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好學 2012. 8. 27. 08:15

그의 도시와 추억, 그리고 음악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1685.03.21~1750.07.28) 독일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는데, 오늘날의 음악이 그에 의해서 태어났기 때문이며, 바흐로부터 흘러나온 샘에 의해 바흐 이후의 음악은 배양되었던 것이다. 모짜르트, 베토벤 등이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

 

 

기자: 안녕하세요, 갓피아 여러분. 오늘은 지식의 거장,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선생님을 모시고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음악의 도시인 독일의 곳곳을 탐방해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모두다 아시다시피 바흐 선생님은 독일이 낳은 위대한 음악가로 오늘날까지 유명한 분이신데요, 오늘 귀한 걸음 함께 해주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바흐의 젊은 시절 

 

바흐: 안녕하십니까, 갓피아 여러분. 오늘은 제가 태어나고 자란 독일이란 곳 중에서 저의 개인적인 추억이 얽힌 곳을 몇 군데 방문해 볼 텐데요, 아마 여러분들께는 조금 생소한 곳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허허.


Q1. 선생님이 태어나신 곳부터 보도록 할까요? 어디서 태어나셨나요?

아이제나흐 바흐의 집

 

A1. 저는 독일의 아이제나흐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이제나흐는 12세기에 세워진 유서 깊은 도시로, 울창한 삼림 지대를 이루는 튀링겐 숲의 서쪽에 위치해있습니다. 저는 아이제나흐의 루터 거리 35번지에서 태어났어요.

루터거리

 

루터 거리는 완만한 경사를 가진 골목길로, 루터 하우스가 있는 루터 광장에서 바흐 하우스 앞 광장까지 길게 이어지고 있는 탁 트인 전망이 아주 멋진 곳이죠.
아이제나흐는 오늘날에는 독일의 철도 교통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독일 음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입니다. 18세기 당시 최고의 음악가로 칭송 받으며 높은 인기를 누렸던 게오르크 텔레만이나 <카논 D장조>등으로 유명한 요한 파헬벨의 젊은 시기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음악가의 도시라고 할 수 있죠.
바흐 선조는 헝가리에서 개신교의 박해를 피해 망명한 제빵사로, 이곳 아이제나흐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제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유서 깊은 음악가의 집안이 되었는데, 아마도 이곳을 정착지로 삼은 선조의 선택이 바흐 집안이 음악가의 가문이 되기 위한 운명의 장소가 아니었을까 싶군요(웃음).


Q2. 선생님의 음악은 루터의 신학 사상에서 많은 영감을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언제부터 루터에 대해 접하기 시작하셨나요?

 

A2. 루터 신학을 배운 시점을 이야기하자면 조금 오래 전이긴 하지만 제가 약 10살 때 양친을 모두 잃은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설명하는 편이 수월합니다.

 

바흐의  가족 출처

                                 ▲ Vater Johann Sebastian Bach

                                                       ▲ und seine Söhne Philipp Emanuel

                                                                               ▲ Johann Christian

                                                                                                        ▲ Friedemann

                                                                                                                           ▲ Johann Christoph d.J.

 

아버지는 큰형(요한 크리스토프 바흐)의 음악적인 재능을 일찍 알아보시고 형이 14살 되던 해, 에르푸르트의 파헬벨에게 보내어 3년 동안 오르간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눈은 정확했어요. 큰형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오르트루프라는 작지만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에서 직업 오르간 연주자로서 자리를 잡아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가족의 생계, 특히 저의 교육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큰형은 저에게 오르간과 피아노를 비롯한 기본 음악법을 가르치면서 자연스레 음악가의 길로 인도했지만 동시에 음악가로서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인 신념을 배우게 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음악가가 자신의 음악을 평생 해나가려면 음악을 통해 추구해야 할 구체적인 목적과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큰형의 집에 기거하면서 비교적 어린 나이이긴 했지만 마을에 있는 리케움에 들어갔습니다. 리케움(Lyceum)은 6년제 라틴어 학교로서 루터 신학을 비롯해서 라틴어와 문법, 수학 등의 인문 교육을 가르치는 곳이었죠.
그 때 저는 십대 청소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음악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소명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음악 학교가 아닌 인문학교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조금 의아해 하실지도 모르지만, 여기에서 배운 성경에 기초한 신학은 제 평생을 비추는 불빛이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인문학교에서 라틴어를 정식으로 배웠다는 것이 훗날 저의 경력에 많은 플러스 요인이 되기도 하였지만, 8세기부터 수도원이 세워진 유서 깊은 신앙의 도시인 오르트루프에서, 루터가 나온 학교이기도 한 리케움에서 배운 학문은 어린 제 영혼에 자연스레 하나님을 찬양하는 숨결을 불어넣었습니다. 이곳을 졸업한 후 본격적으로 음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이미 하나님과 음악은 제 인생에서 뗄 수 없는 일부가 되어 평생을 함께하게 되었으니까요.


