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청소년교육]

만남(2)/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전16:13-14

好學 2012. 8. 14. 22:25

 

만남(2)/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전16:13-14

 

 

본문: 고전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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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명한 가정회복 사역자 제임스 답슨의 책 Bringing Up Boys에서 미국사회의 모든 문제의 뿌리는 남자를 남자답게 키우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남성성만 회복시켜 주면 문제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회를 만드실 때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를 이루도록 하셨는데 남성성이 다 무너지고 여성적인 영향력이 확대되어 결국 사회가 다 무너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엘드리지의 Wild at Heart에서도 비슷한 접근을 합니다. 남성성이 있어야만 교회가 능력 가운데 선다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남녀가 다르게 지으셨습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도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르다는 전제가 있었지요. 이것 성경적인 전제입니다. 남성은 남성답게 여성은 여성답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남자가 되고 여자는 여자가 될 때 전체적인 사회는 조화를 이루고 강력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도 남성의 회복이 있어야만 진정한 부흥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성의 마음, 남성의 열정, 진정한 본성이 회복되어야만 교회의 풍성함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토크쇼 같은 것들을 보면 여자들이 모여 남자를 비웃는 얘기들을 하지요. 진짜 남자가 있어 그러면서 까르르 웃고 그럽니다. 그런데 저는 그에 대해 한 가지 얘기할 것이 있습니다. 사회가 언제 남자를 남자답게 키우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습니까? 전부 여자 같이 만들어 버리고 난 다음에 그 말대로 순종했던 남자들을 또 다시 비난을 한다는 것 말이 안되는 거지요.

어제 한 간사와 얘기를 나누었는데 자기는 답답하다고 그럽니다. 뭐가 답답하냐 물으니 요즘 남자 애들이 남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남자애들이 하는 얘기가 주로 ‘상처가 있어요, 힘들어요, 외로워요, 혼자 있고 싶어요, 나가기 싫어요, 햇빛이 강하니 얼굴 타요’ 이게 남자가 할 얘기입니까? 남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잘못된 교육이 교회 안에서도 횡횡하여 그리스도인 남자 그러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저만 그런 느낌이 드는가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아닙니까? 밤낮 앉으면 큐티 합시다, 쉐어링 합시다 씩 웃고 율동이나 하면서... 밖에 나가서 거칠게 뛰고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새로운 길을 열고 하는 모습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남성적인 교회를 통해서 교회를 힘 있게 만드시고 여성적인 교회를 통해 교회를 안정적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의 여성적인 모습이 강해지면 양육이 강해집니다. 교회는 어머니 품 같다 그러잖아요. 필요한 것입니다. 남성적인 모습을 통해서 남이 안 간 길, 안 해 본 일, 남들이 두려워하는 길을 뚫는 모험심을 주고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정신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신 말씀처럼 희생하는 것도 남성적인 것입니다.

희생할 줄 알고, 섬길 줄 알고, 죽을 줄 아는 모습들, 피 흘리기까지 충성하는 모습들, 순교적인 열정들이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이유가 뭡니까? 남성성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남성성이 회복되는 모습은 무엇입니까? 모험정신과 희생정신입니다.

먼저 형제들로 하여금 모험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창조를 하실 때 모든 것이 갖추어지지 않은 황무지 상태에서 남자가 태어났습니다. 그런 다음에 에덴으로 옮기셨죠. 그래서 그런지 남성성 속에 싸돌아다니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결혼해서 아이 낳아 보면 잘 압니다. 남자와 여자아이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여자아이는 혼자서도 잘 놉니다. 남자애는 극성이라고 그러죠? 남자아이 둘 키우면 허리가 휘어요 그런 얘기 많이 하지요?

