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정치·경제·사회·문화)

25. 대량생산은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好學 2011. 4. 10. 23:09

25. 대량생산은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으로 소비자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위를 누렸다. 보통 사람들도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고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사치(奢侈)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자동차 왕으로 불리는 헨리 포드는 1863년 여섯 남매 중 장남으로 미국 미시간 중에서 태어났다. 포드는 어릴 때부터 기계에 관심이 많아 집에 있는 작업실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벌이곤 했다. 포드는 열다섯 살 때 처음으로 모터를 만들었고, 열여섯 살이 되자 집을 떠나 디트로이트로 가서 기계공이 되었다.
 
부유한 집안의 여자와 결혼한 포드는 ‘디트로이트 자동차’라는 자동차 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에서 포드는 성능 좋은 경주용 자동차를 만들었지만 경영을 잘못하는 바람에 곧 회사 문을 닫아야만 했다. 다행히 좋은 투자자를 만난 포드는 1903년에 두 번째 자동차회사인 ‘포드 자동차회사’를 세웠다. 포드는 경주용 자동차 생산을 중단하고 1908년부터 값이 저렴하고 작동이 편리한 ‘T형 포드’를 시장에 내놓았다.
 
1913년 포드는 T형 포드 생산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때까지 자동차는 모두 수공업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노동자들은 한곳에 모여 작은 부분을 조금씩 조립하는 방법으로 자동차를 만들었다. 그런데 포드는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하고 부품을 표준화(標準化)해 자동차를 대량생산(大量生産)했다.
 
포드는 공장 내부를 천천히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T형 포드의 차체를 올려놓고 노동자들이 자기가 맡은 부분의 일만 계속하도록 했다. 공장의 작업환경은 아주 단순해졌다. 운전대를 차체에 올려놓는 사람, 차축에 나사를 돌리는 사람 등으로 일이 나누어지자 노동자 한 명 당 자동차 한 대를 조립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840분에서 93분으로 줄었다.
 
그러나 작업대 앞에 앉아 단순작업을 반복하는 노동자들은 노동의 즐거움이나 창조성을 잃어버렸다. 포드 공장을 방문한 한 신문기자는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자동차 기계에 손발이 묶여 있는 것 같다고 보도했다. 철리 채플린도 <모던 타임>이라는 영화를 통해 공장에서 단순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인 작업환경을 비판했다.
 
그러나 포드는 대량생산을 통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두 배로 올리고 하루 근무시간을 8시간으로 줄였다. T형 포드의 엄청난 성공으로 포드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주고도 자동차 가격은 낮추었다. 1908년 T형 포드 한 대의 값은 980달러였지만 1927년에는 270달러밖에 되지 않았다. T형 포드는 미국인들 사이에 ‘틴 리지(Tin Lizzie 싸구려 차)’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1,500만 대나 팔려 나갔다. gps리 포드는 자동차를 대중적인 상품으로 만들었다.     
 
T형 포드는 대량생산이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지는 공산품은 소비자에게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지위를 부여했다. 산업화(産業化)가 되기 전까지는 돈 많은 부자들만 집 안을 멋진 가구와 카펫으로 꾸미고 벽에 액자를 걸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들조차 살 엄두를 내지 못했다.
 
19세기 초만 해도 농부가 평생 살 수 있는 구두는 몇 켤레 되지 않았다. 그 당시 사람들은 구두를 직접 만들어 신거나 구두 수선공에게 산 구두를 여러 차례 고쳐 신고 다녔다. 가구는 같은 동네에 사는 목수에게 부탁해 구하거나 직접 만들어 썼다. 도시의 공장노동자들은 농촌에 사는 농부들보다 더 형편이 어려웠다. 그러나 19세기 말 시장에 공산품(工産品)이 쏟아져 나오면서 보통 사람들도 옷, 구두, 재봉틀, 그릇, 자전거, 자동차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공산품이 나오면서 소비자에게 제품이 전달되는 방법에도 변화가 생겼다. 1852년에는 프랑스에 세계 최초의 백화점(百貨店)이 들어섰다. 백화점은 그전 가게들과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백화점의 물건들은 모두 공개되어 있어 사람들이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고를 수 있었다.
 
백화점에서는 물건을 제 값을 받고 파는 것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에 물건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가격을 흥정할 필요가 있었다. 대신 물건을 파는 사람들끼리 치열한 가격 경쟁을 벌여야 했다. 손님들은 구입한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환할 수도 있었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변화였다. 작은 가게를 운영하던 상인들이 백화점의 등장에 위험을 느껴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다. 실제로 20세기 초 프러시아에서는 백화점 상품에 대해 ‘특별소비세(特別消費稅)’를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특별소비세와 같은 소상인 보호정책에도 불구하고 값싼 공산품이 불러온 사회 변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기성복을 입었고, 기성복은 대중 유행을 이끌었다. 어떤 학자는 이런 현상을 ‘사치의 민주화’라고 표현했다.
 
이런 변화는 미국을 중심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전세계적으로 경제사정이 나아지면서 사람들은 강렬한 소지욕구를 보였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미국과 유럽에서는 집집마다 라디오, 세탁기, 텔레비전, 자동차가 자리를 잡았다.
 
대량 소비문화는 제품의 고유한 상표를 타고 더 넓고 빠르게 퍼져 나갔다. 공장에서 나온 제품들은 수공업자등아 만든 물건과 달리 일정한 품질을 보장했다. 그래서 소비자들은 상표만 보고도 그 제품의 질을 가늠할 수 있었다. 오늘날 ‘코카콜라’, ‘맥도날드’, ‘아디다스’, ‘리바이스’ 같은 상표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통한다.
 
공산품은 대량생산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팔아야 이윤을 남길 수 있다. 그래서 공산품을 만들어내는 생산자들은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광고(廣告)를 제작했다. 사람들에게 제품을 효과적으로 소개하고 제품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다.
 
공고는 경제활동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광고의 목적은 단순히 소비자에게 재품의 특성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았다. 광고 제작자들은 소비자들이 광고지나 텔레비전에서 보는 내용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들은 소비자의 욕구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분석해 소비자가 무의식적으로 광고에서 본 제품을 사게 만들었다.
 
그래서 광고에는 멋진 운동화뿐만 아니라 멋진 운동화를 신은 예쁜 사람들이 등장했다. 제품을 광고하는 직접적인 글이 없더라도 사람들이 ‘나도 저 운동화를 사 신으면 광고에 나온 사람처럼 멋지게 보일 거야’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대량생산 방식으로 자동차의 대중화를 이끈 헨리 포드는 정작 소비자의 욕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특히 포드는 자동차의 색깔을 소비자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데 아주 인색했다. 끝까지 검은색 차만 만들겠다는 포드의 고집 때문에 유행에 뒤떨어진 T형 포드는 결국 20년 만에 사라지고 말았다.
 
헨리 포드가 오랫동안 검은색 T형 포드만 고집하는 사이 다른 자동차회사에서는 더 편리하고 멋진 자동차를 시장에 내놓았고 포드자동차 회사는 심각한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