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韓國文學感想]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15.

好學 2012. 3. 23.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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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15.

 

    지은이:이주향
    출판사:명진출판

 

  제1부    길들지 않은 사랑은 힘이 세다

 

13    사랑이 집착인 이유 2.
 

<일반독서가>에서
<폭풍의 언덕>을 읽을 때 다가서게 되는 상상의 공간에서 나는

히드클리프가 되고 캐더린이 되면서 폭풍의 사랑을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낀 적이 있다.
그럴 때면 일상의 공간은 텔레비전 화면처럼 현실감이 없고 

소설이 마련해 준 공간이 나를 온통 지배한다.

그 공간이란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삶을 지탱하기 위해 내 속에 가둬 두었던 시간이다.

폭풍의 언덕에서 나는 내가 감춰두었지만 결코 지우지 않았던 그 시간,

편집증적 진실이 숨쉬는 시간으로 마음껏 빠져 들어간다.

 

 있을 수 없는, 그러나 선명한 사랑
 폭풍의 언덕에는 누가 살고 있나?

폭풍처럼 어둡고 열정적인 그 남자 히드클리프와

그 어두운 열정을 끌어안을 수 있는 그 여자 캐더린이 살고 있다.
짙은 눈썹.까만 피부. 무표정한 얼굴.

그 얼굴에 맞게 살려는 듯 그 누구에게도 친절을 베풀 줄 모르는 거친 남자,

그가 바로 히드클리프다.
히드클리프는 폭풍처럼 늘 그 주변을 공포로 몰고간다.

그러나 그는 증오스럽지 않다.

히드클리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처럼 주변을 늘 불안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믿을 만할 뿐더러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왜 그럴까?

그가 몰고오는 공포에는 절망의 심연이 드러나고 그에게서 풍겨나는 불안에는

그 심연에서 솟아나는 뜨거운 인간의 절규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내 궁정을 무너뜨리고 대신 오두막집을 지어 주고는

착한 일 했다고 만족하지 말란 말이오.

당신이 정말로 이자벨라와 내가 결혼하기를 바란다면 난 차라리 내 목을 베겠소.”
 

사랑하는 여자 캐더린이 이자벨라와 결혼하라고 권했을 때

참을 수 없었던 히드클리프가 캐더린에게 던진 유명한 말이다.

확실히 편집증적이다. 그러나 편집증인가?
캐더린은 사라진 히드클리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친절하고 부유한 에드거와 결혼한다.

그녀는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천국에 버금가는 생활을 누린다.

우아하고 세련된 사람들, 풍요한 삶.

린튼 가의 여주인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천국 같은 린튼 가의 모든 것이 캐더린에게는 낯설었다.

'내 전부라고 할 수 있는 히드클리프'와의 추억을 떠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낯설었고

히드클리프가 아닌 에드거가 남편이라고 친근하게 구는 것도 낯설었다.
캐더린은 린튼 가라는 천국의 이방인이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쾌활하면서도 사려깊은 성격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가 동의하는 것도 편집증적 진실 때문이 아닐까?

 

차라리 유령이 되어 내 곁에 있어 주오
가끔은 약한 육체가 강한 진실의 원인이다.

육체의 병은 현실 파수꾼인 의식을 약화시킴으로써 무의식을 솔직하게 표현하게 한다.
캐더린은 '악성 뇌척수막염'을 앓았다.

그녀가 죽어가는 것을 안 히드클리프는 에드거가 교회에 간 틈을 타 그녀를 찾아 온다.

이미 약해진 캐더린의 육체는 진실의 말, 인간의 소리를 낸다.
 

 "히드클리프, 내가 바라는 건 우리 두 사람이 다시는 헤어지지 않는 거야."
  히드클리프 앞에서 마지막 격정을 꿈꾸듯 부드럽게 쏟아내며

때로는 우울해하고 때로는 투정하는 캐더린,

그 캐더린의 절규 어린 유언은 계속된다.
 

“당신은 튼튼하기도 하네요. 내가 죽은 뒤에도  얼마나 오랫동안 살 생각인가요?...

 당신은 날 잊겠지요? 내가 땅에 묻힌 뒤에도 행복하겠지?”
 

“당신이 한 모든 말은 마음에 뿌리를 내려 당신이 죽은 뒤에도

  내 속에서 생명력을 갖는다는 걸 모르오? 캐디,

  내가 내 자신을 잊지 못하듯 당신을 잊지 못한다는 걸 당신은 알지 않소?...

  이제까지 당신이 얼마나 잔인하고 위선에 차 있었는가 이제야 알겠소!

  왜 당신은 날 멀리 했지? 캐디, 왜 마음을 속였냔 말이오.

  당신은 나를 사랑했소. 그런데 무슨 권리로 나를 버렸지? 무슨 권리로! 
  빈곤도, 타락도, 죽음도, 하나님이나 악마가 내릴 수 있는

  그 어떤 재앙도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없었소.

  당신 가슴에 못을 박은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내 가슴에도 못을 박았소!”
 

가시나무새는 생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소리 높여 운다고 한다.

죽어가는 캐더린 앞에서 히드클리프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폭풍같은 진실을 쏟아낸다.
 

