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인천]역사이야기

인천이야기/ 야당의 도시

好學 2012. 3. 19. 20:40

인천이야기/ 야당의 도시

 

 

 

언제 선거를 치렀는가 싶게 정치는 뒷전이 되 버린 신세이지만, 그래도 이번 선거는 곱씹어 볼만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인천서 근대적인 선거가 처음 시행된 것은 1888년 12월 초였다. 지금의 중구 일대에 조계지를 차지한 열강들이 자신들의 이권 다툼을 조정하기 위해 '인천각국지계의회'를 조직하였고, 그 의원들을 선출했던 것이다.

이것은 일제가 1931년 5월부터 4년마다 실시했던 인천부회의원 선거와 다름없는 ‘남의 집 잔치’에 불과했다.

우리의 대표를 뽑은 것은 광복 후였다. 1945년 당시 인천 군정관 스틸 맨(Stillman) 소령의 지휘하에 정(町)회장연합회가 임홍재 씨를 초대 부윤(府尹=시장)으로 선출해 그해 9월에 취임식을 가졌다.

제2대 부윤은 1947년 2월에 소집된 인천시고문회에서 뽑힌 표양문 씨였는데 역시 간접 선거였다.

주민들이 제 손으로 대표를 선출한 것은 1952년 4월에 실시한 제1대 인천시의회 의원 선거에서였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인천의 선거는 매우 독특한 양상을 띠었다.

유권자들은 줄곧 집권당에 각성을 촉구하며 야당을 선호하거나 혹은 여야를 함께 뽑아 팽팽한 균형을 유지시켜 왔던 것이다.

무소속의 조봉암, 곽상훈, 민주당의 김재곤, 김은하, 공화당의 유승원, 김숙현, 신민당의 김정렬 같은 분들은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던 정치인들이었으며, 인천은 어느새 집권층이 호락호락 넘보지 못할 '야당의 도시' 즉 야도(野都)로 불리고 있었다.

그런 건강한 풍토 속에서 인천의 정치문화는 자랐다.

다만 최근 십 수년간 소용돌이쳤던 정치판으로 인해 인천 특유의 정치 문화가 표류했던 감이 없지 않았으나 이번은 사정이 달랐다.

혹자는 투표율이 전국에서 가장 낮았다며 인천의 유권자들을 폄하하고 있지만, 투표의 포기도 극단적이기는 하나 정치권에 대한 의사 표시의 하나이며, 타 시도와는 달리 망국적 지방색을 뛰어넘은 절묘한 선택을 보인 인천인이야말로 오히려 정치의 모범생이 아닐까 싶다.

바야흐로 인천이 본래의 야성(野性)을 되찾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