俳優는 사람이 아니다
- 漢字, 그 無限量의 寶庫 -
洪 光 植
本聯合會 理事
며칠 전의 일이다. TV를 켰더니 마침 50餘年의 긴 演技生活로 國民의 사랑을 받고 있는 老 俳優가 아나운서와 對談하는 畵面이 떴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끝나고 마지막에 한 그의 마무리 말이 印象的이었다.
“俳優라는 漢字를 보십시요. ‘俳’자가 ‘광대 배’자인데 사람人 옆에 아닐 非를 쓰지 않았습니까? 俳優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이 漢字의 뜻처럼 俳優는 사람이 아닙니다. 즉 普通人의 상식으로는 理解 할 수 없는 苦痛을 겪으며 사는 非 正常人입니다.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은 사람 以下의 動物性을 지닌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사람 以上의 超人的 境地에 이른 사람을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俳優는 演技를 위해서는 제 스스로를 버리고 오로지 作中 人物의 거짓 삶을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불과 2, 3분의 演技를 위해 數百里 떨어진 撮影場까지 긴 時間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往復할 때도 있습니다. 멀쩡한 얼굴에 흙 칠, 먹 칠도 甘受해야 하고 더운 여름에 가죽옷을 입고 땀을 뻘뻘 흘기기도 하고 추운 겨울에 맨 몸으로 바다 속에 뛰어 드는 演技도 해야 합니다.
이 모두가 제 意志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제 스스로를 버리는 일이 아닙니까. 어디 그 짓이 한번에 끝나기나 합니까. 같은 짓을 여러 번 되풀이해야 짧은 한 場面이 건져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어디 사람이 할 짓입니까. 그러나 이제 이 일이 저에겐 召命으로 굳어 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俳’자의 意味를 떠올리며 藝術魂을 불태워 왔습니다. 이것이 모름지기 俳優의 本分이라고 생각합니다. 萬一 이 漢字의 뜻을 몰랐다면 이 일이 天職으로 다가서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俳’字만 가지고 이야기를 했지만 筆者는 문득 ‘優’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넉넉 할 우’, 사람 人 옆에 근심 憂를 더한 것이 아닌가. 넉넉한 사람은 근심을 겪어 내야 한다는 人生의 哲學的 命題가 內包 되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俳優는 비록 제 意志의 삶을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演技를 통해 근심을 겪고 이겨 낸 넉넉한 사람이라고 定義할 수도 있지 않을까?
漢字를 통해 職業意識을 터득했다는 이 老俳優의 이야기를 듣고, 아! 그렇구나하며 感歎을 하였다. ‘배우’라고 한글로 百番을 써 놓고 들여다본들 이런 속 깊은 생각을 떠올릴 수가 있을까? 물론 俳優라는 漢字語가 이런 생각 끝에 生成된 말은 아닐 테지만 漢字를 통해 이런 생각을 類推해 낸 것이 얼마나 尊敬스러운가. 이 老 俳優의 말을 들으며 소리와 함께 뜻까지 어우르는 漢字가 지닌 含蓄性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 해 보았다.
말은 文字를 통해서 다듬어지고 그 意味가 分明하게 傳達 된다. 우리 나라는 表音文字인 한글과 表意文字인 漢字를 混用할 수 있는 與件을 갖춘 世界에서 類例가 드문 나라이다. 이 두 文字를 混用할 수 있기 때문에 理想的인 文字生活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글만으로도 우리의 語文生活이 克服될 수 있다고 主張하는 偏向된 所信을 가진 일부 人士들의 힘에 밀린 爲政者들이 한글專用을 政策化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바람에 자라나는 世代의 知的 情緖的 발달이 沮害 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漢字 活用은 낡은 事大主義이고 한글 活用만이 主體性 있는 民族主義인양 國民을 糊塗하여 왔다. 그 結果 漢字 몇 百字만 알아도 그 語義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말을 知性人을 自處하는 젊은이들이 理解하지 못 하는 어처구니없는 結果를 초래하였다. 그 많은 同音異義語를 어찌 表音文字인 한글만으로 識別할 수 있으랴. 한글專用 政策때문에 우리 國語의 全 領域에서 소중한 漢字語가 거의 추방당하여 우리 國語가 그 機能을 다 하지 못 하게 되었다. 이 일은 學問探究와 人性敎育에 그대로 연계되어 知性과 道德性이 缺如된 國民을 量産하는 否定的 결과를 招來하게 되었다.