저도 어릴 적 청파동에 살았는데 길이 있으면 끝이 어딜까 하는 욕망이 생겨요. 나이 세 살 때 불광동까지 걸어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을 몰라서 헤매고 그랬는데 어머니는 거의 기절상태가 되고. 세 살 적 일이라 기억은 안 나는데 워낙 유명한 일이라 계속 리마인드가 되었습니다. 열 살 때도 한번 듣고 열두 살 때, 스무 살 때 계속 들어서 지금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그 때 생각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 길의 끝이 무얼까? 그게 남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한 번도 없으면 남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미지의 세계, 산에 올라가면 고향에 온 듯합니다. 거친 들판을 달릴 때 ‘와 여기구나’ 하고 느낍니다. 자전거를 탈 때 도로보다는 산악자전거, 흙을 밟고 땅의 느낌을 느끼고 이럴 때 남성이 막 살아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티비 광고 가운데 아웃 도어 웨어 파는 노쓰 페이스 광고 선전 중에 ‘나는 사무실에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택시에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도로 위에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모험을 감행하라’ 이런 말을 들으면 피가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여자들은 그게 뭔가 하지만 남자들은 ‘그래 나다’ 하면서 그 옷 사 입고 돌아다니고 싶어집니다. 여자들은 왜 그런 거에 넘어가는지 잘 모릅니다. 남성이 그런 것입니다. 여자들은 이해를 못하죠.

자매들과 얘기하다 보면 “남자들은 왜 매일 싸우려고 그래요?” 묻습니다. 무엇 땜에 저러는지 여자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남극, 북극 같은데 서로 먼저 가려고 경쟁하는데 여자들은 “왜 그런 데를 왜 가요? 추운데.” 하고 말합니다. 스캇이라든지 아문젠은 남극을, 쿡이나 피어리는 북극을 먼저 가려고 경쟁합니다. 이것이 남성이라는 것입니다.

규격화 되지 않은 거친 마음,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통해서 미지의 상황을 향해서 개척적인 상황을 향해서 나아가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나 사회나 남성성의 회복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면 진취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못하는 걸 할 수 있는 진보적인 형태가 나타납니다.

잘 보십시오.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던 모세라든지 바울이라든지 그들의 특징이 뭡니까? 남성성입니다. 모세는 남성성이 있으니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명과 소명을 듣지 않습니까? 애굽의 왕궁에서 왕자로서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을 광야의 지도자로서 해내지 않습니까? 바울을 보십시오. 그도 학문의 자리에 머물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광야성이 있지 않습니까? 개척정신을 가지고 남들이 안 간 길, 남들이 세운 터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나가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남성성이 활용되어서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큰 유익을 얻었습니까? 이런 남성성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디 엘 로렌스란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남자는 기계가 아니다, 남자는 땅에서 리듬을 느껴야 한다’ 저는 맞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는 말고삐룰 쥐고 거친 밧줄을 잡고 삽을 들고 이럴 때 남성이 막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모험하는 정신들. 우리 교회 안에 이런 것들이 다 사라지니 이게 문제가 되는 거지요.

어제 예배와 교역자 회의 마치고 멀리 여행을 좀 가고자 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서울을 벗어나서 멀리 가보자 했더니 사람들이 잘 안 하려고 해요. 교역자 중에 총각들은 개척정신이 있었습니다. 제주도 같이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에 떨어뜨려 놓고 개척하라고 하면 얼굴에 붉은 핏빛을 띄고 의욕에 차서 뛰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안 가려고 해요. 피곤한지 눈만 껌뻑껌벅, 몸은 늘어져 있고 안 가겠답니다. 몇 사람만 갔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가 왜 이런 어려운 일들이 생기나 하면 지도자의 개척정신이, 모험심이, 땅의 느낌을 받는 것이 다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역자 가운데 제일 어려운 일을 당하시는 분이 박종호 목사님 아닙니까? 아들 승하가 소아암에 걸렸습니다. 집안에 이런 일을 당하면 물질적 충격, 정신적인 충격, 체력적인 고갈이 생깁니다. 집안에 암으로 투병하는 사람이 생기면 대개 분위기가 우울합니다. 울면서 보내고 어렵다고 그럽니다. 그런 와중에 체력적인 고갈이 와서 병 수발하던 사람이 먼저 병이 나버립니다. 어렵지 않습니까? 제가 박목사님께 가자고 그랬습니다. 어려운 일 가운데 체력도 중요하고 마음의 돌이킴도 중요하다고. 그래서 같이 가서 의욕적으로 운동했더니 육체적인 회복도 일어나고 정신적인 회복도 되고 대화도 많이 하면서 영적인 교감을 많이 나누었습니다.

