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청소년교육]

믿음은 무조건 일을 한다/여호수아 2장 8절부터 24절

好學 2012. 4. 22. 21:31

믿음은 무조건 일을 한다/여호수아 2장 8절부터 24절

 

 

  이제 한 주간을 마치고…… 또 다음 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격려함을 통해서 새 힘을 가지고 다음 주에는 더 열심히 주님 앞에 기도하는 자리에 서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특별새벽기도회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믿음은 무조건 일을 한다」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라합이라는 여자의 믿음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것은 소문으로 들은 하나님의 승리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 자체는 대단한 믿음이 아니라 극히 미약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미약한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일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일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가 주변의 많은 사람을 볼 때 누가 일할 수 있습니까?
  은사를 많이 받고 재능을 많이 갖고 탁월한 물질이 있는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이 일을 합니다. 믿음만이 일을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3절을 보면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이런 말이 쭉 나옵니다. 믿음라고 할 때 꼭 나오는 낱말인 역사는 history가 아닙니다. working입니다.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역사! 믿음은 일을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6절을 보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역사하는 믿음, 일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가장 귀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귀중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일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어떻게 심겨지는지 심겨지는 과정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 믿음이 심겨지는 과정 --- ① 믿음은 들음에서!

  첫 번째로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로마서 10장17절은 믿음의 내용에 있어서 전가의 보도와 같은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이 생기려면 말씀을 들어야 합 니다.
  성도의 승부는 무엇을 듣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마귀의 소리를 계속 들으면 믿음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살아납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불신의 사람이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불신이 생길 만한 얘기만 듣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떤 얘기를 들면 하나님이 안 믿어지고 어떤 얘기를 들면 분노심이 생기고 어떤 얘기를 들면 미움이 생기고 질투가 생기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것을 찾아다니면서 듣는 사람이 있지요. 그러면 믿음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믿음의 사람이 되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확신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약속의 말씀을 들을 줄을 알아야 합니다.
  라합이 들었던 것은 확실한 것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소문의 형태로 하나님이 승리를 주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10절11절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에 관한 소식을 듣고 그것 때문에 연약하나마 믿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우리에게 주는 귀중한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일이 있지 아니하면 절대로 믿음이 생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소문의 형태로라도 자꾸만 하나님이 일하는 모습들을 전하고 전하고 또 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벌어지는 것은 많이 배웠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제대로 듣기 위해서 교회가 해야 될 일은 십자가의 복음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말씀을 들어야 사람이 변화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워낙 그런 식으로 나이롱 신자 생활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허구헌날 들어도 변화가 안 되니까 남들도 그런 줄 압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말씀 한번 들으면 다 뒤집힐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상의 예수님 우편 강도를 보십시오. 몇 마디 들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하는 툭툭 던지는 몇 마디를 듣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나를 구원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몇 마디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23장39절-43절)
  여리고의 소경 바디메오도 들려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시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더라! 그 얘기를 듣고 소리를 지릅니다. 눈뜬 사람도 아닌 눈 감은 사람이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이 말림에도 불구하고 소리질러대면서 결국은 눈도 뜨게 되었고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46절)
  흐릿한 복음이라도 들으면 변화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들려주어야 합니다. 심방을 가보거나 개인적인 상담할 때에 느끼는 것인데 악한 마귀의 궤계는 복음을 못 듣게 만듭니다. 중요한 얘기 하려고 하면 전화가 오고 다른 일이 생기게 만들고…… 이상합니다. 보통 때는 침착하던 사람이 음식 준비하기에 바쁘고 분주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안 들으려고 합니다. 
  들어야 삽니다. 말씀을 들으면 생명이 우리 속에 심겨지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4장4절을 보니까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악한 마귀가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을 혼미케 만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은 특별새벽기도회 다섯 번째 날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이 자리에 나왔지만 이 자리에 나오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험과 환난이 있었는지 여러분 스스로는 알 것입니다.
  이상하게 방해가 있습니다. 이상하게 장애가 있습니다. 그렇게 착하고 순한 어머니가 갑자기 마귀와 비슷한 모습으로 변화되어서 아침잠도 많으신 분이 새벽기도 가는 나보다 먼저 일어나셔서 가로막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많이 경험하지 않습니까? 마귀는 그런 식으로 역사합니다. 듣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의 살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씀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믿음이 심겨지는 과정 --- ②복의 근원이 됨

  두 번째 단계는 내 한 사람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변 전체를 다 살리는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선 말씀을 들려주고 둘째, 내가 듣고 믿음을 가지면 나 때문에 주변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붉은 줄의 의미는 유월절 어린양의 의미와 같습니다. 붉은 줄을 매단 집만 살아남았습니다. 라합의 집만 살아남았습니다. 이것을 신약으로 따진다고 하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깨끗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 붙들면 삽니다. 라합이 십자가 붙듦으로 말미암아 온 가족들이 다 살게 되는 은혜의 역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서 6장25을 보니까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가족이 다 살아났던 이유는 오직 십자가 붙드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변이 어둡다고 원망합니다. 직장도 가정도 어렵고 안된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의식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주변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핵심적인 존재입니다. 주변이 어둡기 때문에 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주변이 살아나야 합니다. 나는 주변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 나는 핵심인물입니다. 나 때문에 우리 직장이 살고 나 때문에 우리 가정이 사는 것입니다. 내가 라합이거든요! 내가 십자가 붙듦으로 말미암아 내 주변의 술꾼들, 타락한 자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의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내가 라합이라니까요! 여러분, 직장이나 캠퍼스에서 하나님 앞에서 은혜 가운데 쓰임 받는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합이 붉은 줄을 매달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면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정이 살고 우리 직장이 살고 우리 주변이 다 살아나는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분 한사람 때문에 가정이 살라나고 직장이 살아나는 은혜를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3. 믿음이 심겨지는 과정 --- ③ 믿음의 걸음을 걷는다.

