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서평 1

好學 2012. 3. 22. 20:29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서평 1 

 

 

오토 베버 저 / 김광식 역 / 기독교서회(서울:1983)

부제 : 칼 바르트의 신학과 그 내부적 모순 
  
Ⅰ. 서 론
 
칼 바르트의 신학을 이해하자면, ‘자기 것’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칼 바르트의 신학은 “나의 것을 없애는 못된 하나님이라면 나는 그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모든 것들에 대한 공격정신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나의 신학’, ‘나의 교회’, ‘나의 것’, ‘나의 가정’, ‘나의 신앙’, ‘나의 소망’, ‘나의 사랑’ 이 모든 것들을 칼 바르트는 공격한다.
 
역으로 칼 바르트를 공격하는 명칭들이 있다. ‘위기신학’, ‘변증법적 신학’, ‘옥캄주의’, ‘플라톤주의’, ‘ 칸트주의’, ‘실존철학’, ‘합리주의’, ‘허무주의’, ‘관념론’, ‘초자연주의’, ‘고차원 휴머니즘’, ‘객관주의’, ‘정통주의’ ‘신정통주의’, ‘하나님의 중심주의’, ‘그리스도 일원론’, ‘계시적극주의’, ‘성서적기독교(비꼬는 투로)’, ‘교회적 신학’ 등등
 
그러나 바르트가 보기에 이 모든 것은 예수님 앞에서 부정되어야 될 것 곧 ‘나의 신학 따로 갖기’에 해당된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진정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남는가를 바르트는 각자 자신들에게 물어보라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부정, 자기 부인 없이는 칼 바르트 신학을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는 ‘특별한 성경해석’도 없다고 말한다.(p60) 그 이유는 말씀 스스로 우발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p25) 인간이 말씀을 붙잡을 수가 없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를 위한 말씀이라는 것은 없다. 단지 말씀 안에서 교회가 되는 사건만 있을 뿐이다.(p20)
 
바르트가 이런 식으로 논리를 이끄는 이유는, 바로 인간들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말씀을 자기를 위하여 붙잡으려는 본성을 줄 곧 실시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자기 존재 증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바르트는 부재(不在)로 맞선다. 즉 진리는 감춰진 것이 하나님의 자유로 인해 드러날 뿐이다. 즉 항상 신비다. 신비를 신학의 역사, 교회의 역사, 인간의 역사로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계시는 항상 하나님께로 속해야지만 어느새 교회가 소지한 계시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학(교의학)을 ‘교회를 위한 신학’, ‘목회를 위한 신학’으로 변질해 왔던 그동안의 사태에 대해서 바르트는 모두 다 뒤집어버린다. 바르트의 이러한 ‘신학 뒤집기’는 차후에 인간 역사 속에 나타날 모든 신학에는 당연히 적용될 시금석이 되기 위해 칼 바르트는 말씀 자체를 권위의 유일한 시금석에 내세우게 된다. 그래서 그의 교의학의 처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