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청소년교육]

어렵게 얻은 것을 너무 쉽게 잃어버리지 말라

好學 2012. 4. 22. 21:54

《 어렵게 얻은 것을 너무 쉽게 잃어버리지 말라 》

창세기 41:46-57
(창 41:46) 요셉이 애굽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창 41:47) 일곱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창 41:48)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년 곡물을 거두어 각성에 저축하되 각성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중에 저장하매 
(창 41:49) 저장한 곡식이 바다 모래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창 41:50)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을 낳되 곧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은지라 
(창 41:51)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창 41:52)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 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창 41:53) 애굽 땅에 일곱해 풍년이 그치고 
(창 41:54)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식물이 있더니 
(창 41:55) 애굽 온 땅이 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
(창 41:56)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창 41:57)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어렵게 얻은 것을 너무 쉽게 잃어버리지 말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NOBLE FAITH 첫 번째 N입니다. National spirit, 이것이 ‘애국하는’ 이런 뜻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과 짜 맞추어서 설교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전통은 애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기독교가 애국운동을 벌이고 나라의 운명을 책임졌던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일입니다. 구한말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무실역행을 외치고 힘을 길러야 된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나라를 잃을 위기에 처하니까 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육에 전념하고 힘을 길러야 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94년도이지요. LA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나고 난 다음 미주 한인사회의 한인 중 미국시민권을 얻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투표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5% 미만이었고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폭동이 끝나고 난 다음 자신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단체가 없다는 것을 그때 절감했습니다. 당시 한인들은 3대가 서로 각각 놀았습니다. 1대는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 정신없고, 아들 세대는 조국이 뭐 필요하냐고 하고 있다가 94년도 LA폭동 이후 적어도 LA사회에서는 3, 4대가 똘똘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말 배우기 운동이 벌어지고 ‘우리가 미국에 몇백 년 살아도 결국 주류사회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구나’ 그때 절감했습니다. 정치적인 힘들을 기르는 운동을 지금 거의 10년 가까이 벌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번 당해 보아야 정신을 차립니다. 나라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결속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우리는 참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보릿고개가 있었고 먹고 살기 힘든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 열심히 뛰었기 때문에 이제는 웬만한 곳을 가 보아도 한국보다 더 잘 사는 나라 몇 군데 없더라고요. 서울을 기준으로 본다고 하면 우리가 부러워 할 정도의 나라가 별로 없더라고요. 제가 워낙 생활수준이 높은 사람만 보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을 가 보아도 웬만한 부자 빼놓고는 부러울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실질적인 소득에 있어서는 별로 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엄청나게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축복입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이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결코 쉽게 얻은 것이 아니거든요. 엄청나게 노력해서 얻은 것인데 쌓는 것은 오래 걸리지만 무너질 때는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 그대로 어렵게 얻은 것을 너무 쉽게 잃어버리지 말고 이 위에 더 큰 것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남의 탓하는 책임전가, 무지, 실제적인 실력을 기르지 않고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는 것이 우리 민족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백년 전에 얘기했던 것이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까? 오늘 드린 책자에도 나와 있습니다. 안창호 선생의 말씀,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해 왔다. 이것은 나의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부터 온전한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서있어야 애국하는 모습이 될 것인가 저는 이런 모습으로 무장하기 위한 모델로 요셉을 들고 싶습니다.
  요셉과 같은 일꾼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시민들이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 미래를 대비할 줄 아는 민족이 되자

