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인천]역사이야기

인천이야기/ 김기범 목사

好學 2012. 3. 19. 20:37

인천이야기/ 김기범 목사

 

 

인천 개항은 우리 현대사에 빛과 어둠을 함께 가져왔다.

개항으로 인해 이 땅에 외세가 부식할 수 있었던 것을 어둠이라 하다면, 인천을 우리 나라 개신교의 선구지요, 모태가 되게 한 것은 축복의 빛이라 하겠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미국 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 부부는 인천 제물포에 상륙해 우리 나라 개신교 사상 최초의 기도를 올렸다.

이는 우리 나라 개신교의 장을 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정국 불안을 이유로 아펜젤러 부부의 입경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정이 여의치 않자 그들은 약 1주일간 인천 대불호텔에 머물다가 4월 13일 일본으로 돌아갔고, 6월 20일 다시 돌아와 7월29일까지 인천에 머물렀는데 이 때의 종교적 활동은 내리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1889년 서울에서 활동 중이던 아펜젤러는 지금의 중구 용동에 집 두 채를 얻었다.

그 까닭은 권서인(기독교 서적을 팔며 전도를 하는 사람) 노병일을 파송하여 인천에서 본격적인 교회 개척 사업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 때 학습인(전도인 양성 과정에 있는 사람) 김기범은 노병일을 도와 교회 개척 사업에 적극 동참하였다.

아펜젤러의 노고와 이들의 헌신은 1891년 결실을 맺어 ‘제물포웨슬리교회’, 곧 오늘의 내리교회가 탄생하게 하였다.

그러나 노병일은 당시 감리인천통상사무(지금의 인천시장) 성기운의 전도 금지 명령을 위반했다 하여 뱀내 장터(지금의 신천리)에서 병졸들에게 구타당하곤 결국 사망하였다.

노병일 사후, 존스 선교사가 1896년 5월 인천에 상주하기 전까지 내리교회를 지킨 이는 김기범을 비롯한 평신도들이었다.

특히 김기범은 이 기간 중 제물포를 중심으로 담방리, 영종도, 부평, 김포, 강화 등을 밤낮으로 다니며 열정적인 선교 활동을 전개했다.

이처럼 선교사와 전도인들의 노력으로 교회는 날로 번성해 갔고, 이에 따라 100년 전인 1901년 5월 14일 마침내 김기범은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김창식과 함께 받은 이 집사 목사 안수는 세례, 혼례, 예배, 전도의 거행권이 부여된 것으로 종래의 선교사의 보조적 위치에서 탈피한 것이었다. 김기범 목사는 1903년 4월 이후 당당히 내리교회 최초의 한국인 담임자가 되었다.

이는 존스 목사의 이임에 따른 조치이기는 했지만, 1902년 ‘자립 교회’를 꿈꾸어 왔던 내리교회 교인들이 뜻을 세워 미화 3백 달러에 달하는 기금을 마련한 다음 설교자를 한국인 목사로 보내 줄 것을 감독에게 줄기차게 요구한 결과이기도 했다.

김기범 목사는 내리교회 부임 즉시 영화학당을 사립 영화남녀학교로 개편하는 등 죽기 전까지 육영사업에 혼신의 열정을 바쳤는가 하면, 1902년과 1905년에 병이 깊어지자 서양 선교사들이 누리는 것과 똑같은 안식년을 ‘목사’로서 정당하게 요구했으나 허락되지 않자 과감히 휴직원을 내고 목회 업무에서 손을 뗐다.

그 후 김 목사는 평남 진남포 교회에 파송되었으나 병이 도져 다시 휴직하고 인천으로 돌아와 영화남녀학교 등 육영사업에 진력하다가 1920년 3월 27일 52세의 아까운 나이로 타계했다.

그러나 이 같은 큰 발자취를 남긴 김기범 목사는 1903년 내리교회 담임 이후 역사 속에 묻혀 버렸다.

이에 대해 교회사 연구가 박철호씨는 『개신교전래 50주년, 그의 사후 13년 뒤인 1934년에야 비로소 「감리회보」에 약력이 소개됐는데 그것이 그에 대한 유일한 공식적 언급』이라고 전하고 『우리 교계는 김기범 목사 안수 1백주년을 맞는 오늘에도 그가 1869년 8월 13일 황해도 연안군 해룡면 금천리에서 출생하여 1889년 경성(서울)에서 입교했다는 사실 이외에 별로 아는 것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한국인 최초의 목사 김기범. 한국인이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토대를 만들었고, 영화학당를 공교육 기관으로 일으켜 세웠으며, 내리교회를 ‘완전한 자립교회’로 이끌어 갔던 그의 발자취는 목사 안수 1백주년을 맞아 우리가 다시 밝혀 기려야 할 대목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