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인천]역사이야기

인천이야기/ 개화의 상징 ‘전등(電燈)'

好學 2012. 3. 19. 20:34

 

인천이야기/ 개화의 상징 ‘전등’

 

 

1886년 12월, 인천항에는 눈이 휘둥그래질 만한 개화 물품이 도착했다.

조선 정부로부터 전등 가설권을 특허 받은 초대 미국 공사 ‘푸트’가 인천의 무역상 ‘타운센트 상회’를 통해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에게 주문했던 전등(電燈) 설비였다.

이 설비는 16촉짜리 전등 7백50개를 켤 수 있는 규모였는데, 1887년 3월 경복궁부터 전등을 달아 나갔다 인천에서의 전등 사업은 1905년 6월 각국 외국인 39명의 출자한 인천전기주식회사로부터 시작된다.

자본금 12만5000원으로 세워진 이 회사는 1906년4월 당국의 특허를 얻고 지금의 중구 송월동 2가 한국전력 인천지점 창고 자리에다 발전소를 차렸다.

100㎾ 규모의 직류 화력 발전기 2대로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개업 한 달만에 1000여개, 2개월 후에는 1800여개의 등이 설치돼 인천의 밤을 환히 밝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쌀 한 되에 18전, 쇠고기 한 근에 40전하던 때에 반야등(半夜燈) 16촉 1등 1개월 사용료가 2원, 종야등(終夜燈) 16촉 1등 1개월 사용료가 3원이나 되어 한국인들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인천전기주식회사는 한동안 그런대로 호황을 누려 1910년 말에는 690가구에 3860 등을 공급했다.

급증하는 수요를 충당할 수 없는 데다가 새 설비를 도입할 능력도 없어 1912년 7월 일한와사(瓦斯=가스)전기주식회사에 22만 5000원에 매각되고 말았다.

그 후 이 회사는 1915년 9월 경성전기주식회사로 변경되었고, 1922년 7월에는 인천의 발전소를 폐지하고 서울 용산에서 전기를 직접 송전하였다.

1933년 인천에서는 1만7000 호가 4만3000여등을 사용했다.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추진중이었던 1967~1971년에 부평내연발전소, 인천화력발전소, 경인에너지 등 3개 화력발전소가 건설됐다.

이어 서인천복합화력발전소 등이 완성되었으나 경인 지역의 전력은 부족한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영흥도 유연탄 발전소 건립안이었는데 아황산가스 등 대기오염의 피해가 극심할 것으로 예상돼 시민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게 시간당 1500㎾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는 한국형 풍력발전기이다.

무공해 풍력 발전 단지를 강화군에 세운다는 설계는 듣기만 하여도 신선하다.

인천광역시가 삶의 질 향상과 시대적 논리에 맞는 발전소 대안을 마련해 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