  요셉은 첫 번째 풍년의 유혹을 이겼습니다.
  41장47절을 보시면 “일곱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엄청난 풍부함이 있었습니다. 7년 동안 풍년이 임했습니다. 풍년이 7년이나 되는 것은 유혹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너무 잘되고 승승장구합니다, 우리 안에 승리할 요소가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승리합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다른 모든 나라들은 불황이고 어렵다고 하는데 우리는 어렵다어렵다 하면서 날마다 잘되거든요. 그러면서 젊은이들이 속습니다. ‘원래 잘되는 것이기 때문에 잘되는 것이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왜 7년이나 긴 세월 동안 은혜를 주셨습니까? 개인에게 있어서의 풍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더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이상합니다. 자기가 노력한 것보다 훨씬 풍성한 열매를 얻습니다. 인풋에 비해서 아웃풋이 많습니다. 그러면 풍년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명이구나 하나님께서 더 많이 주신 것은 내가 무슨 일을 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명이구나’ 하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깊은 고뇌에 빠져야 됩니다.  높은 곳은 축복의 자리가 아니라 시험의 기간입니다. 7년 동안의 풍년이라는 것은 축복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시험의 자리입니다. 고민해야 썩지 않습니다. 높은 곳은 위험한 곳입니다. 준비해야 합니다. 풍년의 유산과 함께 하나님 앞에 낮아지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큰 그릇인지 작은 그릇인지는 무엇을 줘 보면 압니다. 무엇을 주었을 때 금방 교만해지면 작은 사람입니다. 계속 주는데도 불구하고 주시는 하나님을 잊지 않고 겸손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큰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이제까지 굉장히 많은 풍년을 주셨습니다. 유혹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겸손하게 미래를 대비할 줄 아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절대로 7년 풍년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넘치도록 감사해야 되는 것이고…… 또 계속되는 풍년이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이후를 대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 민족이 풍년의 때에 흉년을 대비하는 지혜를 얻는 거룩한 민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소유하기보다는 사용할 줄 아는 민족이 되자

  두 번째로 요셉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사용에 초점을 맞추는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나왔던 제러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이라는 책이 있지 않았습니까? 원제는 The age of access(접속의 시대)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과거에는 소유의 시대였는데 21세기 미래의 시대는 접속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원제는 접속의 시대인데 한국에 번역될 때는 역시 과거지향적인…… 「소유의 종말」이 되었습니다
  소유의 종말, 맞습니다. 소유의 종말이 일어나고 접속의 시대가 온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과거에는 무엇을 가져야만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같이 네트워킹 하는 링크의 시대, 허브개념을 갖고 있는 시대에는 무언가를 갖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과 접속을 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이 진짜 실력 있는 사람이고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사용개념입니다.
  요셉은 벌써 창세기시대에 이런 접속의 개념을 알고 있었고 사용의 개념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유가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48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년 곡물을 거두어 각성에 저축하되 각성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중에 저장하매”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욕심이 있는 보통 사람 같으면 수도(首都)에 창고 수천 채를 지어 놓고 난 다음 ‘전국에 있는 모든 곡물들, 다 수도로 모여라!’ 이렇게 했을 것 같은데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이미 있는 것을 리모델링했습니다. 각 성에, 지방에 있는 창고에 저축하되 그 성중에 저축했습니다. 새로 만들지 않고 있는 것 활용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지요? 7년 동안은 풍년이지만 곧 흉년이 되면 곡식은 다 먹어서 없어질 것 아닙니까? 요셉에게는 미래를 대비하는 시각이 있었습니다. 각 성중에 있는 창고에다가 저축하면 창고를 새로 짓는 비용도 안 들고 물류비용이 절약되지 않습니까? 곡식 왔다갔다 나르면, 동선이 길면 길수록 비용이 많이 드는 것 아닙니까? 물류비용만 많이 들고 좋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건축하지 않았습니다. 7년 이후의 흉년을 생각하면서 합리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도 이 정도 기본적인 생각만 한다고 하면 쓸데없는 건축 같은 것 안 하겠지요. 지금은 필요하지만 조금 지나면 없어질 것들…… 나는 한국교회가 그렇게 될까봐 걱정됩니다. 잔뜩 지어놓고 난 다음에 나중에 못쓰면 어떻게 합니까? 교육관도 그렇지요. 지어놓은 다음 후손들이 잘 쓸 수 있게 만들어 놓아야지요.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지만 부흥이 떠나서 사람들이 없어지면 유럽 같이 되어버리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안 되겠지요? 당장 투자한 것이 쓰임 받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건축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면 이 정도로 성장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건물은 교회의 본질이 아니잖아요. 필요하면 빌려 쓰면 되는 것 아닙니까? 빌려 쓰면 되잖아요. 저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더 빌려 쓸 수 있으면 빌려 쓰고 싶지만 더 이상은 교육을 위해서 빌려 쓸 수 없잖아요. 빌려 쓸 수 없는 마지막 단계까지 왔습니다. 지금도 우리 계속 계산을 해야 합니다. 과연 짓는 것이 더 합리적인가 아니면 빌려서 사용하는 것이 합리적인가 계속해서 계산을 해야지요. 기회비용을 계산해야 합니다.
  요셉은 벌써 창세기시대에 이런 것을 계산했습니다. 쓸데없는 것 안 만들고 사용개념으로 생각했습니다. 소유개념에 빠지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요즘에 얘기하는 것 중 맞지 않는 것 하나가 있는데 ‘부동산 가격 폭락한다’만 맞지 않고 있어요. 우리는 아직까지도 소유개념이 있어서 땅을 가져야 되고 내집을 가져야 되고…… 제 상식으로는 21세기는 이것이 아니거든요. 분명히 빌려 쓰는 개념인데, 이거 분명히 깨지게 되어 있는데 너무 오래 끄는 것 같습니다. 조만간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폭락합니다. 이제는 소유의 시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를 가보십시오. 소유개념으로 있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다 랜털 개념입니다. 접속의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셉은 벌써 이것을 과거에 다 알고 그 개념 속에 접근했습니다.

