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청소년교육]

만남(3)/여자의 마음은 이런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룻2:8-9

好學 2012. 8. 14. 22:27

만남(3)/여자의 마음은 이런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룻2:8-9

 

 

본문 :  룻기 2: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2:9 그들의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의 길어 온 것을 마실찌니라


-----------------------------------------------------------------------------------------------------------------남자들이 남성성을 잃어가면서 여자들이 채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들이 감당은 합니다. 그런데 남자들의 요소를 채워가면서 행복해 하는 여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여자들은 모질고, 효율적이고, 독립하라는 요구들을 받습니다. 독립한 여자들을 많이 만나 봤습니다. 하나도 행복한 여자가 없었습니다. 물어봤습니다, 행복하냐고. 행복하지 않답니다. 왜냐하면 남성적인 요소들 가지고 행복하게 하나님이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자의 특징은 모험성과 희생성이라고 했죠. 여자의 특성은 의존성과 관대성입니다. 풀어 얘기하면 의존성이란 자기 자신을 위해 싸워주는 사람이 있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For me, 나를 위하여 싸워주는 사람이 있을 때 여자는 굉장히 행복감을 느낍니다. 또 하나가 자기 자신과 함께 할 사람이 있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With me입니다. 여자의 행복을 두 단어로 말하면 For me와 With me 즉 의존성과 관계성 이 두가지라 하겠습니다. 

    차례대로 살펴 보면 여자들은 자기를 위해서 싸워줄 사람이 있으면 행복합니다. 여자의 욕구는 누군가가 자기를 원하기를 바랍니다. 누군가의 표적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자들 중에 예쁘게 하고  화장 진하게 하고 가슴도 파이고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사람의 특징은 나를 좀 봐 달라는 겁니다. 나를 표적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욕구를 남자들이 알아줘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감각해’ 하면서 무시하면 굉장한 상처를 입거나 아니면 더 심해집니다. ‘이래도 안 볼거야?’ 하면서. 이런 긴장감들, 싸움들을 벌일 때 보면 답답함을 느낍니다. 

    여자들의 특징은 남자들과 다릅니다. 남자는 수동적이기 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취하기를 원합니다. 어투도 그렇습니다. 나는 뭘 원한다는 식입니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은 엠피3야, 내가 갖고 싶은 것은 자전거야, 자동차야’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표적이 되기를 원합니다. 

   룻은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남편이 죽고 과부가 되었습니다. 왜 과부가 불행하다고 하느냐? 똑 같은 처지의 홀아비도 있는데 꼭 과부만 언급합니까? 여자의 행복감이 보호 당하는 것에 있는데 보호자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을 고아와 과부라고 합니다. 고아는 무엇입니까? 어린 아이는 자기를 보호해 줄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입니다. 부모가 사라졌다? 불쌍한 거죠. 

    마찬가지로 여자는 자기를 보호할 남편이 필요합니다. 남편이 사라졌다는 것은 굉장한 위기 가운데 있다는 말입니다. 보호자가 사라졌다는 것은 여자로 하여금 행복의 기반이 다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욕구는 보호받고 신뢰받는 것,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낍니다. 

    돈이 많은 여자임에도 남자와 밥을 먹으면 밥값 안 내는 거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왜 여자들은 밥값을 안낼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가 돈을 내면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밥도 사주고 물건도 사주면 ‘내가 보호 받고 있구나’ 하는 만족감을 느낌을 갖습니다. 그래서 짠 남자들이 인기가 없습니다. 그들에게서 보호받기 보다는 부담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자의 특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룻이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보아스로부터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8-9절을 다시 보시면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에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나의 소자들과 함께 하라. 그들의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면 소년들의 길어 온 것을 마시라. 배려해 줍니다. 그래서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존성이라는 것입니다. 철저히 의존하는 것, 이것을 신앙적인 측면에서 봅시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의존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초창기에는 며자들이 훨씬 믿기 편합니다. 자기의 의존성을 하나님께로 방향만 바꾸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28:10절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하나님 철저히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시편 37:5절을 보면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하나님 의지하면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62:8절을 보면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저 앞에 마음을 토하라. 그 앞에 마음을 토하면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고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다 의지하는 것이지요. 