‘국기가 흔들리고 있다.’ 요즈음 新聞이나 放送에서 흔히 接하는 말이다. 漢字를 모르는 대다수 靑少年들에게 한글로만 表記된 이 말이 어떻게 受容될 것일까? 漢字를 떠올리며 多角度에서 이 말을 검토할 能力이 없으니 그냥 흔히 듣는 國旗만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분명히 國基의 뜻으로 썼을 것인데 이 뜻을 떠올릴 漢字 語彙力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國語辭典을 찾아 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漢字를 통해 分化되는 同音異義語를 分別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상당한 水準의 敎育을 받고도 國語辭典에 실려 있는 漢字를 식별 할 수 없는 판이니 恨歎스럽기만 하다.
요즈음 또 ‘해전사를 다시 써야한다’고 學者들간의 論爭이 熾烈하다. 이 한글 主題만으로는 海戰史인지 解前史인지 그 語義를 구분 할 수가 없다. 거기에 後續되는 內容을 읽어보아야 어느 것인지를 구분할 수가 있다. 이 답답한 事情을 잘 알면서도 國家는 한글專用政策을 계속 固執하고 있다. 이 무슨 억지인가. 이럴 겨우 ‘國基, 解前史’라고 漢字로 직접 露出시킬 必要가 정말 없는 것일까? 한번 읽고 그 內容을 바로 理解 할 수 있도록 記錄해야 바람직한 文章記述法이 될 것이다. 그런데 한글專用論者들은 앞뒤를 조금 읽어보면 어느 것인지 그 語義가 파악된다고 항변한다.
이 얼마나 궁색한 論理인가. 읽는 즉시 語義가 파악될 수 있게 하는 方法은 한글과 함께 漢字를 混用하는 외에 딴 方法이 없다. 漢字語에서 語義 分化의 要素는 漢字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또 자주 접하는 同音異義語의 例를 몇 개만 더 들어 보자. ‘이통사(二通社, 移通社), 선순환(善循環, 先循環), 실세(實勢,失勢), 난기류(難氣流, 暖氣流), 편재한다(遍在 : 두루 퍼져 있음, 偏在 : 치우쳐 있음) 등등, 그 數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렇게 많은 漢字語彙들을 한글로만 써 놓고 어떻게 그 뜻을 구분하란 말인가.
요즈음 企業들이 共通的으로 新入社員들의 業務能力의 문제점에서 國語能力 不足을 지적하고 있다. 그 程度가 英語 能力不足 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이다. 某 大學에서 敎授가 ‘타자(他者)’를 설명하니 ‘타짜(눈 속임 잘 하는 노름꾼)’가 아니냐고 質問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문외한(門外漢)’을 ‘무뇌한(뇌가 없는 사람)’으로 알고 있더라는 記事도 보았다.
이렇듯 우리 젊은이들이 非文解者로 자라고 있는 것이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우리말을 英語로 解釋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덕적 해이’를 ‘moral hazard’라고 괄호 속에 倂記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지고 있다. ‘道德的 解弛’라고 漢字로 써 봤자 읽지도 못하니 차라리 英語를 倂記하면 英語辭典이라도 찾아서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우리 國字인 漢字를 버리고 英語로 漢字語를 해석하게 한다니 너무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漢字는 바로 우리말이고 뜻이기 때문에 外國語로 해석한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萬一 그렇게 된다면 우리말을 버리고 英語를 國語로 대치하는 結果를 초래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제발 이제 한글專用이냐, 한글․漢字混用이냐의 케케묵은 論爭은 그만 하자. 漢字를 알아야 國語生活은 물론 여러 分野에서 國益에 큰 도움이 된다는 事實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니 말이다. 우리 國語에서 漢字가 밀려나고 英語가 그 자리를 蠶食하고 있는 現實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晩時之歎의 느낌은 있지만 國家가 잘못된 語文政策을 하루 속히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初等學校부터 漢字敎育이 復元되기를 거듭 거듭 促求한다.
끝으로 지난 7月21日부터 7月26日까지 高麗大學校에서 열린 世界 言語學者大會가 採擇한 結論을 소개하며 붓을 놓는다.
“母國語를 使用할 때 가장 創意的인 思考가 可能하다.”
'好學의 漢字文學 > (한자교육)署名運動' 카테고리의 다른 글
‘訓民誤音’이 된 오늘날 ‘한글’ 問題 (0) | 2012.06.20 |
---|---|
한글專用 政策 이대로 둘 것인가 (0) | 2012.06.19 |
漢字의 混用은 科學의 발전에도 절실히 필요하다 (0) | 2012.06.17 |
秩序있는 人間社會에 必要한 生活綱領 (0) | 2012.06.17 |
國語가 病 들고 있다 (0) | 2012.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