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학의 교육 2/[인터넷성경교육]

제59과 사무엘상(3): 사울과 다윗 (16-31장) 13

好學 2012. 4. 21. 06:56

제59과 사무엘상(3): 사울과 다윗 (16-31장) 13

  

 

 3-13. 가드로 간 다윗(27장)


  그 후에 다윗은 자신이 이스라엘에 있다가는 언젠가 사울의 손에 죽게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윗은 사울이 언제든지 약속을 어기고 또 다시 자기를 추격할 수 있으며, 또한 사울의 주변에는 자기를 모함하는 수많은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결국 이스라엘 영토를 벗어나서 블레셋 사람의 영토로 피난하기로 결심했다(1).

그는 자기와 함께 한 600명을 데리고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갔다(2).

블레셋은 사울의 강력한 경쟁자인 다윗과 손을 잡음으로 이스라엘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드'는 블레셋의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로, 다윗과 그 일행이 피신하고 있던 `십 황무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37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여기에 언급된 `가드 왕'은 블레셋의 5대 방백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다윗은 전에 `아기스'에게 갔다가 위기를 맞고 미친 척 하여 겨우 살아나온 적이 있었다(21:10-22:1).

 

다윗이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그에게 도피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1) 다윗이 아기스의 대적인 사울로부터 계속해서 핍박을 받고 있음이 분명하게 알려졌으며, 2) 아기스는 다윗의 군사력을 이용해서 사울을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옥'은 (왕상 2:39)에 나타나는 `마아가'와 동일한 인물으로 보인다(Keil, Smith, Fay). 이로 인해 다윗은 그의 가족과 두 아내, 즉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과 함께 가드에서 아기스와 함께 거하게 되었다(3). 다윗이 이스라엘을 떠나 가드로 망명한 사람은 곧 사울에게도 보고되었다. 사울은 이 소식을 듣고 더 이상 다윗을 추격하는 일을 포기하였다(4).

 

  다윗은 가드 왕에게 가서 왕도에 거하지 않고 지방 성읍을 주어 그 곳에 거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아기스는 이 청을 받아들여 다윗에게 시글락을 주어 그 곳에 거하도록 허락하였다(5-6). `시글락'은 가나안 정복 후에 유다 지파에게 분배된 곳이었으나(수 15:31), 그 후에 이 성은 시므온 지파에게로 넘어갔다(수 19:5, 대상 4:30). 그러나 시므온 지파는 사사시대에 그 땅을 블레셋에게 빼앗겼으며, 그 후에는 이 성읍에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Keil, Fay).

 

이 곳은 가사에서 동남쪽으로 약 24k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이 곳은 당시에 다윗이 머물고 있었던 가드에서 남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다윗은 시글락에서 약 1년 4개월 동안 머머물러 있었다(5-7). 그 후에 다윗은 그의 군사들을 데리고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거민과, 아말렉을 공격하였다. 사무엘서 기자는 이들이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거민이었다고 밝히고 있다(8).

 

`그술 사람'은 유랑 생황을 하던 족속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요단 동쪽 지방에(신 3:14, 수 12;5, 13:11,13, 삼하 13:37) 살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가사'와 인접한 곳에서 거주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신 2:23). `기르스 사람'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제시되었는데, 1) 첫째 해석은 그들이 팔레스타인 중앙의 그리심 산 근처에 살던 한 종족으로 보는 견해(Smith)이며, 2) 둘째 견해는 그들을 블레셋 땅과 이스라엘 땅의 남부에 살던 민족으로 보는 견해(I.D.B.)이다. 다윗이 공격한 민족들이 팔레스타인의 남부였던 점을 생각하면 두 번째 견해가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아말렉 족속"은 사울의 군대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15:7,8). 그러나 세월의 지난 후에 그들은 다시 자신들의 세력을 규합했으며 또 다시 이스라엘과 블레셋에게 위협을 주는 존재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다윗이 친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괴롭혀 온 민족들을 공격했던 것이다(Keil). 이것은 다윗의 침공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다윗이 이들을 치고 노략물을 가지고 돌아오게 되자, 아기스는 다윗에게 그가 공격한 곳이 어디였는지 물었다. 그러자 다윗은 아기스에게 자신이 공격한 지역이 유다 남방과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과 겐 사람의 남방이었다고 대답했다(9-10). 다윗은 자신이 친 지역에 대해 애매하게 대답함으로써 자신이 아말렉을 약탈한 사실을 감추려고 했다.

`유다 남방'은 브엘세바의 인근지역을 가리키며(8:2; 삼하 24:7),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은 유다의 남쪽 변방 지역을 가리킨다(30:29). 여기에서 `여라므엘'은 `하나님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란 뜻으로, 유다의 손자이자 베레스의 아들인 헤스론의 장자의 이름이기도 했다(대상 2:3, 5, 9). 따라서 `여라므엘 사람'은 이 `여라므엘'의 후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겐 사람의 남방'은 `아말렉 사람'들이 살던 지역과 인접한 곳을 가리킨다. 전에 사울은 아말렉 족속을 칠 때에  겐 사람을 미리 대피시킨 일이 있었다(15:6). 다윗이 자신이 침노한 곳을 이렇게 돌려서 대답한 것은 자신이 유다를 친 것처럼 믿게 하여 그가 자신을 믿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다윗이 유다를 약탈하던 이방 종족을 공격한 것은 옳은 일이라 해도, 그러한 사실을 은폐하고 .거짓말을 한 것은 다윗의 신앙이 연약한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가나안을 떠난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야 했듯이 약속의 땅을 떠난 다윗 역시 여러 가지 거짓말로 자신을 은폐시켜야만 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종족들을 칠 때에 그들을 모두 죽이고 가드로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들 중 일부가 다윗의 일을 고발한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다윗이 친 종족들은 블레셋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런 공격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이 이러한 사람들을 친 것이 아기스에게 고발되면, 다윗은 아기스에게 불신을 받게 되어 위험에 빠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이 자신이 공격한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을 포로로 데리고 오지 않았다. 아기스는 다윗이 유다 남방을 쳤다는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는 다윗이 자신의 동족들을 쳤기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받아, 영원히 자신의 사역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