Q3. 정말 현명한 형제를 두셨네요! 선생님의 학창 시절을 보낸 오르트루프에서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만 더 이야기해주시고 다음 도시로 넘어갈까요?
 

A3. 오르트루프 시절, 저는 큰형에게 처음으로 오르간과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저는 오르간에 곧 깊이 빠져들어버렸지요. 오르간의 깊은 음색이 너무 좋아 다양한 기능을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날만 기다리곤 했지요.
당시 큰형은 스승이었던 파헬벨을 비롯해여 프로베르거와 케를 등 바로크 시대 오르간 거장들의 귀한 악보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형은 무슨 보물을 다루듯 그 악보들을 다루었는데, 집안 깊숙한 곳 격자문을 한 책장 안에 들여놓고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았지요.
저는 형이 언제쯤 저 보물창고를 열어 거장들의 악보를 보여주려나, 손꼽아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저 격자 책장이 열릴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다른 식구들이 모두 잠든 한 밤중에 몰래 일어나 격자 창에 손을 집어넣어 악보를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꺼내어 달빛 아래에서 그 악보들을 베끼기 시작했습니다. 촛불이라도 하나 켜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고 하얀 달빛 아래에서 악보를 약 6개월간 조금씩 베껴나갔죠.
결국은 큰형에게 걸려 그 동안 베낀 악보를 모두 압수당하고 혼쭐이 났지만 그 때 달빛에 의지하여 열정적으로 베낀 악보들이 아직도 간간이 생각납니다(웃음).
그 때는 형이 무척 원망스러웠죠. 무려 6개월간 베낀 악보를 송두리째 앗아갔으니까요. 혹자는 큰형이 저의 재능을 질투하여 그랬다는 말도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건대, 큰형만큼 저의 재능을 알아보고, 채찍질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형은 저의 재능이 낭비되거나, 다른 곳으로 흐르는 것을 무척 경계했던 타고난 교육자였습니다.
아마도 오르간에 처음 입문한 제가 훌륭한 거장들의 악보를 소지하고 몰래 연습하다가 그보다 더욱 중요한 기초 소양을 닦을 시기를 놓쳐버리는 것을 우려했던 듯 합니다. 시간이 흘러 저 역시 누군가를 교육하는 입장에 서 보니, 스스로 자신의 재능이 도취되어 음악의 기본을 닦아야 할 음악가로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놓쳐버리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더군요.
이거, 말이 길어졌습니다. 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실까요? 이번에 가보실 곳은 제가 음악가로서 본격적인 토양을 닦기 시작한 곳인, 뤼네부르크(Luneburg)입니다.

 

Q4. 뤼네부르크는 어떤 곳인가요?

뤼네브루크

 

A4. 한눈에도 제가 이제껏 자란 곳과 다른 분위기가 보이시죠? 뤼네부르크는 일찍부터 외국과의 교역이 성행했던 상업도시 입니다. 소금 생산의 중심지로 당시 한자 동맹(Hanza Bund)라는 14세기 독일 북부의 도시들 중심으로 맺어진 상권 유지의 핵심 도시였죠. 교통의 요충지인 일메나우(ilmenau)강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어 도시에는 언제나 외국 여러 나라에서 온 상인들과 진귀한 물건들로 넘쳐났죠. 숲을 끼고 있는 아이제나흐라는 조용한 도시에서 태어나 8세기부터 지어진 수도원이 있었던 오르트루프에서 온 저에게 뤼네부르크는 한 마디로 눈이 휘둥그레지는 별세계였습니다.