 “나는 나를 죽인 자를 사랑할 수 있어도 당신을 죽인 자는 도저히 용서 못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가시나무새는 자신의 한을 푸는 눈물을 쏟고 죽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히드클리프는 캐더린을 무덤에 묻고 살아야 한다.
살아 있지만 살지 않는 자,

그래서 삶이 살아내는 것이어야 하는 자의 고통과 고독이야말로

캐더린을 잃어버린 히드클리프의 몫이다.
히드클리프는 캐더린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캐더린의 주검 옆에서 천국에 가지 말고 차라리 유령이 되어

자기와 함께 있어 달라고 애원한다.
 

 “오오, 너는 내 괴로움 따위는 상관이 없는가?

그렇다면 내게도 한가지 기도가 있지!... 내가 살아 있는 한 네게도 안식은 없을지어다....

 유령이 되어 날 찾아다오.... 나와 함께 있어다오.... 차라리 나를 미치게 해다오.

네가 없는 이 지옥에서 나를 혼자 버려두진 말아다오.... 오오,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내 생명인 캐더린 없이 내가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내 영혼 캐디 없이 난 살 수 없단 말입니다.”


그후 히드클리프의 절망어린 방황은 20여 년간 계속된다.

그는 캐더린과 자신의 건강한 삶을 방해한 모든 사람들을 치밀하게 파멸로 인도하면서
캐더린의 빈자리를 잔인함과 경멸스러움과 축축함과 어두움으로 채색해갔다.
히드클리프는 주변의 모든 사람을 계획적으로 파멸시키면서

캐더린이 없는 그의 절망을 확인했고 그럼으로써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캐더린을 자신의 삶에 잔인하고 거칠게 실현시켜 나갔다.

또한 그는 밤이면 캐더린과의 추억이 서린, 이제는 침침하고 음산해진

다락방 창문을 열어 놓고 원망과 원망으로  캐더린의 유령을 간절히 기다렸다.
히드클리프는 자기를 잃어버리고 살아갈 수 있었지만

캐더린을 잃어버리고는 살아가지 못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캐더린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하는 그는

영혼이 없는 악마처럼 거칠고 경멸스러웠다.

 

히드클리프를 편집증 환자라고 몰아붙일 수 없는 이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히드클리프를 증오하거나 응징할 수 없다.
왜 그럴까?

히드클리프의 격렬한 잔인함에는

인간의 숙명적 고통과 절규가 터질 듯 녹아 있기 때문이다.

히드클리프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인간에 대한 이기적인 배반과 폭력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사랑으로 인한 고통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히드클리프를 이해하고 사랑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히드클리프는 고독하다.

캐더린이 없는 이상 그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사랑은 편리한 대로 이리 저리 옮길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랑에 영혼을 걸었고 사랑이 세상을 떠나자

자연스럽게 영혼을 잃고 방황하는 싸늘한 육체로 살아야 했던 것이다.
더 이상 살 의미와 의욕을  느끼지 못하는 그에게 삶의 시간은 숨막히는 인내의 시간이었다.

캐더린이 떠남으로써 그는 인간의 말을 잊었으며 자기 속으로 점점 깊이 굽어들어갔다.

그가 인간의 말을 회복하는 때는 천상에서 쫓겨나 히드클리프를 찾아

폭풍의 언덕으로 달려온 캐더린의 유령이 불러줄 때뿐이었다.
 

그러나 히드클리프의 고독은 친근하다.

이 사람은 이래서 좋고 저 사람은 저래서 좋고

그 사람은 그래서 좋은 것이 현대의 사랑법이다.

이 경우 ‘이래서’와 ‘저래서’와 ‘그래서’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우리가 사랑이라 불렀던 것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대상화시키는 사랑의 메마름에 익숙하지만

그것에 길들지 않는 자는 히드클리프의 고독에 친근한 것이다.

대상화된 사랑은

“이루어진 사랑은 포만으로 사라지고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은 허기져 죽는다”고

말하면서 영원한 사랑을 웃음거리로 만든다.
 

그러나 캐더린에 대한 히드클리프의 사랑엔 그런 대상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이란 서로를 통해 세계를 보는 그런 사랑이다.

히드클리프는 캐더린을 통해 세계를 보고 캐더린은 히드클리프를 통해 세계를 느낀다.

이들의 사랑은 완전한 자기화가 이루어진 사랑이다.

성격이나 지위나 명예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이기 때문에

그 전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면서 세계와 운명과 그런 것이 경험하게 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랑. 그것이 캐더린과 히드클리프의 사랑인 것이다.

서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서로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그들이야말로

확실히 ‘인간의 말’을 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다.
 

캐더린과 그런 공간을 공유한 히드클리프의 고독이 친근한 것은

불가능한 사랑의 몸짓을 통해 절박한 사랑의 가능성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의 싸늘한 절망 속에 숨어 있는 치열한 열망을 보고 어찌 그를 저주할 수 있을까?
갑자기 찾아온 히드클리프의 죽음은 분명 캐더린의 영혼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리라.

살아서 행복하지 못했던 자신의 사랑을 히드클리프는 죽음으로 부활시켰으리라.

이들의 사랑은 캐더린을 닮은 캐더린의 딸 캐더린 린튼과
히드클리프를 닮은 헤어튼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히드클리프와 캐더린의 사랑이 어두웠던 만큼

어둠의 그늘에서 태어난 이들의 사랑이 역전되어 밝은 앞날을 예감케 한다.
히드클리프의 사랑은 편집증적 사랑이다.

그러나 누가 그게 사랑이 아니고 편집증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