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韓國文學感想]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14.

好學 2012. 3. 23.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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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14.

 

    지은이:이주향
    출판사:명진출판

 

  제1부    길들지 않은 사랑은 힘이 세다

 

13    사랑이 집착인 이유 1.
편집증은 병이다.

그렇지만 편집증적 진실은 병이 아니라 진실이다.

문제는 편집증을 쉽게 병으로 광고하는 문화가 편집증적 진실을 억압한다는 데 있다.
어떤 대상이나 사람에게 광적으로 집착할 때 우리는 그것을 편집증 증세라고 부른다.

사실 병으로서 편집증은 대단히 무섭다.
다음은 가까운 교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선생님, 왜 저만 쳐다보세요?
  학기가 시작되고 3주쯤 지난 어느 날 한 여학생이 그를 찾아 왔다.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정중하게 착석한 그 여학생은 교수에게 진지하게 요구했다.
  “선생님, 제발 수업시간에 저만 쳐다보지 마십시오.

   다른 학생들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 교수는 수업시간에 특정한 학생에게 특별히 시선을 주어본 적도 없는데다
그때까지 그 여학생의 이름조차 몰랐다.

그러나 그 여학생이 그렇게 요구했으므로 그는 생각했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특별히 시선을 줬나보다고.
그리고 나니까 그 여학생이 듣는다는 수업에 들어갈 때마다 움찔했다.

전에는 특별히 눈에 띄지 않던 그 여학생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물론 그때부터는 의도적으로 그 여학생이 앉아 있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2주가 지나자 그 여학생이 또 찾아왔다.

여학생은 말했다.
  “선생님, 왜 자꾸 저만 쳐다봐서 학생들이 우리 사이를 의심하게 합니까?”
 

순간 그 여학생이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갑자기 당한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다시는 쳐다보지 않겠다는 다짐만 주고 돌려보냈다. 사실 그는 무서웠다.
  그런데 한 주가 지나자 그 여학생이 또 찾아왔다.
  “선생님, 모든 방송국에서 선생님과 저를 소재로 드라마를 만들었습니다.

    9시 뉴스에까지 나와서 전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구요.“
 

치료받아야 할 전형적인 편집증이다.
편집증을 주제로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이웃집 여인>이나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가 전형이다.
<이웃집 여인>을 보았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대학 다닐 때 사랑했던 남자,
그러나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는 삶의 축이 완전히 달라져

더 이상 인연이 될 수 없는 남자(그 남자는 이미 결혼했다)를 찾아

의도적으로 그 남자의 옆집에 이사온다.

그녀는 옛애인이었던 이웃집 남자를 유혹한다.

그리고는 권총으로 그를 쏴 죽이고 자기도 자살한다.

자기는 그가 없는 세월을 적응하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자기 없는 세월을 잘 적응한 그 남자에 대한 미움과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착 때문이었다.
 

그 영화와 함께 현실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방송국 DJ에 대한

끔찍할 정도의 집착을 표현한 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는

편집증에 대한 공포를 만천하에 공표했던 영화다.
그런 영화들이 설득력을 갖는 공간에서 내가 고개를 끄덕일 수만은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더 무서운 것 때문이다.

내게 편집증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편집증적 공표가 강조되는 사회다.
편집증적 공표는 대부분 어떤 대상이나 사람에 대해

애착을 가지는 것이 우습게 치부되는 문화에서 강조된다.

후기 자본주의는 오늘 내가 입었던 옷을 가볍게 버리고

새로운 의상을 쉽게 구입할 수 있어야 지탱된다.

유통의 메커니즘이 빨리 빨리 돌아야만 사회의 경제구조가 지탱되는 곳에서

어떤 것에 대한 강한 애착은 병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사실 물건 혹은 상품과 사람은 다르다.

그러나 과연 다르게 대접받는가?
다음의 시를 읽어 보자.

 

  내가 걸어 다닌 수많은 장소를
  그는 알고 있겠지
  내가 만나 본 수많은 이들의 모습도
  아마 기억하고 있겠지

  나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던 그는
  내가 쓴 시간의 증인
  비스듬히 닳아버린 뒤축처럼
  고르지 못해 부끄럽던 나의 날들도
  그는 알고 있겠지
  언제나 편안하고 참을성 많던
  한 컬레의 낡은 구두
  이제는 더 신을 수 없게 되었어도
  선뜻 내다 버릴 수가 없다
  몇 년 동안 나와 함께 다니며
  슬픔에도 기쁨에도 정들었던 친구

  묵묵히 나의 삶을 받쳐준
  고마운 그를
  이해인 <낡은 구두>전문

 

 한 켤레 낡은 구두를 선뜻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관계를 어떻게 맺을까?
더 좋은 상품이 나올 때마다 지금 있는 물건을 폐기처분하고

새로운 것을 사야 하는 사람은 또한 어떨까?

사람 대접과 물건 대접 사이에는 어떤 함수관계가 있지 않을까?
 

차인표만큼 잘생긴 근육질의 남자를 옆에 끼고 다닌 덕택에 친구들의 부러움을 산 여자가

돈도 많고 매너도 좋은 남자를 소개하는 마담뚜에게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이유.

그 이유가 우리에게 어떤 것을 생각하게 하지는 않는가?

거기에 과시욕은 있어도 사랑이 있다고는 믿지 못하겠다.
과시욕이 인격적 관계가 아닌 사물적 관계에서 통용되는 것이라면

지나친 애착을 병이라고 강조하는 문화는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의 대부분을 사물화하도록 격려한다.

 

 ‘폭풍의 언덕’에서 만난 사랑
나는 너무 쉽게 사랑하고 너무 쉽게 이별하면서도

너무 쉽게 사랑과 이별을 합리화시키는, 사랑 없는 사랑을 조장하는 이 시대가 싫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받을 만한 주장을 한다. ‘사랑은 집착이다.'
생각하는 사람들, 성숙해 보이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아마도 ‘사랑은 집착이 아니다’일 것이다.

 ‘사랑은 집착이 아니다’라는 명제도 물론 틀린 명제는 아니다.

그 명제의 설득력은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내 방식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열정을 그저 쏟아내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데 있지

사랑에 있어 특정한 대상에 대한 열망이 무의미하다는 데 있지 않다.
 

사실 남녀 사이의 사랑의 본질은 집착이다.

그러나 사랑의 집착이 때로는 사랑까지도 병들게 할 정도로 강하기 때문에

사랑은 집착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한편에선 ‘사랑은 집착이 아니야’라고 멋있게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 나 아니면 안 되는 사랑을 꿈꾸는 게 사랑이다.

그런데 나 아니면 안 되는 거, 너 아니면 안 되는 거, 그게 집착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편집증이 곧 사랑은 아닐테지만 편집증적 진실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편집증적이어서 버리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가끔씩은 가슴쓰리게 기억나는 사람이 아마도 ‘폭풍의 언덕’의 히드클리프일 것이다.
 

평소의 나는 사랑 예찬론자는 아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 가는 일에 바쁜 나는

사랑 속에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 보통사람이다.

그럼에도 가끔씩은 폭풍을 몰고 다니는 남자 히드클리프와

그 폭풍을 사랑할 줄 아는 생동감 있는 여자 캐더린의 이야기인

<폭풍의 언덕>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받는다.

루이제 린저의 평은 거짓이 아니다.
 “히드클리프는 있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에서 그 이상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인물은 없다.

히드클리프의 영원한 연인 캐더린과 캐더린의 딸 캐더린 또한 그렇다.

누가 그녀들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그 여성들은 영국소설 가운데 가장 매력있는 여성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