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인천]역사이야기

인천이야기/ 야구의 도시

好學 2012. 2. 11. 18:41

인천이야기/ 야구의 도시

 

 

 

인천은 ‘야도’였다. 전통적으로 여당이 기를 못 폈던 ‘야당의 도시이기도 했지만, 우리 나라 야구의 도입지요, 전국을 제패했던 명실상부한 ‘야구의 도시’였다.


흔히들 1901년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를 이끌었던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Phillip L. Gillett)가 이 땅에 야구를 전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1882년 영국 군함 ‘플라잉 피쉬’ 호 수병들에 의해 개항장 인천에 축구가 알려졌듯이, 1899년 ‘인천영어야학회’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야구 경기가 일반화되어 있었다. 당시 이 학교 학생이 남긴 일기 속에 “베이스 볼이라는 서양 공치기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음은 한국야구협회가 발행한 ‘한국야구사’도 밝히고 있는 사실이다.


이같은 여건과 풍토가 기반이 되어 1920년대에 한용단·기봉 ·상우회 등 한국인 팀과 미나도(항)·인천 세관·미신·실업단·은행단 등 일본인 팀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웃터골 공설 운동장’(지금의 제물포고 교정)에서 자주 대결을 벌였는데, 특히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회원들이 주축이 된 한용단이 펼치는 경기는 큰 인기가 있어 당일 ‘웃터골’에는 남녀노소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나라 잃은 설움을 스포츠로 달랬던 것이니, 야구에 대한 열기는 뜨거웠다. ‘인천 야구’는 그런 항일의 분위기 속에 성장해 36, 39년에는 인천상업학교(지금의 인천고) 야구부가 전조선야구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기염을 토했다. 50년대에 마침내 ‘인천 야구의 전성 시대’가 화려하게 열렸다. 인천고와 동산고가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등 전국 고교야구 대회를 번갈아 가며 휩쓸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46년부터 시작된 4도시 대항 야구 대회를 비롯한 각종 사회인 야구 대회도 도원동 ‘그라운동장’(공설운동장)에서 벌어졌다. 그 시절, ‘운동장 최씨’가 야구장 라인을 긋던 모습과 인고, 동산 선수들이 전국 제패 후 우승기를 앞세우고 우렁찬 밴드 연주와 환호 속에 시가 행진을 했던 자랑스러운 광경들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런데 오늘에는 그 옛날의 열기가 많이 가셔진 듯하다. 프로 야구가 출범했지만 지금까지 인천에 뿌리를 내린 변변한 프로 팀 하나가 없는 실정이다. 항일 스포츠로 키워진 인천의 야구가 어느 새 상업주의 야구에 홀려 순수한 아마추어리즘을 잃어버린 꼴이다. 다행인 것은 최근 높아지고 있는 고교 야구에 대한 관심과 ‘평화야구단’을 비롯한 각계 각층의 동호인 팀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웃터골 야구’의 전통을 이어받아 전 시민의 관심과 축복을 받는 ‘인천야구’로 부활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