  세 번째 단계로 믿음의 걸음을 걸어야 합니다.
  라합의 믿음은 들어서 믿는 상태에 그치지 아니하고 행동하는 믿음, 희생하는 믿음, 걸음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라합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당시의 환경은 평탄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적대적이고 두려운 환경, 정탐꾼을 숨겨주다가 발각되면 죽음에 처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라합의 행동은 생명을 건 행동이었습니다. 희생을 건 행동이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걸음이 평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평탄하지 않습니다. 위험이 따릅니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장에서는 라합의 믿음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31절)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믿음으로 정탐꾼을 영접했다. “믿음으로〓목숨걸고” 목숨 걸고 희생하는 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희생하는 것입니다.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을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2장11절에서는 어린양을 먹는 자세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허리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급하게 먹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 너희는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이제 너희는 전쟁터의 군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을 먹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난 다음 이 세상에서 나그네 길을 걸어가면서 전쟁터에서 싸우는 인생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과 함께 연합된 자의 모습입니다. 희생하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것!
  라합은 전체 문화 앞에서 고독한 홀로의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사람입니다. 전체가 다 하나님을 적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혼자!!! 여러분도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지요. 아무도 동조하는 사람이 없고 혼자 믿음을 지키는 그 상황! 라합과 똑같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 걸음 걸어야 됩니다. 그러면 승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본문의 말씀을 흐름대로 이해하지 않고 이런 얘기를 합니다. “선의의 거짓말도 되는 것입니까? 있는 데 없다고 한 것은 말씀에 위배되는 것 아닙니까? 라합이 범죄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 어떤 것의 가치라는 것은 hierarchy라는 것이 있습니다. 위계질서, 피라미드 구조로 되어 있는데 어떤 일이 거짓말이냐 아니냐의 차원보다는 사람을 살리느냐 죽이느냐 하는 희생과 믿음의 차원이 더 높은 차원입니다.
  일전에도 한 번 제가 말씀드렸지요. 하얀 거짓말이라는 것,선의의 거짓말이 가능한 것인가! 옛날에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할 때 어떤 사람이 유태인을 숨겨주고 있다고 합니다. 독일군이 와서 여기 유태인이 있냐고 하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합니다. 없다고 하자니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있다고 하자니 죽을 것 같고 …… 그래서 잔꾀를 부렸다고 합니다. 탁자를 딱 치면서 “여기는 없어요.” 그랬더니 독일군도 가고 자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탁자 위에 없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해 가지고 다 넘겨야 거짓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탁자 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없다고 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것은 거짓말의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리를 따져야 하는데 이 사람이 유태인을 숨겨주고 난 다음에 유태인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은 두 가지 원리에서 합당한 것입니다. 첫째, 생명의 원리입니다. 있다고 얘기하면 죽이는 것입니다. 생명의 원리가 우위에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익의 원리입니다. 나의 유익이 있느냐 나의 희생이 있느냐 있다고 하면 있다고 하면 오히려 이익이 있는 것 아닙니까? 내가 안전해 지는 것…… 없다고 하는 사실 자체는 자기의 이익을 희생하면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원리 아닙니까? 더 중요한 원리를 우리가 붙들고 나아가면 이런 것은 질문의 내용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거짓말의 문제가 아닙니다. 희생의 문제입니다. 믿음의 걸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31절에는 라합의 이 행동을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런 싸움을 벌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살리는 일을 하십시오! 살리는 일에는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이익을 포기하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라합과 같이 이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은혜의 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한 번 희생하고 한번 믿음의 길을 걸으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합니다. 쑥쑥 성장합니다. 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오래함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성장이 없는지 아십니까? 믿음의 걸음, 믿음의 희생, 믿음의 결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 가운데 한 번 이런 믿음의 결단을 하게 되면 믿음이 막 자라납니다. 
요즘에 참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금주에 술자리에서 싸우라고 했더니 진짜 싸우는 형제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술자리에서 한 번 호탕하게 “나 술 안 마셔! 난 그리스도인이야!” 한번 소리 지르고 나서 혼자 눈물짓고 감격해 가지고 감사헌금하고 이래요. (성도들 웃음) 그때 제가 느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 이거구나! 청년들에게 있어서 한번 믿음의 결단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싸움을 벌이고 나니까 엉터리로 10년 믿은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믿음의 성장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삶 전체에 파급효과가 있습니다.

  믿음은 걸음입니다. 희생입니다. 결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런 걸음을 통해서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하나님의 귀중한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말씀 많이 들어서 믿음 생기게 해 주시고
  말씀 많이 증거해서 주변을 살리는 종이 되게 해 주시고
  믿음의 걸음을 걷는 순종하는 종이 되게 해 달라고
  이 시간에 다같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계속 기도하다가 돌아가시는데 오늘은 불신자로 둘러싸여 있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나 때문에 주변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복의 근원이 되겠다는 하는 분들 나오시면 같이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