 


미하엘 교회

 

저는 성 미하엘 교회에 부속된 성 미하엘 학교에 입학하여 당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최고 수준의 메텐코르 성가대에서 소프라노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성 미하엘 학교는 음악을 공부하기에 최적의 요건을 지닌 학교였습니다. 특히 1555년에 설립된 성 미하엘 도서관은 당시 최고의 장서를 가진 도서관으로 유명했죠. 르네상스 시대부터 활동한 180여 명의 작곡가의 1천 점이 넘는 귀중한 악보를 소장하고 있었으니까요. 오르트루프 시절, 큰형이 수집한 악보들을 달빛에 의지하며 베껴야 했던 저에게 그곳의 악보들은 평생을 베껴도 못다 베낄 보물로 가득한 세계였습니다. 아, 그 때는 이미 그렇게 몰래 베낄 필요도 없긴 했지만요(웃음).


Q5. 한 눈에 보기에도 정말 활기찬 도시에요. 이곳에서 음악가의 경력이 시작되신 건가요?

A5. 말씀 드렸다시피 뤼네부르크에 왔을 때 저는 아직 학생 신분이었습니다.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직업 음악가로 나서기에는 다소 부족했죠.
그러나 뤼네부르크에는 출중한 실력을 가진 음악가들이 가득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무척 존경하던 오르가니스트인 게오르크 뵘을 비롯한 빈첸트 뤼베크 등 많은 음악가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비교적 어린 나이였으나 훌륭한 음악가들과의 대화와 연습, 가르침은 이곳에서 보낸 2년이란 짧은 시간을 통해 제 평생에 잊혀지지 않을 시간이 되었죠.

 

아른슈타트 노이에키르헤 교회

 

성 미하엘 학교를 졸업한 후 저는 아른슈타트의 노이에키르헤(Neuekirche)라는 교회에 있는 오르간 시연을 맡게 되었고, 이때 성실하게 일한 것이 계기가 되어 1703년에 불과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저의 첫 경력이 시작된 곳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노이에키르헤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 경력을 시작으로 약 30년 넘는 긴 세월 동안 교회를 중심으로 음악 활동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Q6. 선생님이 독일에서 특히 좋아하는 지역이 있다고 들었어요.

 

함부르크 풍경화

 

A6. 허허. 함부르크(Hamburg)를 말씀하시는군요. 이곳에서 조금 멀긴 하지만 빠뜨릴 수 없는 곳이죠. 성 미하엘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저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함부르크를 방문했어요. 45킬로미터나 떨어진, 자동차라는 것도 없었던 그 시대에는 굉장히 먼 거리였지만, 라인켄과 같은 북 독일 오르간 악파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곳은 함부르크 밖에 없었거든요. 함부르크에 대한 저의 사랑은 꾸준히 이어져, 1720년에는 함부르크 성 야코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기 위해 97세의 라인켄이 지켜보는 앞에서 <내 마음에 근심이 많도다>라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칸타타를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항상 무대 위에서만 보던 존경하던 거장의 앞에서 연주를 할 때의 설렘은, 아직도 잊기 힘들만큼 떨리는 기억입니다!

 

첼레 도시


아,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도시로는 첼레(Celle) 역시 빠뜨릴 수 없지요. 뤼네부르크와 하노버 사이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북 독일의 진주’라 불릴 정도로 주위 풍광이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1690년에는 함부르크와 첼레 등 북 독일의 주요 도시에 프랑스 음악이 인기몰이를 했는데 그 때 저 역시 프랑스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죠.

 

 

Q7. 여행하신 도시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도시가 있으시다면?

 

성마리엔 성당

 

A7. 단연 뤼베크(Lubeck) 입니다. 뤼베크는 작지만 소금 무역의 중심지로 화려하면서도 면적에 비해 큰 교회들이 많이 밀집된 도시입니다. 한때 누린 경제적인 번영과 풍요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죠.
아른슈타트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던 시절, 휴가를 받아 뤼베크에서 매해 12월마다 열리던 성 마리엔 교회의 저녁 음악회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을 했던 적이 있었죠. 교회에서 받은 휴가보다 훨씬 길어진 여행이었습니다.

 

성마리엔 교회 내부

 

성 마리엔 교회는 무려 1백 년에 걸쳐 지어진 대표적인 독일식 고딕 양식의 교회 건물로, 역사만큼이나 웅장한 규모의 파이프 오르간을 갖춘 교회였고, 이곳에서 열리는 저녁 음악회에서는 거장들의 연주가 줄을 이었습니다. 음악가로서는 놓치기 힘든 행사이죠.