잘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이 땅을 살다가 원하지 않는 고난을 당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고난에 대해서 밤낮 위로만 할까요? 맞닥뜨려서 싸워야 할 것 아닌가요? 싸워서 이기려면 건강한 정신, 건강한 체력, 건강한 믿음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싸워야 될 것 아닙니까? 같이 기도하고 같이 일어나고 같이 웃고 밝고 그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런 의미에서 이것이 참된 믿음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같이 체력을 보완해서 가정을 일으켜 세워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것이 지도력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남성성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들이 감기도 안 걸렸는데 늘어져 잠만 자는 사람들 이게 뭡니까? 살았다 하지만 죽은 자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우리 교회는 개척적인 정신을 가지고 뛰는 데 가장 강한 강점이 있습니다. 용인 외국어 고등학교, 아무도 환경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개척적인 환경에 부딪히니 일을 해내지 않습니까? 제주, 대만선교 아무런 조건도 없는데 내보내니 일을 해내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 초창기를 보면 팀장들이 대개 남자들이었습니다. 왜? 자매들이 감당하지 못할 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첫째 너무 험난한 곳에 보냈고 둘째 환경이 너무 열악했고 셋째 두려움 가운데 빠져 있기에 여성이 팀장을 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거의 90퍼센트 이상이 남자들이었는데 지금은 선교가면 거의 팀장이 여자들입니다.

이제 안정적이 되고 매뉴얼도 쌓여 있고 다 뻔한 일이니까. 밤낮 선교 간다고 그러면 준비하는 일이 뭔가요? 어린이 선교한다고 하면서 삐에로 모자 만들고 오리고 붙이고 그게 선교입니까? 믿는 아이들 모아놓고 하는 게? 초창기에는 개척적인 상황에서 무당들이 변화되고 할렐루야 하면서 돌아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일이 벌어져야 하지 않습니까? 술집에 들어가서 복음 증거하다가 술병으로 맞고 하는 것들이 성도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 팀장들은 될 수 있으면 남자들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여자들은 양육이나 보호하는 것으로 보완이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안 되는 교회들을 보면 여성적인 리더쉽이 90퍼센트씩 됩니다. 그런 것 느끼시지 않습니까? 교회 프로그램을 하면 남자들은 안 모이고 왜 여자들만 모이는가? 남자가 안 모이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여성적이기 때문입니다. 남성적인 요소가 없어요. 남성적인 요소가 뭐라구요? 안 가 본 길을 가고, 험난한 길을 가고, 힘든 길 가고 하는 모험정신이라구요. 모험이 있으면 모여들게 되고 변화받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삼일교회의 남성들이 모두 야생마로 크기를 바랍니다. 거친 땅에서 숨을 헐떡이는 모습을 보았으면 합니다. 그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성적인 모습이 약간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망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맨 수평이동이나 한다고 그러고 양육이나 한다고 개척교회가 없어지고 왜 그렇습니까?

남성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래요.. 모험정신이 사라졌기에 그렇습니다. 왜 복음 증거할 데가 없습니까? 가는 곳마다 복음이 증거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꽂혀야 되지 않습니까? 남성들이여 일어나십시오. 모험정신으로 일어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이 땅의 남성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또 한 가지 남성성이 무엇인가 하면 희생정신입니다. 특별히 아름다운 것을 구원하려고 하는 정신, 이것이 남성성입니다. 아름다움 그래서 혹시 오해하는 여성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로미오에게는 줄리엣이 있었고 로빈에게는 마리안이 있었고 뽀빠이에게는 올리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움만큼 남성을 설레이게 만드는 것이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남자가 남자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인이 있어야 합니다. 여인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희생할 대상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힘을 발휘합니다. 언제부터 아담이 아담 되었습니까? 하와를 보는 순간 아담이 된 거에요. 소설이나 동화를 보면 남자들이 성을 급습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자 때문에. 트로이 전쟁이 그렇고 거인과 싸우는 것도 여자가 걸려 있기에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냥 나가서 싸워라 그러면 안 나갑니다. 성벽에 왜 기어올라요? 여자 때문에. 이게 나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셨어요.

