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韓國文學感想]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11.

好學 2012. 3. 18.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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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11.

 

    지은이:이주향
    출판사:명진출판

 

  제1부    길들지 않은 사랑은 힘이 세다

 

10.   엄마가 절망한 이유
나는 맏딸이다.

나를 낳고 아직 퇴원도 하기 전,

나의 할머니는 첫 아이를 낳고 까무라쳐 있다가 겨우 의식이 돌아온 며느리에게

한숨을 쉬며 말씀하셨단다.
 

“딸이란다. 다음에 아들을 낳으면 되지. 첫딸은 살림 밑천이 란다.”
 

자애로운 시어머니의 걱정스런 인사는 아들이 아니어서 어떡하니?

다음에 아들을 낳지 않으면...이라는 공손한 협박이어서

한번도 뱃속의 아이가 딸일까봐 걱정해 보지 않은 순진한 엄마는

서운하기도 했고 벽에 부딪친 느낌어었다고 했다.
 

‘살림 밑천이라니, 누굴 가정부로 키울까봐?’

엄마는 속으로나마 자신만만했고 자신의 사랑하는 딸이 세상에 태어나서 받은 첫인사가

‘공손한 푸대접’이었음을 잊지 않으면서 역전의 드라마가 펼쳐지기를 기원하셨다고 했다.
엄마의 두번째 절망은 내게 붙여진 성과 이름이었다.

엄마는 배가 산더미처럼 불러서 하늘이 노랗게 되는 고통을 지불하면서 아이를 낳았건만 아

이의 성과 이름을 붙여 주는 건 시아버지의 권리였다.

나는 할아버지의 성이 이씨여서 이씨가 된 아빠의 성을 따라서 이주향이 되었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가 되는 시작부터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남성문화에 편입되는 것이다.
 

엄마는 둘째도 딸을 낳았다.

참으로 건강한 여아였건만 ‘살림 밑천’이라는 위로도 되지 못한 둘째 딸의 탄생은

단지 대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한 불행을 확인시키는 사건일 뿐이었다.

시댁식구들의 시선이 곱지 않을 수록 엄마는
“딸은 사람이 아닌가요”를 당차게 항변했다지만

그것은 기라성 같이 버티고 있는 아들 선호사상을 무너뜨릴 수 있는

설득력 있는 항의는 아니었다.

그저 더 이상은 초라해질 수 없는 인간의 최소한의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둘째때는 자신의 딸 이름 앞에서 자신이 성이 희석되는 일에

아무런 심리적 저항도 생기지 않았다고 했다.

사회화인 것이다.
자존심 강한 엄마는 사회화가 늦되었을 뿐 사회화가 안 된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엄마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더욱 빠르게 사회화되어 갔다.

엄마는 그 후에 아들을 낳았고 그제서야 비로서

“딸은 사람이 아닌가요”라는 항변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결혼해서 아니, 시집가서 아들을 낳지 못한 고모의 부러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까지 되었다. 무서운 사회화였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니까 30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아주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대학을 다닐 수 있는 기회가 넓어지고
가스불에 밥 짓고 동선이 짧은 집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이 차이인가?
좀더 나은 가전제품으로 시간을 벌어서 재미있는 텔레비전 프로와 비디오를 시청하고

좋아진 화장품으로 모델처럼 꾸밀 수 있게 된 것이 차이인가?
예전에는 아들 낳기 위해 7공주, 8공주까지 불사했다면

의학기술이 발전해 태아감별하고 딸이면 뱃속에서 쉽게 지워 버려

딸부잣집이 될 이유가 없어진 것이 차이인가?

 

가정의 주인이 여자라고?
여자이기에 취업이 어렵다.

기껏 일자리를 얻었어도 주변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결혼=평생직장’이라는 이상한 등식하에 시한부 직장에 걸맞게
주변적인 일만 하도록 되어 있고

그나마 결혼과 동시에 그 일에서조차 손뗄 것을 자연스럽게 요구받는다.

그녀가 하던 그 일은 자연스레 ‘젊고 생기발랄한 여성’에게 넘겨지지만

 ‘사무실의 꽃’이상의 의미가 되지 못하는 새로운 여직원의 운명은

시든 꽃으로 버려진 그 선배의 모습 속에 녹아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것이 아직도 많은 직업여성의 운명이다.
 

아직도 여성이 편안히 누울 자리는 가정뿐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는가?

여성은 가정에서도 주인이 아니다. 주인은 남편이다.

시부모는 모시고 살 수 있어도

친정어머니, 친정아버지는 모시기 힘들다는 것이 중요한 증거 중의 하나다.
친정어머니는 일해 주기 위해 딸과 함께 살 수는 있지만 대접받기 위해 함께 살 수는 없다.

여성은 가정에서도 결코 편하지 않다.
 

가정을 지키는 일은 아내 몫이란 말이 여전히 힘을 가지는가?

그러나 그 말은 우리가 오해하듯 가정만은 아내의 권리로 남아 있다는 말은 아니다.

더 이상 쫓겨갈 곳 없는 여성에게 ‘가정’이란 최후의 보루이기에

가정을 지키는 일은 그녀의 생존과 결부되어 있는 절실한 의무란 말이다.

그 말은 억울해도 참으라는 억울한 말이다.

거기에서 실패하면 그녀는 사회적으로 폐기처분되기 때문에

아무리 부당하고 굴욕적이더라도 남편의 보금자리인 가정을 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회 속에서 주변인인 여성은 가정에서도 결코 주인일 수 없다.

 

남편의 이름과 나란히 아내의 문패를
이제 그 상황에 대한 인식이 천천히 무르익고 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일이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진짜 주인으로서 살아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나는 작은 일부터 실천할 것을 권한다. 
대문에 남편의 이름과 나란히 아내의 이름이 새겨진 문패를 달자.

‘누구 아내’의 그늘에 가려 잊혀진 자기 이름을 떳떳히 사용하자.

“저 박문수의 집사람이에요”라는 말이 겸손이던 시대는 지나갔다.

“저는 이미선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자.
 

아빠에게 존댓말을 하는 아들, 딸이 엄마에게 반말을 한다면

친근함의 표현이려니 이해하지 말고 언어를 일관성 있게 사용하도록 가르치자.
혹시 딸이라고 여성스러워야 한다면 고운 옷 입기,

식사예절, 설거지 돕기, 자기 방 정돈을 특별히 교육하고

아들이라고 그런 일상에서 해방되게 키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자.

딸이라고 유난히 치장시키지 말고

아들이라고 인간의 공격본능, 파괴본능만을 유난스럽게 키워주지 말자.

물장난하는 딸을 못하게 하지 말고 인형을 좋아하는 아들을 야단치지 말자.

아이들에게 아이들로서의 자연스러움이 살아날 수 있도록 아이들의 자연을 돌려주자.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시댁 식구들에게 기죽지 말자.

부부가 이룬 가정을 친정식구들이 침입할 권리가 없다면

마찬가지로 시댁식구들이 침입할 권리도 없다.

물론 남편의 식구들이기 때문에 존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아내의 식구들도 동일하게 존중받을 권리가 있음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