이 때 간 뤼베크의 저녁 음악회는 성 마리엔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인 북스테후데의 연주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북스테후데와 함께 친분을 쌓을 흔치 않은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당시 저는 스무 살 남짓의 청년, 북스테후데는 일흔을 앞둔 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음악적 자질과 신념을 한 눈에 알아본 저희는 곧 음악가 대 음악가로 친분을 쌓았습니다. 수십 년 간 성 마리엔 교회에서 업적을 충실히 쌓아온 북스테후데와의 시간은 저의 삶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음악가로의 또 다른 비전을 제시하는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아른슈타트로 떠날 때가 되자 북스테후데로부터 자신의 딸과 결혼하면 성 마리엔 교회의 연주자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제의가 들어왔죠. 당시에는 가족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는 음악가가 많았기 때문에 그런 제의가 흔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성 마리엔 교회의 연주자 자리는 헨델이나 마테존 등 당시의 쟁쟁한 음악가들도 눈독들일만큼 엄청난 제의였으나 이미 저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인이 있었기 때문에 정중히 사양하고 아른슈타트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듣기로는 쉬에페르데거라는 음악가가 북스테후데의 사위이자 음악가로 성 마리엔 교회의 연주자 자리를 계승했다고 들었습니다. 약 4달 간의 짧다면 짧을 여행이었으나 뤼베크 여행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기억입니다. 뤼베크 여행 이후로 저의 연주 방식도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Q8. 이제 슬슬 해가 저물고 있는데요, 오늘의 일정이 끝나기 전에 한군데 더 들러볼 짬이 있는 것 같은데요?

 

A8. 그렇다면 우리가 시작한 저의 고향인 아이제나흐의 반대편인 바이마르(Weimar)로 가보기를 권하고 싶군요. 튀링겐 숲을 기준으로 아이제나흐는 남쪽에, 바이마르는 북쪽에 위치하고 있죠. 약 9년 동안 제가 작센 바이마르 궁정의 오르간 연주자 겸 실내악단 단원으로 활동한 곳이기도 합니다.

 

바이마르 궁정


Q9. 바이마르는 어떤 곳인가요? 선생님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곳인가요?

A9. 바이마르는 서양 음악사와도 관련이 깊은 도시로, 일찍이 모차르트의 수제자 후멜(Hummel)이 이 도시에서 활동하였고, 리스트(Liszt)가 말년을 보내며 음악 활동을 한 곳이기도 하죠.

 

리스트의 집

 

가까이엔 일름(ilm)강이 흐르고 있고,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의 스승인 파헬벨의 고향인 에르푸르트와는 동쪽으로 15킬로미터 정도 거리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바이마르 궁정 실내 악단의 높은 음악적 수준과 음악가에게 베풀어지는 넉넉한 혜택, 그리고 무엇보다 바이마르 공국의 영주인 빌헬름 에른스트 공작의 기독교 신앙과 관련된 많은 업적과 일화 등이 바이마르로 이주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다시 궁정 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며 저의 음악적인 경력을 쌓는 동시에 신앙 생활을 새로이 하고, 이때 즈음에 후계자의 양성에 대한 교육을 계획하기 시작했죠.

어이쿠, 벌써 해가 지고 첫 별이 뜨고 있군요. 여기 이렇게 서있자니 달빛을 불빛 삼아 큰형의 악보를 베끼던 그 밤이 생각나네요. 기자님 덕분에 참으로 오랜만에 옛날을 회상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지나온 날을 설명하고 있으니 그간의 추억과, 지나온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제게 허락하신 지나온 날들이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군요. 제가 살고, 방문한 구석구석에서 만나온 사람들, 스승들, 그리고 가르친 제자들…모두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가 아니면 만날 수 조차 없었던 사람들과 후회 없는 값진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독일은 넓고, 그만큼 곳곳에 역사와 이야기가 가득한 나라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또 한번 모시고 싶군요.

 

기자: 저 역시 오늘 하루가 너무 짧게 느껴지네요! 선생님과 함께 꼭 다시 오고 싶어요. 오늘 수고하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선생님이셨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구요, 함께해주신 갓피아 독자 여러분들께도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