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서평 3

好學 2012. 3. 24. 23:05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서평 3 

 

 오토 베버 저 / 김광식 역 / 기독교서회(서울:1983)
부제 : 칼 바르트의 신학과 그 내부적 모순 

 

 

Ⅲ. 평 가 
 
1. 바르트의 신학에서의 취약점은,
바르트의 신학에서의 취약점은, 하나님과 인간의 개념 구성에 있어 성경에서 출발하지 않고 계시로 출발한데 있다. 계시와 성경의 차이점은, 계시란 성경을 존재하게 한 원인을 추적해서 설정된 추상적 개념이다 는 것이다. 즉 성경을 보면서, “이 성경은 누가 지었으며, 어디서 왔으며, 왜 인간들의 코앞에 놓여 있느냐”를 따져 물을 수 있는 권한을 바르트는 인간에게 허용한 셈이 된다.
 
즉 계시보다 하위 개념으로서 성경을 생각하다보니 성경이 성경으로 있게 한 원인자로서 계시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상정의 내용을 채워놓기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를 배치용으로 동원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 자체가 이 ‘계시’라는 우월적 직위의 개념 설정을 용납하는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복음 중심으로 내용이 펼쳐져 있다. 복음이란 성육신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다. 즉 예수님이 품고 계시다는 인성과 신성의 관계가 아니라 ‘메시아가 언약대로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의 연관성으로 모든 해석이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흘리신 그 ‘피’로 모든 해석이 귀결되게 된다. 곧 ‘언약의 피’이다. 즉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의 피 안에서 모든 것을 말씀하신다.
 
바르트는 예수님의 실존으로 모든 것을 귀속시켰지만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예수님의 피로 모든 것이 쏠리게 되어있다. 바르트와 사도 바울의 차이점은, 짐짓 성령께서 무엇을 가지고 구원의 능력으로 제시하고 있는지의 차이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8-11)
 
2. 바르트가 피 중심이 아니다. 
  바르트가 피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실존 중심의 신학을 펼치다보니 이스라엘의 존재 전체와 그 안에 들어있는 참 이스라엘의 구분을 존재론적으로 구분해내지 못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 속의 이스라엘’, ‘유대인 속의 유대인’, 뿐만 아니라 ‘교회 속의 교회’를 무엇으로 구별 지을 것이냐에 대하여 난관에 부딪친다.


예수님께서는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으로 가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전도하게 하셨다. 즉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과의 구별점이 구약 속에서 어떻게 작용했는가는 예수님의 실존 중심에서는 알 수가 없고, ‘피(고난) 발생사건’으로만 구별되기 때문이다.
 
특히 바르트는 ‘대립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와 예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이런 논리에서 필히 ‘말씀 사건의 우발성과 주체 정립의 연관성’이 설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참으로 ‘사건의 우발성’이라면 주체는 일시적 주체로 머물고 이 주체관에 준해서 수립한 ‘대립자’라는 개념에 영속성이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사건이 주체정립에 관여하게 되면 필히 주체의 자리에 ‘공백’이 발생하게 된다. 사건은 주체가 붙잡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사건이 주체를 항상 해체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르트가 ‘대립자’라는 용어를 쓰면서 단순히 ‘언약 상대자’라는 의미보다 ‘대립’을 강조해야만 했다면 ‘말씀 사건’ 자체에 이미 대립의 요소가 품고 있음을 말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바르트는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사이에는 ‘대립’이 ‘화해’로 전환된 상황이고 그 완료된 상황이 예수님의 실존에 담겨서 나타나기 때문에 인간들은 예수님의 실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유’에 참여하는 것으로 십자가 의미는 이미 해소된 셈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되면 ‘새언약’의 의의도 예수님의 실존 속에서 소실되어버린다. 복음이 예수님의 실존으로 대체되어버린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의미하는 복음이 아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십자가는, 예수님이나 인간의 실존 안으로 사라져 소실되어야 될 한시적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이 속성인 공의의 속성과 사랑의 속성으로 형성된 두 영역 사이를 영원히 격리시킬 성격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천국과 지옥의 존재의 의의가 산다. 지옥이 영원한 실재를 말하지 않고서는 영원한 천국과의 격리성을 말하지 못하고 구원의 의미도 없게 된다.
 
그리고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형상 개념이 기초가 된다. 바르트는 부부의 성별 차이에다 ‘하나님의 형상’의 기초를 삼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르트의 구분에 의하면, ‘창조 역사’ 차원에서는 그러하지만 ‘은혜 역사’ 차원에 예수님의 고난과 피를 기초로 ‘하나님의 형상론’을 전개한다.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노아의 무지개 언약의 실체가 이로서 마련된다.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5-6)
 
3.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바르트는 부정적 선택이 긍정적 선택 품 안으로 들어가서 소멸되고 만식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되면 ‘이중 예정’이 아니라 ‘이중 긍정’을 거쳐서 단일 긍정으로 귀착되고 만다. 그런데 바르트는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에서 왜 ‘이중 예정’(즉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선택하고, 예수님이 왜 성도를 선택하는 것)이 필요한지 그 연유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왜 성령께서 아버지부터도 오시고 아들로부터도 오셔야 하는지와 관련되어 있는 문제다. 그것은 신약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삼위일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가지고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표현되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로부터 성령이 오시지 아니하시면 예수님은 십자가 지실 수가 없고, 또 그 십자가가 성도를 구원하는 능력이 되려면 아버지로부터 오신 영이 아니라 이미 주가 되신 예수님의 성령으로 일을 하셔야 오로지 십자가 피만 영원히 천국에서 증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성경에서의 ‘이중 선택’은 그 중심에 십자가 복음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한 이중 선택이지 인간을 구원이나 예수님이 실존을 증거하기 위한 이중 선택은 아닌 것이다. 에베소서 1:4의 예정에 관한 말씀도 1:7에 나오는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계시다.
 
4.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88페이지에 보면, ‘사랑’과 ‘자유’를 하나님의 두 속성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명백하게 하나님의 속성은 ‘공의’와 ‘사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엄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1-23)
 
바르트는 악마의 실제적인 위세 꺾임을 강조하고 無性 혹은 “불가능한 것의 실존가능성, 다만 비현실적인 것의 실존 가능성, 다만 무력한 것의 독자적인 힘” 정도로 표현한다.(p200, p103) 이것은 예수님의 실존 가치의 우월성과 최종 승리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보면, 예수님의 새언약 가치를 위하여 모든 피조물이 있기에 반드시 지옥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천국에 가는 자는 반드시 생명책에 기록된 자에게만 국한 되는데 이는 그 생명책이 바로 ‘어린양 (피와 관련된)의 생명책’이 된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7)
 
5. 개혁주의자들이 칼 바르트를 비난하는 것은,
개혁주의자들이 칼 바르트를 비난하는 것은, 교회라는 역사적 성과물에 눈독이 들이고 있기 때문이고 그 역사적 성과물로서 목회자나 신학자들의 자기 존재 가치를 찾아보기 위함이다. 즉 교회 없이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로만 도저히 하나님을 못 믿겠다는 투다. 따라서 바르트는 이들을 불신자로, 이단으로 보고 공격하는 것이다.
 
바르트의 정신에 의하면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줄 수밖에 없다. “목사가 된 것이 후회스럽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제대로 된 목사 할 사람입니다. 매일 후회하시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선다는 것은 ‘넘어진’ 후에나 비로소 시작한다”(p138)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