3. 대가를 지불하는 민족이 되자

  세 번째로 요섭은 도덕적 해이를 경계했습니다.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보통의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요셉 정말 나쁜 놈이다’ 할 수 있지요. 봉이 김선달 같습니다. 쌀 때 사재기해서 먹을 것 없을 때에 비싸게 되파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이럴 수 있느냐, 이것이 바로 매점매석 아니냐’라고 얘기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애굽에 있는 모든 곡식을 백성들에게 공짜로 나누어 주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백성들이 그 곡식을 아꼈겠습니까? 절대로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7년 흉년 못 견딥니다. 공짜로 주면 다 날아갔을 것입니다. 공짜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뉴욕시는 물 값이 공짜입니다. 어떤 부자가 정신이 나갔는지 뉴욕의 물 값은 자기가 다 낸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뉴욕에 가면 모두들 물 틀어 놓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까운 줄을 모릅니다. 물이 너무 아깝습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도시 전체가 위험해지는 것 같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도 화장실 문 잠그는 것이 없습니다. 다 망가뜨려 놓고…… 도덕적 해이 현상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셉은 곡식을 돈 주고 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돈 주고 산 것에 대해서 아끼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집을 팔던지 자기 목숨을 팔든지 해서 책임을 지게 만들잖아요. 정신이 썩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풍년/흉년 이러면서 사람들 정신이 썩어버립니다. 저는 이렇게 얘기했지요.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악 가운데 하나가 비굴하게 만들고 자존심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그러나 정당한 대가를 치르면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자존심 사라지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자존심을 잃어버리게 만들면 안되지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정치가들이 빚 탕감해 주고 자꾸 사면(赦免)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함부로 하면 도덕적 해이 현상이 벌어집니다. 특별히 젊은이들의 정신을 썩게 하면 안 됩니다. 민족의 미래를 망치는 것입니다.
  우리 일반적인 교회를 보십시오. 선교나 수련회 가면 하루정도 늦게 오면서 회비 안 내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그것 뿌리 뽑았지요. 우리는 하다못해 밥해주러 가시는 분도 회비 다 냅니다. 교역자들도 회비 다 내고…… 돈이 아까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도덕적 해이를 막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대가를 치르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당하잖아요. 오히려 더 열심히 하잖아요. 정신이 썩으면 안 됩니다. 돈 몇 푼에 정신이 썩으면 안 됩니다. 요셉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교회의 청년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세대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통 젊은이들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밥 사주고 도와주어야 된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정신이 썩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왜 한국의 젊은이들이 약한지 아십니까? 미국 유학갈 때 부모들이 돈 대 주어서 그렇습니다. 도대체 나이 스무살 넘은 자식에게 돈 대 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자식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돈 받아 써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이북사람이라서 그런 것이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게 그런 의식을 심겨 주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지금까지는 돈을 벌어서 썼습니다. 한번도 받아 쓴 적이 없습니다. 또 그것을 당연히 생각했습니다. 그런 식의 생각을 심겨 주어야 합니다. 오랜 기간 동안 학비를 대주면 자식을 망치는 것입니다. 잘 봐요! 서른다섯 넘었는데도 공부를 더 하겠다고 합니다. 세상에 이렇게 정신 나간 놈들이 있습니까! 밥 줄 끊어 보십시오. 당장 현실에 들어가서 일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1세대의식입니다. 저는 삼일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1세대의식을 심겨주기를 원합니다.

