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월리엄 존 맥캔지(William John Meckenzie)

好學 2012. 8. 27. 07:58

월리엄 존 맥캔지(William John Meckenzie) (1861-1895) 

 

 

 구한말 조선.


 

잘아시겠지만, 조선은 나라 안팎으로 해일과 같이 닥친 크나큰 세계 정세 변화의 물결속에서 요동을 치고있었고, 치열하고 냉정한 제국들틈에서 멸망의 운명을 피할길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혼란틈에 미국과 프랑스와같은 서구 열강들은 선교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었지요.

 

  ▲  한국 초기 선교사들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 같아요 : )


1893년 10월,

개인 자격으로 활활 끓어오르는 열정하나만 안고 조선의 땅을 밟은 32세의 청년이 있었으니 바로 윌리엄 존 맥켄지(William John Meckenzie) 선교사 입니다.

윌리엄 존 맥켄지 (1861-1895)



윌리엄 존 맥켄지 (1861-1895) 
    


맥켄지
선교사는 1861년 캐나다 케이프 브레톤에서 8남매중에 막내 아들로 태어났으며(7번째), 댈하우지 대학(Dalhousie College)과 장로교 대학의 교육을 받으며 신학의 길을 걷습니다. 대학 시절의 그는 라브라도 (Labrador)에서 1년반정도 개척전도를 하며 선교사로서의 일을 하기도 했는데, 이 시절 조선에 대한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고
그는 조선으로의 선교활동을 결심을 하게됩니다.

하지만 캐나다 장로 교회에서는 조선으로의 그의 선교사 파송신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이때까지만해도 조선으로의 캐나다 선교활동은 아직 활발하지 않았었거든요. 하지만 맥켄지의 강한 결심을 꺾을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선교사역 준비를 위해서 핼리팩스(Halifax)로 가서 수개월 동안 의학 공부까지 했다고 합니다.
열정에 가득찬 32살의 젊은 멕켄지 선교사는 친구들로부터까지 많지 않은 전도비까지 챙겨 교회의 파송 선교사가 아닌 독립 선교사 조선을 향해 드디어 배에 오르게 됩니다.



▲ 멕켄지 선교사의 친필 싸인                                                

해야 할 점은 바로 그의 선교방식입니다! 이 시절 선교활동은 개인마다 차이는 있었겠지만 대체적으로 크게 정복주의와 적응주의 두가지의 선교방식을 볼수 있었습니다.
물론 전도라는 종교적 이유를 떠나 교육의 기회, 인권 계몽 등의 개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였겠지만 사실 많은 선교사들이 사회, 정치적으로 어쩔수없이 군림하는식의 선교활동의 길을 택하였지요. 자신의 문화우월주의와 함께 대외적으로는 끊임없이 조선의 문을 쾅쾅두드리고 총까지 겨누는 살벌한 정치외교적 상황속에서 한국인들은 선교사들을 바라볼때 거리감과 경계심부터 앞설수밖에 없었겠죠.

하지만 맥켄지 선교사는 달랐습니다.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한국인들과 같이 살다가 마지막 나팔 소리를 들을 때까지 그들과 같이 일하리라”

이같은 그의 결의는 그로하여금 남다른 선교방식의 길을 걷게하는데요.


▲ 그가 살았던 초가집의 모습, 낯선환경에서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는 주변사람들의 말림에도 불구하고
황해도 소래 마을에서 과감히 한복을 입고 초가집속에서 한국 음식을 먹으며
온전히 한국인으로서 한국인에게 다가가는 방식을 택합니다. 참으로 조선인 다운 선교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열정으로 가득찬 청년의 멕켄지 선교사는 온몸을 바쳐 선교활동을 하는데요.그 는 오른쪽사진이 보여 주다 싶이 아이들에게 교육의 장도 마련하는등 밤낮 선교활동에 헌신을 다합니다. 



▲ 주일학교 학생들 입니다.                                                

문제는 그의 '건강' 이었습니다.
복음 사역이 생각보다 잘되어 뜨거운 열정 하나 믿고 불철주야로 활동한 나머지 그만 건강을 해치게 되죠. 낯선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무리한 활동으로 몸이 몹시 쇠약해졌는데 장연읍(邑) 전도를 강행했다가 결국 일사병에 걸리게 됩니다.

당시 완공되지 못한 예배당 부속실에 거처하는동안 멕켄지 선교사는 심한 고열로 5일동안 병고에 시달리며 나중에는 정신착란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는데요.

 

6월 23일(토요일)
“…(전략) 잠을 잘 수도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너무 약해졌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에는 전신이 추워지는 것을 느꼈다. 옷과 더운 물주머니가 있어야겠다. 땀을 내야겠다. 
조금은 나은 듯하기도 하다. 죽음이 아니기를 바란다. 내가 한국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았기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게 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내가 조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 아래서 전도하고 밤이면 공기가 추워질 때까지 앉아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중략)… 
몸이 심히 고통스러워 글을 쓰기가 너무 힘이 든다.”     


 

마지막 일기글을 살펴 보면 얼마나 그동안 혹독한 생활을 하고 상황이 위급했는지 쉽게 짐작할수 있습니다.

◆  한 알의 밀알 같은 삶을 살다간 멕켄지 선교사



 ▲ 맥켄지 선교사의 무덤의 모습                                      

비극적인 맥켄지 선교사의 죽음은 당시 소래마을 주민들에게도 그리고 캐나다 장로 교회측에게도 큰 충격과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2년이라는 짧으면서도 긴 시간동안 낯선 조선이라는 땅에서 고군분투하며 희생적인 삶을 산 맥켄지 선교사로부터 감동을 받고 생전 그의 지시를 따라 오로지 주민들과 평신도들의 자력으로 우리나라 최초 개신교회인 소래 교회를 설립하게 됩니다.




▲  우리나라 최초 교회 "소래교회"(위)를 평신도들을(아래) 포함한 주민들이 자력으로 설립하였습니다. 
                                                                                               


캐나다 교회측에서도 또한 멕켄지 선교사의 죽음을 계기로 조선 선교를 위한 헌금이 시작하였고, 100여명의 선교사를 전 세계에 파송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종교가 없는 저로서는, 사실 그동안 선교사들의 역사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었는데 한국속의 캐나다, 그리고 캐나다인과 한국인의 관계의 그 역사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시 구한말의 캐나다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알고 역사를 이해 하는 것이 중요한것 같습니다.
 
윌리엄 존 맥켄지 선교사. 물론 선교 활동자체의 종교적 본질을 여기서 논할수는 없지만 분명한것은 멕켄지 선교사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초가집에서 김치를 먹으면서 그렇게 온전히 조선인이 되어 자기 한목숨까지 받친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