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韓國文學感想]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12.

好學 2012. 3. 18.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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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12.

 

    지은이:이주향
    출판사:명진출판

 

  제1부    길들지 않은 사랑은 힘이 세다

 

11. 인연이 혈연보다 강한 이유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있다.

처갓집은 멀수록 좋다는 말도 있다.

결혼한 여자에게 혈연은 결혼으로 맺어진 인연을 통해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인연이 혈연보다 강한지는 알 수 없지만 결혼한 여성에게

결혼 관계 이전의 혈연 관계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에서도 발견했다.

시댁 귀신이라는 말이 있듯이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는

결혼한 여성에게 인연은 혈연보다 강한 것임을 주지시켰다.
우리 어머니는 맏딸이고 맏며느리다.

맏며느리로서 어머니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좋은 며느리다.

나는 내 어머니가 시아버지, 시어머니는 물론

삼촌, 고모 등 많은 시댁 식구들의 생일이나,

얼굴도 보지 못했을 시댁 조상들의 기일을 잊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아버지는 어머니가 기억을 상기시켜 주기 전에는

당신의 생일조차 기억하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자 소리를 듣는 운 좋은 남자였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맏며느리인 우리 어머니는 좋은 맏딸은 되지 못했다.

그 말은 우리 어머니가 전쟁중에 홀로 되신

외할머니의 걱정을 끼치고 사는 그런 딸이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사실, 일 년에 한두 번, 그것도 출가한 딸네집이라고 이틀이상을 머무르시지 않던

외할머니를 가끔 볼 때 나는 외할머니가 어머니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믿음은 자신의 딸은 시집살이를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믿음이었을 뿐 할머니의 삶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의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오는 믿음직스러움은 아니었다.

그것은 외삼촌의 몫이었다.
 

사실 시집 식구들의 온갖 잡일까지 기억하고 선물을 보내거나

이런 저런 행사를 준비하는 어머니는 친정 식구들의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막내 삼촌의 아들의 백일과 외할머니의 73회째 생신이 겹친 적이 있었다.

물론 어머니가 선택한 것은 삼촌 아들의 백일 잔치였다.

나는 그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 외할머닌 생신이신데 백일 잔치하러 꼭 가야 돼? 반지만 보내면 되잖아요.”
  "외할머니 생신은 내년에 또 돌아오지만 백일은 한 번뿐이잖니?“
 

어른이 되어갈수록 나는 어머니 같은 여자가 가슴 저미도록 끔찍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데 어머니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효부라는 이름에 가려진 한 여자의 인생이 애달팠고,

그런 것에 대해 믿음직스러워 하고 당연해 할 뿐

아무런 배려를 해주지 않는 아버지의 이기심, 남자들의 이기심에 섬뜩했다.
백일 잔치에서도 어머니는 편한 얼굴이 아니었다.

고모들이 어디 아프냐고 물었을 때도

어머니는 그저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해 그런 것 같다고만 대답했다.
그런 상황을 통해 내가 확인한 것은 어머니의 마음은 원주 외가댁에 가 있다는 거였다.
 

나중에야 확인한 것이지만 더욱 기막힌 일은

아버지는 그날이 외할머니의 생신이었다는 것도 몰랐다는 것이다.

다음 날 식탁에서 내가 외할머니 생신이었다고 아버지에게 말하자

아버지는 멋적게 웃으면서 그랬니, 난 몰랐구나  하는 것이었다.

물론 아버지의 미안한 미소는 미필적 고의인 자신의 무심함에 대한 반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두 가지 사실에 화가 났다.

하나는 어머니가 할머니의 생신을 아버지에게조차 말하지 않을 만큼 사소하게 여긴 것이었고

또 하나는 단지 몰랐다, 잊었다는 것으로

편안하게 무죄임을 입증하려 드는 아버지의 무관심이었다.

사실 아버지는 집안 일에 대해서는 건망증을 생활화하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건망증을 키우고 부추긴 것은 바로 어머니의 끝 없는 인내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충실한 비서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친척들의 경조사를

전혀 기억하지 않고도 낯을 낼 수 있었고,

낯을 내지 않고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불필요한 것들은

가정의 충실한 비서인 어머니가 알아서 통제했다.

물론 대부분의 불필요한 일이란 어머니 친정 식구들의 일이었다.

어머니의 생신 대신에 남편 동생 아들의 백일을 챙기는 것이 마음 편하다는 어머니,

자기의 막내동생 결혼식엔 10만 원 부조하는 것조차 눈치를 보면서

남편의 막내동생 결혼식엔 3백만 원을 낼 수밖에 없는 어머니,

가정일은 잊고 사는 것이 편안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는 아버지,

그런 상황에서 내가 본 것은 여자의 혈연은 결혼으로 맺어진 인연보다 약하다는 것이었다.

 

건망증이 특권인 사람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아버지의 건망증은 특권이고

어머니의 기억력은 특정한 권리와 상관없이

인내로 치러내야 하는 의무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우리 아버지와 같은 남자의 건망증이란 어머니에게는 부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에게는 잊어버릴 자유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어머니가 가질 수 있는 자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에게는 자유는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혈연에 대해 무관심해도 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을 낳고 기른 부모에게는 편안히 무관심할 자유를 갖고 있었지만

남편의 식구들에 대해서는 사돈의 팔촌까지 신경을 썼다.

물론 그 결과는 어머니에게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효자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충실한 비서를 둔 사장이 하루의 일정을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아버지들이 마음 편하게 잊어버릴 수 있는 공간에는

반드시 그런 사건들을 잊어버릴 수 없는 사람들,

기억과 그 기억에 따른 행위를 존재 이유로 살아가야 하는 어머니들이 존재한다.

