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韓國文學感想]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10.

好學 2012. 3. 18. 07:39

 

icon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10.

 

    지은이:이주향
    출판사:명진출판

 

  제1부    길들지 않은 사랑은 힘이 세다

 

9  악녀를 비난할 수 없는 이유


김혜린의 (불의 검)을 보고
나는 만화를 좋아한다. 특히 김혜린 만화를 좋아한다.

김혜린의 만화는 어떤 소설보다도 구성이 치밀하고

어떤 장편소설보다도 사건의 전개가 흥미있다.
김혜린의 만화에서 모든 사건은 우연히 일어나지만

그 우연성은 사건을 만들고 역사를 만드는 자연스러움일 뿐

작가가 사건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해 방만히 흩어놓은 것은 아니다.
 

김혜린의 만화에는 색깔이 있다.

그 색깔은 아마도 등장인물 모두가 살아있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일 것이다.

김혜린은 등장인물 모두를 자식 혹은 형제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인물의 성격은 한결같이 다르지만 작가의 애정어린
시선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선한 인간도 인간사 고뇌에서 제외되지 않고

악한 사람으로 치부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인간미가 넘친다.

그의 만화의 울림은 거기서 나온다.

악할 이유가 없어서 착해빠진 사람,

악하기만 한 성격은 김혜린의 만화에서는 부각되지 않는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김혜린의 만화 (불의 검)도 그렇다.

(불의 검)에서 내가 사랑하는 인물은 소서노고 산마로 아사이며 아라지만

내가 관심을 갖는 인물은 마리한이고 수하이이며 카라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해서 보고 싶은 인물이 바로

검은 욕망의 화신이라고 불리우는 카라다

(불의 검)에서 카라는 독특한 인물이다.
 카라는 오빠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 성공한 정치가다.
밟고 밟히는 세상에서 결국은 강자가 웃는다는 세속의 법칙을

몸으로 체득하면서 치밀하게 힘을 쌓아온 카라는 지략가 여성이다.
 

카라가 여성이라는 점은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녀가 남성의 정기를 흡수하여

그 힘으로 살아가는 고대사회의 무서운 주술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밟혔고 그래서 강한 ‘남성’에 의해 왜곡된 약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강한 ‘남성’에게 배워 남성적 힘을 체득해낸

영리한 여자 카라는 더 이상 약하지 않다.

페미니스트로서 카라는 권력 지향적인 남성에게는

무자비할 만큼 가혹하고 쉽게 피를 본다.

하지만 여성의 어머니를 자처하는 그녀는 상대적으로 여성에게는 관대하다.

 

작가는 카라에 대해, 남성에 의해 생산 기능을 망친 불모의 여인,

여성으로서 취할 행복의 여지가 애초부터 없었던 여인이

인간미가 메마른 마녀가 되었다고 해서 동정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동정하기에 카라는 몹시 강하고 카라로 인한 공포가 너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카라는 자신에게 거역하는 남자를 쉽게 제거할 뿐 아니라

자신의 왕국을 넓히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는 인간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작가의 외교적인 말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분명히 악의 화신으로 나오긴 해도 세심하게 배려한

카라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카라도 우리가 끌어안아야 할

우리의 자매라는 결론에 반대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네가 망친 여자의 인생이 몇 개인데
카라의 뒤에는 카르마키의 왕이 있다.

그러나 카라는 왕을 팔아 권력을 휘두르다가 왕과 함께 사라져가거나,

왕의 사랑이 끝나는 지점에서 비참하게 사라져가는 권력의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남의 권력으로 시작했으나 그것에서
자기 권력을 만들어낸 천부적 지략가다.

강하다는 이유로 짓밟는다는 생각도 없이 여자를 짓밟는 강한 남자들을

카라는 더 강해짐으로써 자신 앞에 무릎을 끓게 만드는 강한 여자다.

그녀는 남자의 눈물은‘ 눈물 단지에 모실 만큼’귀한 실존적 고뇌이고

여자의 눈물은 ‘약자의 교활한 무기’라고 읽어내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을 싫어한다.
 

많은 여자를 데리고 놀았던 야장 귀족 수하이가

진실해지고 싶은 여자 아라를 만나 사랑하고 싶었으나

결국 아라의 사랑을 얻어내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할 때

카라는 균형감각 없는 강자의 속성을 질책한다.
카라는 통찰력이 있을뿐더러 그 통찰력으로 질책까지 할 수 있는 힘 있는 여자다.

 “탕아야, 네가 망친 여자의 인생이 몇 개인데 너는 한 번의 버림 받음으로 그리 울고 부느냐?

세상 여자들이 얼마나 밟히며 울고 사는지 너, 아느냐?”
 

여자를 사랑하는 그녀는 그러나 약자인 여자가

약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 때 철저하게 외면한다.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강자인 남자에게 기대어 눈물과 웃음을 파는 여자의 모습이다.

분명 카라는 강하지 못해 당하면서 당하기 때문에

당당해지지 못하는 삶의 악순환에서 헤쳐나오지 못하는 여자를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카라는 약자의 삶의 모습에 동정을 보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카라가 약자의 악순환적인 삶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와 같은 삶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그녀의 자구책인지도 모른다.

자기가 난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왕의 후궁이 한 손에 뇌물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눈물을 닦을 때 그녀는 말한다.
 

 “도대체 여자의 힘이란 것이 매음의 웃음 아니면 구걸의 눈물뿐이더냐?