    한국교회가 크게 부흥했던 이유가 무언가 하면 여성적인 맥락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초창기에 많은 여성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강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적인 의존성  이것이 믿음의 기초고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남자들은 예수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자기 의가 있습니다. 자아가 잘 안 무너집니다. 남자들 보면 억지로 끌려 와 있지만 계속 영적인 투쟁을 벌입니다. ‘말씀이 있으면 내가 믿나 봐라, 너는 떠들어라, 나는 딴 생각한다’ 계속해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자기 것 잘 안 버려요. 그런데 여자들은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초입은 쉬워요. 남자들은 자아가 깨지면 죽도록 충성하는 그런 모습들은 보이죠. 그러나 전반적인 측면에서 보면 처음 예수 믿기로는 여자들이 훨씬 용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장점과 약점이 있습니다. 장점은 예수를 쉽게 믿는다는 것이고 약점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 되시고 능력이 되신다 하여 풍성한 능력을 받습니다. 문제는 뭡니까? 남성적인 요소인 모험이 없어요. 

    다윗을 보십시오.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여 능력을 받았죠? 받고 난 다음에 골리앗을 향하여 ‘너는 칼과 창과 단창을 가지고 나아 오거니와 나는 네가 무시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 하는 모험이 있잖아요. 그래서 골리앗도 물리치지 않습니까? 

   여성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으면 모험이 없습니다. 능력은 받았는데 일은 안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받았는데 역사함이 없어요. 한국교회가 이런 모습 아닙니까?  밤낮 자기들끼리 우리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또 하나 스케일이 작습니다. 스케일이 작다는 것이 나쁜 의미는 아닙니다. 여성들은 스케일이 작아요. 

    희생 그러면  뭐가 생각납니까?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가정 분위기나 배경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가정 그러면 남성이 생각납니다. 잘 보세요. 우리 할아버지는 교회를 위해 예수님을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순교하셨거든요. 우리 집에서 희생은 전부 남성적인 거였습니다. 

    성경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죽으심 같이 남자들은 여자를 위하여 죽으라는 것 아닙니까?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 그 여자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것이  남성의 모습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희생은 남성적인 것입니다.  남성적인 믿음의 요소가 있을 때 순교가 있고 희생이 있고 그런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피흘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성들도 희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성적인 희생은 다른데  그 대상이 주로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주로 자기 자녀들을 위하여 죽을 수 있습니다. 자녀들을 위하여 죽기까지 헌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아줌마들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 보면 자리 하나 얻기 위해 헤집고 들어가고 ‘어쩌면 저렇게 이기적일 수 있을까’ 생각되는 분들도 자기 자녀를 위해서는 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적인 희생이란 주로 작은 영역들입니다. 

    개인적으로 저의 어머니를 보면 대의를 따르기 보다는 정을 따르는 분이셨습니다. 제 자신에게는 복이었어요. ‘나라가 우리를 부른다’ 그럴 때 모두가 뛰쳐 나가면 가정은 누가 돌봅니까? ‘주를 위해서 헌신’ 그럴 때 우리 어머니는 ‘아니다 자식이 먼저다’ 그런 적이 많았어요.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행복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성적인 요소와 남성적인 요소를 다 주셔서 가정도 지키고 교회도 지키고 대의를 이룰 수 있게 하셨습니다. 

    조화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풍성함을 주셔서 아버지 쪽에서는 외부적으로 헌신하는 것에 많이 뛰셨고 어머니쪽으로는 품어주는 것을 통해서 행복감을 느끼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두 요소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성적인 요소로 시작되었지면 반드시 남성적인 요소로 연결되어야만 하나님께 받은 능력 의존성과 모험성을 가지고 헌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연결되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 여성들의 특징은 관계성입니다. 여자들도 모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험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모험을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위대한 일을 하자’고 하면 여자들은 위대한 일 자체에 연루되기 원합니다. 연관되기를 원합니다. 더 큰 사건 즉 꿈과 비전을 얘기하면, 꿈을 주고 비전을 주면 남자가 많이 모일 것 같습니까? 여자가 많이 모일 것 같습니까? 생각보다 여자가 훨씬 더 많이 모입니다. 