이런 여성들에게 인연은 혈연보다 강한 것일까?
 

언젠가 나는 아버지에게 따지듯 물었다.

도대체 아버지가 어머니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게 뭐냐고.

빙긋이 웃으면서 화두처럼 던지는 아버지의 말,
“어머니는 행복한 사람이란다.”

그말이 왜 내게는 부드러운 폭력처럼 들렸을까?
 

내가 들어본 적은 없지만 분명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믿었을 것이고
그래서 인내하면서 아버지의 가정을 지켰을 것이다.

사랑은 인내하게 한다고 믿으면서.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인내도 인내일까?
사랑은 인내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내로서 사랑을 확인하려 든다면 그것은 가학이다.

사실, 자신의 딸이 결혼해서 어머니처럼 친정일을 모른 척하고
시집일에만 매달려 산다면 제일 끔찍하게 여길 사람이 분명 아버지다.

그런데도 아내에 대해 무심한 횡포에 대해서는 저토록 장님일 수 있을까?
 

물론 나는 안다.

그와 같은 것은 아버지 개인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단지 가부장적 사회에 편재된 가부장적 힘에 의해

아버지가 누리고 있는 특권일 뿐일지도 모른다.

결혼한 여성의 삶에서 인연이 혈연보다 강하다는 명제
(일상적으로 이 말은 여자는 시집가면 남이다 라는 말로 떠돈다)가

우리 사회에서 참이 될수 있었던 건 가부장제라는 힘의 원리가 그 토대다.
힘의 원리는 일방을 억압하는 쪽으로, 다른 일방을 억압당하는 쪽으로 만든다.
그리고 억압된 것은 분출구를 찾게 마련이다.

마침내 우리집에서도 어머니의 억압이 소리를 내는 사건이 일어났다.
 

어머니가 외할머니 생신에 가보지 못한 것은 우리집에서는 늘상 있는

아주 사소한 일이었으므로 우리 모두는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은 채

또다른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외할머니의 부음 소식이 날아왔고

그 전화를 받자마자 어머니는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인내로 살아온 어머니의 울음소리와 통곡하는 모습을 나는 처음 들었고 보았다.

어머니의 통곡을 삼오제까지 계속 되었다.
 

그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부음 앞에서 진지하고 예의바르게 장례식을 잘 치러내던

며느리로서의 어머니의 모습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었다.
어머니는 평생을 모아 두었던 눈물을 쏟아내는 것처럼 홍수처럼 눈물을 쏟아냈다.

하도 울어 눈물이 말랐을 때는 마른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눈물로 자신의 어머니의 모든 장례 절차를 대신했다.

확실히 혈연은 인연보다 강하다는 것을 가슴 아프게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다만 힘 없는 약자였기 때문에 인연이 혈연보다 강한 것처럼 행동했을 뿐이다.
 

여기서 나는 혈연이 인연보다 강하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주장하고 하는 것은 단지 소극적인 명제다.

결혼한 여자에게 인연은 혈연보다 강하다든지

결혼한 여자에게 인연은 혈연보다 강해야

가정이 편안하다든지 하는 것은 허위의식이라는 것이다.

나의 주장이 단지 소극적인 것은 허위의식의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는

제도적 장치가 배제된다고 해서 반드시 혈연이 인연보다 강하다는

명제가 지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혈연을 뛰어넘는 인연과 인연에 먹힌 혈연
사실 혈연과 인연은 대립되는 개념은 아니다.

혈연은 넓은 의미의 인연에 포함된 개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혈연과 인연을 대립시키는 것은 피로 맺어진 인연과

피로 맺어지지 않고 인위적으로 맺어진 인연을 구별하기 위함일 것이다.

더 좁게는 피로 맺어진 인연과 사랑으로 맺어진 인연,

혹은 결혼으로 맺어진 인연 사이의 대립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른 인연은 인연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 생각해도 혈연만큼 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혈연과 대립시켜 놓음으로써

대등한 가치가 보여 주는 팽팽한 긴장감을 살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긴장감은 때로는 문학의 좋은 소재가 되어 작품의 긴장미를 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널리 알려진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와 같은 상황의 전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혈연을 포기할 만큼 강한 인연의 표상이다.

물론 이《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우리가 읽어내는 것은

혈연은 인연보다 약하다는 명제가 아니라 혈연을 뛰어넘는 인연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혈연을 뛰어넘는 인연이란 우리 어머니와 같은

결혼 생활을 누리고 있는 자들이 보여 주는 ‘인연에 먹혀 사는 삶’과는 다른다.

인연에 먹혀 사는 삶이란 혈연까지 뛰어넘는 인연이라기 보다

특정한 혈연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또 다른 혈연관계를 무시하게 하는 제도적인 폭력일 뿐이다.

혈연까지 뛰어넘게 하는 인연에는 낭만이 있을 수 있지만

특정한 혈연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또 다른 혈연 관계를

무시하게 하는 제도엔 폭력과 억압이 사이좋게 공존할 뿐이다.
 

확실히 혈연은 중요한 인연이다.

중요한 인연이란 자기 삶의 핵심에 들어와 있는 인연을 말한다.

그러나 혈연 이외에도 중요한 인연, 혈연만큼 강한 인연은 존재한다.

그 인연은 때로는 혈연보다 강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마디로 혈연은 인연보다 강하다든지 아니면 

그 반대로 인연은 혈연보다 강하다든지 하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단지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다음이다.

언제나 혈연이 인연보다 강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