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漢字文學/(한자교육)署名運動

‘秋夜雨中’

好學 2012. 6. 24. 17:28

‘秋夜雨中’

 

 

文 龍 鱗
서울大學校 敎授 / 前 敎育人的資源部 長官 / 本聯合會 指導委員

 


韓末이후부터 지금까지 한글專用을 외곬으로 주창해 오신 많은 先覺者들 덕분에 한글專用의 전통이 깊숙이 뿌리 내렸고, 그래서 40대 이하의 젊은 세대들이 한글만으로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이 言語生活을 하고 있다는 점을 고맙게 생각한다.
우리가 한국의 흙을 밟고, 한국의 공기를 호흡하고, 한국의 산과 들을 바라다보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지금 한글로 듣고, 말하고, 쓰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한글專用 노력의 엄청난 성과를 높게 치하해야한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한글은 이제 韓國人의 글자이자 언어로 탄탄한 반석 위에 놓여졌다. 즉 한글을 우리나라의 唯一無二한 글로 키워나가야 한다.
그러나 한글專用이 漢字使用을 배척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즉 한글專用이 漢字倂用을 반대하는 논리로 牽强附會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漢字倂用을 주장하는 것이 한글이 우리나라의 唯一無二한 글자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漢字倂用 주장이 한글의 기능을 貶下하고 用途廢棄하자는 한글無用論이 아니기 때문이다.
韓國人의 언어생활을 한글만으로 제한하려는 과도한 집착은 옳지 않다. 初等學校에서 영어교육을 하자는 주장이 한글專用論에 대한 반대로 오해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漢字倂用 주장이 한글전용에 대한 반대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
편협한 한글專用論은 인간의 變化無雙한 언어생활에 不自然스런 통제와 제한을 惹起시켜서 오히려 한글의 기능성과 적응성을 毁損시켜서 한글의 生命力을 위축시킬 可能性도 크다. 그 逆機能이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다.
漢字를 못 배운 40대 미만의 젊은 세대의 대다수가 우리 文化遺産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漢字倂用 書籍이나 資料에 대한 文盲者가 되었다. 그들은 단지 漢字 文盲者가 아니라, 우리 歷史에 대한 文盲者요, 文化에 대한 文盲者요, 우리 弔喪들의 精神世界에 대한 文盲者로 전락해 버렸다.
그래서 한글專用을 고수하되, 漢字倂用을 가미하는 언어정책의 도입이 필요하다. 한글을 우리의 중심언어로 굳건히 위치시키면서 우리의 傳統과 現代, 그리고 未來文化 形聲에 기여하는 漢字와 기타 外國語를 융통성 있게 효율적으로 倂用하고 활용하는 개방적인 한글專用論이 필요하다.
漢字倂用이 왜 중요한가? 많은 까닭이 있지만, 그 중에서 漢字倂用이 文化의 窓을 여는 엄청난 효용가치가 있다는 점을 강조해 보고자 한다.
展望이 좋은 집을 가진 사람이 窓門을 열어 밖을 내다보지 않는다면 매우 이상할 것이다.
여러 채널을 볼 수 있는 좋은 TV를 가진 사람이 어떤 채널을 잠가 놓고 보지 않는다면 매우 이상할 것이다. 또 금은보화를 가득 채운 곳간을 여러 개 가진 富者가 子孫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어느 큰 곳간의 열쇠를 물려주지 않는다면 크게 이상할 것이다.
우리가 젊은 세대에게 漢字를 가르친다는 것은 바로 그들에게 닫혀있던, 그들이 내다 볼 수 없었던 窓門을 열어 주는 것과 같다. 이 窓門을 통해서 즉, 漢字倂用을 통해서 祖上들이 일궈온 文化의 유산을 좋은 展望을 바라보듯이 내다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漢字를 가르친다는 것은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TV 채널을 열어 주는 것과 같다.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漢字를 가르친다는 것은 금은보화가 가득 담겨있으나 열쇠가 없어서 열지 못했던 곳간의 열쇠를 전해 주는 것과 같다.
이제 漢字를 가르침으로서 우리는 그들에게 그 열쇠의 해독 코드를 가르쳐 주는 셈이 되는 것이다. 漢字混用은 한글전용 세대들에게 우리가 대대로 이룩해온 문화의 창을 활짝 열려는 노력인 셈이다. 그러니 어찌 중요하지 않으랴.

 


新羅末期 孤雲 崔致遠(857~?)의 詩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유학 중이던 18세 어린 나이에 지어서 당시의 중국 식자들을  놀라게 했다는 시다. 그 제목이 秋夜雨中이다.

秋風唯苦音 (추풍유고음)
世路少知音 (세로소지음)
窓外三更雨 (창외삼경우)
燈前萬里心 (등전만리심)
가을 바람 맞아 외롭게 시를 읊는데,
지나가는 누구도 귀담아 들어 주는 이가 없구나.
창밖은 한밤중,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등잔불 앞에서 마음은 만리 밖 고향으로 내 달린다.

이 詩의 감동은 물론 한글로도 전달된다. 그러나 漢字를 알면 이 詩의 意味는 훨씬 더 깊이 다가온다. 崔致遠은 분명히 자랑스런 우리의 祖上이다. 그는 중국을 포함한 천하를 감동시킨 당대 最高의 文章家였다. 그의 감성과 사고의 진수를 한글로서만이 아니라 漢字를 통해서 맛보게 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또 하나의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여는 것과 같다.
추야우중과 秋夜雨中의 두 창문을 모두 열게 해주자는 것, 바로 그것이 漢字倂用 主張의 요체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