3. 아프리카 알제리 주민들의 빈곤 퇴치를 위한 ‘제분사업’은 한마디로, 알제리 주민들에게 농사 짓는 법을 가르쳐서 그들 스스로 자급자족하며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놀라운 것은 알제리 주민들은 그 때까지도 자신들의 땅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라는 것도 모른 채 프랑스 식민지의 생활에 너무나 길들여져 프랑스에서 받는 말도 안 되는 소량의 식량으로만 겨우겨우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은 단어 자체로 사치였으며, 자신들이 인간으로서 가진 노동의 능력에 대해서도 거의 무지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에게 농사를 가르치는 일은 어렵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농사 기술뿐 아니라 사람이 노동으로 먹고 살 수 있음을 가르치는 일이기도 했거든요.
Q4. 그렇다면 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 적십자 운동이 시작된 건가요?
적십자 조약 (1863년)
A4. 알제리 주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의 생명은 공평하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적십자 사업이지만 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알제리 주민들에게 농사를 가르치면서 가장 큰 문제는 알제리를 식민지로 삼고 있는 프랑스가 알제리로 통하는 수로를 꽉 막고 놓아주질 않았다는데 있었죠. 프랑스 점령군을 찾아가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통하지 않았고, 이렇게 된 바에야 나폴레옹 3세를 만나 담판을 짓겠다는 각오로 나폴레옹 3세가 있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중인 이탈리아로 향했는데 그 곳에서 참혹한 전쟁의 실상을 난생 처음으로 목격했습니다.
제가 이제껏 도움을 준 사람들의 모습은 그들의 무지로, 혹은 가난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도움을 받아야 하는, 그렇지만 도움의 손길을 뻗어주면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이유도 알 수 없는 양국의 이해 관계 속에서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이 죄 없이,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 대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 사람들을 돕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한창인 솔페리노라는 마을에서 눈에 보이는 부상병들을 병원으로 최대한 부지런히 옮기는 일부터 시작했죠. 병원으로 쓰이는 교회는 항상 가득 차 있었고 의료진들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적군인 오스트리아 군인까지 데려오는 저에게 불만을 퍼부었지만, ‘나의 가족이 적지 마을에서 다쳐 죽어가는데, 그 마을 사람들이 적군이라고 죽게 내버려두면 좋겠습니까?’ 라고 반문한 이후로는 고맙게도 다친 적군을 받아주더군요. 저는 아직까지 이 일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싹을 틔운 것이라 믿습니다.
솔페리노에서의 제 경험과 나폴레옹 3세로부터의 격려에 힘입어 ‘생명 앞에서는 모두가 귀중하다’라는 저의 신념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것이 적십자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Q5. 적십자사의 존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 유래와 신념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적십자사에 대해 한 번 더 설명해주신다면?
A5. 일단 10년 만에 스위스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솔페리노에서 겪은 전쟁의 참혹한 모습을 <솔페리노의 회상>이라는 책으로 출간한 일이었습니다.
솔페리노의 회상 - 앙리 뒤낭
이 책은 앞에서 말씀하셨다시피 전쟁 없는 나라인 스위스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사람들의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유럽 전역으로 전쟁과 부상병들의 처우에 관하여 많은 회의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기회가 하나님이 주신 제 평생의 사명이라 생각하며 부지런히 전쟁의 참상과 구호 활동을 위한 강연을 다녔습니다.
제1회 제네바 조약 (1863년 10월)
그리고 그 결과 1863년 10월, 스위스에서 정치, 종교, 이념의 중립성 유지, 국적에 구애 받지 않는 구호활동을 원칙으로 하는 제네바 협약이 체결되었고, 이듬해 ‘적십자 조약’이 만들어 졌습니다. 적십자 조약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네바 선언문 (1863년 10월)
첫째, 전쟁터에 있는 병원과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은 전쟁에 대해 중립을 지킨다.
둘째, 일반 시민들도 부상병을 간호할 수 있다.
셋째, 부상병은 나라를 따지지 않고 치료해 준다.
처음 적십자 조약에 가입한 나라의 수는 열두 개에 불과했으나 그 수는 점점 늘어나 지금은 대부분의 나라가 가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네바에 위치한 적십자 건물
이 단체는 설립된 기반이 된 나라인 스위스 국기의 모양을 따 흰 바탕에 붉은 십자가를 상징으로 정하고 ‘적십자사’라는 기자님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적십자사는 1947년 앙리 뒤낭의 생일인 5월 8일을 ‘적십자사의 날’로 정했다.
Q6. 많은 사람들을 돕는 사회 사업에 평생 헌신하셨는데요,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A6. 제가 처음부터 아예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만 할 목적으로 사회 사업이라는 것을 벌린 것은 아니었음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알제리에 세운 제분회사만 해도 처음에는 값싼 알제리의 땅을 사들이고 그들에게 농사를 짓게 해서 이윤을 남길 목적으로 뛰어든 사업이었으니까요.
스위스 은행의 지점장까지 올라간 위치에서 본 알제리의 제분회사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었지만 현실은 생각만큼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위험부담이 큰 사업’이라는 이유로 친척들을 비롯하여 민간 은행에서는 이 사업에 투자를 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그런 이유로 제가 알제리에서 전쟁이 한창인 북 이탈리아로 가게 되었고, 전쟁이라는 참상을 목격하게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이끄신 길의 일부였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알제리에서의 사업은 끝까지 풀리지 않았고, 제가 시작한 적십자 사업에도 적지 않은 사재를 투자해서 노년에는 부유했던 지난날을 회상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지만, 제가 걸어온 삶에 대해 후회나 회한이 남지 않는걸 보니, 이윤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타인들을 위해 뛰었던 지난 시간들이 아마도 그렇게 실패한 생은 아니었지 싶군요(웃음).
기자: 앙리 뒤낭 선생님의 헌신적인 생애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받고 있는 생명과 건강에 대한 많은 혜택이 결코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귀중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참고도서: 하나님을 믿은 노벨상 수상자들 [앙리 뒤낭 편]/ 김주현 지음/ 윤교석 그림/ 겨자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