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인천]역사이야기

인천이야기/ 역사적 지명들

好學 2012. 3. 31. 18:57

인천이야기/ 역사적 지명들

 

 

화평동 굴다리 앞쪽에 인천여고가 있었다. 자유공원 쪽으로 이어진 빨간 벽돌담 너머에 담쟁이 넝쿨이 무성하게 자라던 고풍스런 교사(校舍), 그곳이 인천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여성 교육의 산실이었다.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이 학교 교문을 드나들던 여학생들은 어느덧 인천의 어머니, 할머니가 되었지만, 단정한 교복 차림새와 수녀님들의 '벨'처럼 풀을 먹여 빳빳한 채로 눈이 부셨던 흰 '카라'가 주는 청순한 이미지에 뭇 남학생들은 가슴을 설레기도 했었다.


이곳을 포함한 중구 일대는 십 수년 전만에 해도 인천의 번화가였다. 그러나 시청이 남동구 구월동으로 새 청사를 지어 옮겨간 뒤 중구는 심각한 공동화 현상에 노출됐다. 급기야는 법원, 인천상공회의소 등 각급 기관들이 중구를 떠나고, 학교들마저 이전 붐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인천여고가 떠나간 자리에 '동인천동사무소'가 들어섰다. 그러나 인천의 동쪽이 아닌데도 '동인천'이라고 잘못 붙여진 역명에서 따온 새 동네 이름은 낯설기만 하다.


행정 편의상 전동, 내동, 용동, 경동, 인현동을 합쳐 '동인천동'이라 했다는 게 동 직원의 설명인데, 이는 역사를 모르는 작명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내동은 우리 나라 감리교의 도입지요, 인천감리서가 있던 행정의 본거지였으며, 용동은 인천 최초의 극장인 협률사가 있던 문화의 보금자리였고, 상인천역과 참외전거리를 끼고 있던 인현동은 선대들의 땀내가 물씬 풍겼던 생활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구청은 마치 그 같은 유서 깊은 옛 자취를 지워 나가기에 골몰한 듯 이들을 '동인천동'으로 통합해 버렸던 것이다.


'전동'(錢洞)도 지상에서 사라졌고, 인천여고도 타 지역으로 이전해 갔다. 그러니 이제 그 자리가 우리 나라의 옛 조폐공사였던 '전환국' 터였다는 것을 누가 기억이나 해 낼까 싶은 것이다. 선진국 같으면, 벌써 그 자리에 '전환국 박물관'을 만들어 영욕이 점철된 인천의 개화사와 우리 나라의 화폐사를 되새기고, 그를 관광 자원화 했을 법한데 우리는 문화 천착의 기초적 '키워드'가 되는 동네 이름마저 별생각 없이 깡그리 없애는 판이니 안타깝기만 하다. 먼먼 훗날 후손들이 "21세기초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인천의 동쪽땅이었다."고나 하지 않을까 괜한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