문학작품에서 제일 위대한 것 중 하나가 헌화가입니다. 수로부인이 지나가다가 주책스럽게 '절벽 위의 꽃이 예뻐. 누가 따 줄 사람 없어?' 말합니다. 그게 여자입니다. 그런데 젊은 남자가 뛰어 올라가 땄다 그러면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누가 나섰는가 하면 왠 노인이 하나 올라가서 땄다구요. 저는 그 노인에 대해서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그게 남자에요. 60이 되었든 70이 되었든 여자가 따 달라고 하면 목숨을 걸로 따는 게 남자라구요. 우리는 거기서 희망을 느끼잖아요. 이런 남자 없어요? 지금은 스무살도 안 올라가요. '다치면 어떻해? 미래가 없잖아. 나 보험도 없는데' 이러니까 안 되는 겁니다.

남성적인 본성이 무언지 아십니까? 바로 희생정신입니다. 남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것. 느헤미야가 왜 위대한 지도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느헤미야 4장 14절을 보니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독려하면서 그가 외쳤던 메시지가 뭔지 아십니까?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하나님을 기억하자''가 첫 번째 메시지였고,

두 번째는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해 싸워라’ 누굴 위해서 싸우라구요? 아내와 자녀와 집을 위해서 싸우라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불끈 일어났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남성들이여!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희생할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호할 대상이 아내와 자녀와 집이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 아내와 자녀와 집을 위해서' 그러니 남자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게 남성성입니다.

제가 결혼 주례 시마다 항상 하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진정한 남성성이 뭐라구요? 할리 데이비스나 몰고 다니고 가죽 자켓 입고 다니며 개목걸이를 하고 가슴에 발모제 뿌려서 털이나 나게 하고 이게 남성다움이 아니라고 그랬죠? 남성다움은 그 여자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가 이게 남성다움이라구요.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서 죽으셨던 것 같이 남자들도 그 아내와 자녀를 위해서 죽을 수 있을 때 그게 남성다움입니다. 한 사회의 남성성이 살아나야 희생이 살아납니다. 희생하는 사람은 반드시 영웅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남자들이 밤낮 겁에 질려가지고 희생할 줄도 모르고 자기 것밖에 모르고.

세상에 말도 안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꽃미남. 왜 남자가 미남이 되어야 합니까? 남자는 대충 생겨야 되고 미녀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게 남자죠. 왜 자기가 미남이 되려고 애쓰죠? 티비나 영화도 이상한 사람들이 나와서 설쳐야 되요. 그리고 여자들을 미인 되게 만드는 것 이게 남성성이죠. 자녀들을 꽃자녀처럼 만드는 것이 남성이지 자기가 꽃미남 되는 게 남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성성은 희생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죽도록 나아가는 것. 교회 안에 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남성성이잖아요. 희생이 사라지고 피 흘림이 사라졌잖아요? 모험정신이 사라져서 남들이 안 간 길은 안 가려고 하잖아요. 어려운 길 안 가려고 그러잖아요. 그리스도 복음의 상당부분은 남성성입니다. 그리스도는 남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피 흘리기까지 죽었잖아요.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가지 않습니까? 모세를 보고 바울을 보십시오. 우리 안에 이런 것이 회복되어야겠습니다.

교회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성을 통해서 따뜻함과 양육과 배려하는 사랑 그런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남성을 통해서 모험하고 길을 뚫고 나가고 어려움을 감내하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성도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섬기고 죽을 줄 아는 모습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남성들이여 남성들이 되십시오. 그럴 때 교회의 풍성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서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