세상 원망이나 하면서 질질 끌려다닌 인생이 무슨 자랑이더냐?

나는 너 같은 여자를 보면 짜증이 난다.”


선의 편에 서 있진 않아도 카라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위인지 정확하게 가려내는 사람이다.

약육강식의 세상 논리로 잡히지 않는 여주인공 아라나,

아라의 건강한 연인인 산마로에게 그녀만큼 끌려하는 사람도 드물다.

그러나 카라는 약육강식의 논리로 굴러가는 세상에서 지지 않기 위해

자신이 먼 옛날에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가져본 기억이 없는,

그러나 자신을 끌기는 하는 매력의 소유자들과 운명 같은 겨누기를 할 뿐,

원래 ‘검다’는 의미의 그녀의 이름에서 그녀는 친구처럼 편안하게 대하긴 어렵지만

무시할 수  없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천석꾼을 질투하면서 만석꾼에게는 아부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삐뚤어진 페미니스트라고 부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를 그렇게 부르기가 싫다.

분명 그녀는 마음이 비틀렸고 냉정하고 무자비하다.
 

그리고 우리는 안다. 그녀가 간과하고 있는 점을.

그녀는 여인의 왕국을 꿈꾸면서 여전히 남성적인 힘의 논리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녀가 왕이 되었을 때 그녀는

이름만 카르마키의 모신이며 어머니이지 여전히 군림하는 독재자다.

남성적 힘과 싸우는 그녀는 여전히 남성적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해방자가 아니라 비틀린 권력자다. 

그러나 과연 그녀가 강자 앞에서 주눅 들어 강자의 요구나 비위 맞추기에 급급한,

그녀가 극복하고 싶어했던 약자보다 더 비틀렸는가?

과연 그녀는 체계적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남성 우월주의를 관철시켜 온 가부장제보다 더 무자비한가?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게임을 하는 태양과 바람의 신화는 종종 인용된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데 있어 누가 더 강한가? 분명히 태양이 더 강하다.
당신도 태양은 부드러웠고 바람은 무자비했기 때문에 태양이 더 강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고 강조할 것인가?
틀린 생각은 아닐지 모르지만 너무 쉬운 생각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가?

태양은 더 강했기 때문에 자발성을 불러냈다고.
그리고 그 자발성은 그 자연스러움 때문에 부드러움으로 인식되었다고.
백석꾼을 시기하고 천석꾼을 질투하는 사람들도 만석꾼에게는 아부하지 않던가! 

 

카라에게 돌을 던질수 없는 이유
그녀는 무자비하다.

그러나 그녀가 무자비한 것은 밟히지 않기 위한 그녀의 생존방식이지

그녀가 본래적으로 악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지는 못한다.

그녀가 한순간 냉정을 잃고 회한에 빠져

잠시 치밀한 머리 굴리기를 중단했을 때 그녀는 치명상을 입는다.

독재자 오빠를 제거하고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순간에
그 독재자가 “널 사랑한다”고 달랠 때 그녀는 계산이 아닌 감정에 빠져 극도로 흥분한다.
 

 “날 사랑해? 가증스러워, 사랑이 그따위 것이라면

난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을 죽여버릴 거야”

쓰린 세월을 절규로 달래다가 방심한 그녀가 죽어가는 왕에게서 치명상을 입을 때

나는 분리주의가 호소력을 갖는 지점을 생각한다.

사실, 카라를 분리주위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분리주의의 극단적인 형태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남성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다고 분리주의자들은 선언한다.

태양의 기득권을 가지고 시작하는 남성들은 자연스럽게 그 권력을 관철시키고 있기 때문에

절대 여성들과의 평등한 문화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리주의자들은 여성들은 가족,노동,성 등

사회문화 전반에 여성들만의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남성들이 권력을 가진 자리에서 여성의 세계를 세우려 할 때는

모든 방식을 뒤집는 혁명만이 가능하다.

혁명이라고 부를 수 없는 카라의 성공(그것은 분명히 쿠데타다)은 역설적이게도

남성적 권력이 스크럼을 짜고 도처에 편재한 곳에서 남녀평등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

얼마나 희망 없는 일인가를 증명하기에는 충분하다.
 

사실 상당히 극단적인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분리주의가 많은 여성학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남성 중심 사회의 모순이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대로 여성의 권세는 치맛바람이 되며 여성의 정열은 드셈이 되고

여성의 비판은 건방짐이며 여성의 노여움은 발끈함이고

여성의 지적 욕구는 허영심인 세상이다.

그런 세계에서 카라를 생각하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다.
 

남성의 동의를 얻어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남성 중심사회에서
여성의 약자의 길을 포기하고 당당히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카라처럼 대립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립의 길에서 슬쩍 비껴갈 때 그녀가 받았던 치명상은

대립이외에 길은 없다는 그녀의 확신을 더욱 강하게 할 것이다.

물론 분리주의에서 중요한 관점을 보기는 해도 나는 분리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내가 왜 분리주의자가 아닌지를 길게 늘어 놓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럴 경우 카라의 의미가 희석되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카라에게 다시 한번 돌을 던지고 싶지 않다.

비틀릴 대로 비틀린 그녀의 정신이 무릎 끓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원하는 노력의 흔적일 때 그녀처럼 살지 않아도 무릎 끓을 일이 없는,

약자의 길을 가지 않아도 좋은 그녀 뒤의 인생들이 그녀를 욕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