    남자들은 논리적이 태도를 많이 갖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교회 안에서 가장 큰 꿈과 비전이 무엇입니까? 선교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 전체를 다 바치자’ 그러면 남자들은 헌신자가 많지 않습니다. 왜 안 나오느냐? 생각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치러야 할 대가를 다 계산합니다. ‘20년, 30년, 40년, 내 평생을 다 바쳐야 하겠지’ 이게 쉬운 게 아닙니다. 하나 헌신은 어렵지만 일단 헌신을 하면 일생을 바쳐서 충성스럽게 바뀝니다. 
 
    여자들은 생각이 깊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도 해야지’ 생각이 간단합니다. ‘나도 껴야지’ 교회에서 단기 선교를 가면 좀 과장해서 90퍼센트가 여자입니다. 그래서 일 년 이 년 비전여행도 가고 비전 있는 듯한 느낌도 받고...  또 몇 년 하다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금방 포기해요. 말은 그래요. ‘하나님이 다른 길로 인도하셨어요’ 이런 소리 하면서 맨날 갑니다. 거기서 남자 만나면 살림 차리고 잘 살아요. 그리고 하나의 죄의식도 없어요. 어차피 ‘그냥 사는 거 아냐?’ 원래 생각이 그렇거든요. With me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하니까. 여기서 속게 됩니다. 

    여성의 헌신이 많아지면 그 단체는 장기적으로 무너집니다. 왜냐?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주셨거든요. 따뜻한 관계성. 여성이 들어가면 따뜻함이 있습니다. 관계가 잘 이뤄집니다. 양육이 이뤄져요. 그러나 지속성에 있어서는 약점이 있습니다.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고 사역에 있어서는 약화되어 버립니다. 

    자전거를 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 끼리 자전거를 타면 의정부에 누가 일등으로 가느냐에 관심이 많아요. 다 떨어뜨리고 혼자 튀어 나갈 때 쾌감을 느껴요. 따라 오는 사람이 없을수록 기쁜 겁니다. 주께 영광 돌리고 감사헌금내야지 하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아무리 다리 힘이 좋아도 절대 혼자 튀어나가지 않습니다. 같이 가는 게 중요해요. 누가 나와 함께 가느냐이지요. 여자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같이 쭉 들어 가는 것이어야지 저렇게 혼자 뛰어가나? 같이 가자고 온 것인데 저렇게 가려면 저 혼자 올 것이지’ 남자들은 버리는 맛에, 떨어뜨리는 맛에 쾌감을 느끼거든요. 여자들은 안 그렇다구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적인 교회들은 관계가 탁월합니다. 따듯해요. 양육이 좋습니다. 초신자가 자라나는데 굉장한 강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약점이 뭐지요. 거기서만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보통 이런 비난을 많이 받지요. ‘한국교회는 믿습니다, 아멘 하는데 모험도 없고 열매도 없고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없다.’ 왜 그래요? 여성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성적인 신앙을 먼저 주셨다는 것이 복입니다. 토대가 튼튼하기 때문에 관계 지향적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제 필요한 것이 뭐지요? 남성적인 모험과 희생하는 믿음만 연결되면서 한국교회는 든든한 기초 위에 세워진 강력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삼일교회 자매들은 의존성과 관계성을 가지고 교회를 풍성하고 따듯하고 안정적으로 만드는데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각성할 것이 뭐지요? 남성들 일어나십시오. 여성들의 따뜻한 토대 위에 모험심을 가지고 희생정신을 가지고 죽기까지 헌신하는 사람이 되야 합니다. 남자들은 막 피를 흘려야 합니다. 온통 깨지고 그래야 그게 믿음입니다. 여자들은 붕대 감아 주면서 ‘왜 그랬어?’ 이런 게 믿음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두 요소가 조화를 이루는 권능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