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정치·경제·사회·문화)

33. 금융시장의 시대가 열리다

好學 2012. 6. 11. 19:41

33. 금융시장의 시대가 열리다

 

베트남전쟁과 석유파동의 결과 세계는 하나의 금융시장(金融市場)으로 통일되었다. 물건이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며 상품과 돈 모두 어디에서나 자유(自由)롭게 거래(去來)된다.
 

전쟁이 끝난 후,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진영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뉘어져 냉전체제를 이루었다. 러시아, 동유럽, 중국 등 공산국가는 서유럽, 미국과의 관계를 끊었다. 이것을 두고 당시 사람들은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에 ‘철의 장막’이 내려져 있다고 표현했다. 폴란드, 체코, 동독 사람들이 서유럽으로 넘어올 수 있는 길은 거의 없었다. 국경은 철조망으로 막혔고 곳곳에 지뢰가 설치되었다.
 
한편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에스파냐,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남아 있었다. 식민지 국가들은 독립투쟁을 하면서 식민 지배국가의 적대국인 러시아와 손을 잡았다. 베트남도 그런 나라 중 하나였다.
 
베트남은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이 대부분 그 존재조차 모르는 작은 나라였다. 하지만 베트남이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전세계의 주목을 끌었고 경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인도차이나반도에 위치한 베트남은 19세기 말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의 연합국이었던 일본에 점령당하기도 했지만 독립운동 과정에서 몰아냈다. 전쟁이 끝나자 베트남 국민들은 호치민을 주석으로 하는 새로운 독립국가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아 인도차이나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1954년 프랑스 군대가 기엔비엔푸에서 무릎을 꿇으면서 끝났지만 베트남은 남북으로 나뉘어 북쪽에는 사회주의 정권이, 남쪽에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부패정권이 들어섰다. 베트남 공산주의자인 베트콩들은 베트남의 통일을 위해 남쪽의 부패정원을 상대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계속했다.
 
1962년 2월 9일,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베트남전쟁을 끝내기 위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전투부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미국은 계속해서 더 많은 군대를 베트남에 보냈다. 1968년, 베트남에 주둔한 민군은 50만 명이 남았다. 미국 공군은 엄청난 수의 폭탄을 투하해 전쟁을 끝내려고 했다. 미국 전투기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폭탄보다 세 배나 많은 양의 폭탄을 베트남에 떨어뜨렸다. 그러나 미극의 작점은 모두 실패했고, 1975년 4월 30일, 북쪽의 베트콩들이 사이공에 진입하면서 남과 북으로 갈려있던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베트남전쟁은 전세계에 엄청난 사회적·경제적 변화를 불러왔다.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미국의 베트남전쟁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히피’라고 불린 이 젊은이들은 전쟁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미국의 문화를 거부하고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들은 카를 마르크스의 책을 찾아 읽고 “전쟁을 할 바에는 차라리 사랑을 하자!”라고 표어를 외치며 전쟁을 일으킨 부모 세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미국정부는 베트남전쟁의 비용을 충당할 방법을 찾아 골머리를 앓았다. 군인들을 파견하고 전투기와 폭탄을 사용한 데 들어간 비용을 대기 위해서는 세금을 열려야 했다. 그러나 케네디를 비롯해 다음 대통령인 존슨과 닉슨도 세금을 올리지 못했다. 결국 미국정부는 세금을 올리는 대신 국채를 발행해 베트남전쟁 비용을 지불하기로 했다. 정부가 가지고 있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쓰는 바람에 미국에서는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미국연방은행은 이자율을 높여 돈의 가치를 지켰어야 했지만 경제성장에 해가 될까 봐 이자율을 올리지 않았다.
 
당시에는 세계적으로 달러에 대한 환율이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경제위기는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미국은 더 이상 고정환율제(固定換率制)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71년 8월 15일, 고정환율제를 취소했다. 이후 1973년부터는 변동환율제(變動換率制)가 적용되어 화폐도 다른 상품들처럼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치가 정해졌다. 전에는 사업가나 여행자만 외국화폐를 사고팔았지만 이제는 환율변동에 따른 이익을 노리고 많은 사람들이 외화를 사고팔고 있다.
 
미국 시카고대학의 경제학 교수인 밀턴 프리드먼(1912~ )은 오래전부터 고정환율제에 반대해 왔다. 자유방임주의와 시장을 통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주장한 프리드먼은 화폐은행이 경제성장에 맞춰 돈의 양이 늘어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통화주의(通貨主義)를 주장했다. 두 차례의 석유파동으로 금융시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프리드먼의 통화주의는 힘을 입었다.
 
1973년에 일어난 석유파동은 전세계적으로 석유 값 폭등을 불러와 경제에 심각한 혼란을 초래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산유국 사이에 카르텔을 형성하여 석유 값을 원유 1배럴당 3달러 2센트에서 3달러 65센트로 올렸다. 또 이스라엘이 아랍지역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매월 석유생산량을 줄여 나가겠다고 발표했다. 석유부족으로 제품생산이 줄어들자 제품가격이 상승해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이 왔다. 이 사건은 유럽과 북미지역의 불경기와 맞물려 세계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각국 정부는 경기가 급속도로 나빠지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한편 산유국으로 들어간 수십억 달러의 돈은 은행을 통해 금융시장으로 흘러들어갔다. 산유국에 지불한 원유가격의 60퍼센트 이상이 달러였기 때문에 석유파동으로 엄청난 양의 달러를 보유하게 되었고, 이 돈은 세계 금융시장의 규모를 키웠다.
 
전세계적으로 150억 달러가 넘는 돈이 날마다 거래되었다. 금융인들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 정치적인 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1992년 영국정부가 마르크에 대한 파운드의 환율을 일정수준으로 유지하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다. 영국정부가 수백만 파운드를 투입할 계획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금융인들은 그 정책을 지지하지 않았다. 미국의 금융인 조지 소로스는 영국정부의 정책에 반대해 엄청난 양의 파운드를 외환시장에 팔았고, 파운드의 가치는 시간이 다르게 떨어졌다. 결국 영국정부는 환율을 시장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 세계는 하나의 금융시장으로 통일되었다. 독일이나 영국, 프랑스 회사의 주식이 미국 뉴욕증시에서 거래되고, 각국의 주식회사 가운데 상당수는 외구기업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금융거래에 있어서만 국경의 의미가 약해진 것은 아니다. 물품거래시장에서도 물건이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운송비용이 싸지면서 겨울에도 남아프리카나 칠레에서 생산된 포도나 버찌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유럽과 미국의 회사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셔츠를 만들어 팔고, 미국과 인도는 함께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개발한다. 국제금융시장 덕분에 돈과 서비스를 세계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