4. 항상 점검하는 민족이 되자

  도덕적 해이를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이렇게 자기 책임 하에 살게 만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피드백입니다.
  항상 점검해 주면 도덕적 해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인가 우리 집에 있는 삼성 전자제품이 망가졌던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리를 하러 왔습니다. 다 고치고 갔습니다. 그다음에 전화가 왔어요. ‘문제없습니까? 고치러 갔던 기술자 친절했습니까? 몇 점을 주고 싶습니까?’ 별 것을 다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95점을 주고 싶습니다……’ 하면서 쭉 얘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제 마음 속에 묘한 확신감, LG 사지 말고 삼성을 사야지 이런 느낌이 들었더라고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수리해 주고 난 다음에 피드백이 있으니까요. ‘불편한 것은 없었습니까? 잘해주었습니까? 더 문제 있으면 연락해 주십시오.’ 이렇게 피드백을 하니까 완전한 신뢰감이 생기더라고요. 그러니까 그 기술자가 제대로 안할 수가 없지요. 내가 하고 난 다음 소비자한테 알아보니까요. 도덕적 해이 현상을 깨는 것입니다.
  저는 거기에서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우리 민족이 사는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우리 민족은 피드백이 없습니다. 일을 하고 난 다음 뒷감당이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피드백을 제도화시키면 우리 민족은 절대 썩지 않습니다. 늘 재평가해야 합니다. 저는 음식점 갈 때마다 하는 항상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전에 우리에게 서빙했던 그 사람 이름 하나 외워놓고 그 한 사람의 이름을 들면서 그 사람 있냐고 묻습니다. ‘그 사람 정말 잘해 주던데……’ 이 한마디 하면 모르는 사람도 와서 너무 잘해 줍니다. 이 사람은 항상 체크하는 사람이구나, 이름까지 외우는 사람이구나, 먹을 것도 더 갖다 주고 대우가 달라집니다.
  피드백이 몸에 배어야 합니다. 그러면 달라집니다. 우리 교회도 피드백해야 합니다. 누가 왔는지 안 왔는지 체크하는 것이 쫀쫀한 것이 아닙니다. 체크해야 합니다. 피트백이 있어야 성장하고 피드백이 있어야 썩지 않습니다. 우리 선교를 다 끝나고 난 다음에 피드백하잖아요. 그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우리 민족!
  뜨겁게 열받아가지고 뛰는 것만 하지 마시고 한 가지 한 가지씩 체계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부터 해야 합니다. 정치가들은 여력이 없습니다. 정신운동은 교회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도덕적 해이 현상을 이길 수 있는 길들을 한 가지 한 가지 찾아가는 도구되게 해 주십시오.
  밤낮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개념으로 옮겨갈 수 있는 정신개혁을 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풍년은 유혹입니다. 유혹이라는 것을 명확히 깨닫고 대비하는 민족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실 줄로 확신합니다.

  오늘도 요셉에게서 배운 것을 가지고 우리 민족의 새로운 앞길에 지침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지켜 달라고 다같이 하나님께 간구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