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서평 2

好學 2012. 3. 23. 20:57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서평 2 

 

 

오토 베버 저 / 김광식 역 / 기독교서회(서울:1983)
부제 : 칼 바르트의 신학과 그 내부적 모순 

 

Ⅱ. 본 론 
1. 계시와 말씀의 관계

 
바르트는, 기존 신학이 말씀에 접근하는 사고방식을 뿌리채 뽑아 내던져버리는 작업에 나선다. 따라서 똑같은 본문을 설명해도 바르트가 설명하는 것과 기존 신학이 설명하는 바가 다르게 나타난다. 즉 기존 신학에는 ‘말씀의 신비’를 누락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말씀에 접근하는 바르트 나름대로의 방식을 소개하기 위해 바르트는 삼위일체의 ‘삼중성 속의 통일성’과 유사한 형태로 말씀의 ‘삼중성 속의 통일성’을 언급한다.
 
그것은 바로 ‘말’이요 ‘행위’요 ‘신비’다. 첫째, 말이란 인격성을 가진 분이 인격성을 가진 대상을 향하여 전달되기에 반드시 모든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의 인격성’이 도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행위’란 곧 인격성을 가진 하나님 스스로의 행위라서 인간들이 자기 행위로 말씀을 지켜낸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과 충돌을 야기하기 된다. 즉 말씀 성취에 있어 계약에 인간은 관여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참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로 ‘신비’란 곧 말씀이라는 역사적·지상적 형식을 유발하는 ‘계시의 영역’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계시의 영역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유에서만 형성되기에 인간들에게 감춰진 것이다.
 
계시 자체가 하나님의 자유 때문에 인간들은 모른다는 측면을 말하기 위한 계시가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언제나 어디서나 계시가 있다는 말이다.(p23) 이 하나님의 자유에 근거한 계시관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르트는 세 가지 형태의 계시를 주장한다. 하나는 ‘선포된 말씀’이고 또 하나는 ‘기록된 말씀’이고 다른 또 하나는 ‘계시된 말씀’이다.(p21) '선포된 말씀‘이란 말씀이 선포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선포 자체에 이미 대상이 되는 약속을 품고 있다는 말이다.
 
이로서 하나님은 구원여부를 놓고 인간하고 거래하거나 흥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록된 말씀의 내막은 선포를 통해서 비로소 밝혀지며, 선포의 내용은 하나님의 계시뿐이다. 따라서 성경 말씀은 계시가 되는 것이다. 만약에 기록된 성경 말씀 자체만이 유일한 계시라면 교회의 역사 속의 산물이 되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유성과 충돌하게 된다. 인간이 성경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인간을 붙잡으려면(p23) 성경은 필히 자유로운 계시 사건만 만나야 한다.

2. 하나님과 성육신  
바르트의 작업은, 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계시가 어떻게 우리 가운데 주어졌느냐로 나아간다. 그는 한 마디로 말한다. “하나님의 주님으로서 계시하셨다”(p34)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주’개념만 알면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죄, 시간, 성령, 구원, 선택, 예정, 섭리, 율법, 화해, 사랑, 경배, 찬양, 교회, 천국, 언약, 삼위일체 하나님, 칭의, 악마, 세상 등등 그 어떤 개념도 이 ‘주’개념에서 다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다른 이유는 없다. 하나님 당사자께서 그렇게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만약에 ‘주’ 개념이 인간들에게 폐쇄적이라면 교회도 당연히 폐쇄적이어야 하고, ‘주’ 개념이 인간들에게 개방적이라면 교회도 당연히 개방적이어야 한다. 이는 곧 모든 개념이 다 ‘주’개념으로 도로 모아져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즉 인간들 손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육신이 말씀이 된 것도 아니요 인간이 하나님이 된 것도 아니다.(p46) 이는 하나님의 일이 인간들의 손에 맡겨져서는 아니 된다는 말과 같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어디까지나 ‘주’가 아니라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들이 염원하는 화해나 구원은 용납될 수 없다. 성령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한 영은 될 수 있지만 결코 ‘우리의 영’은 아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인해 인간을 보는 인간론을 위한 여지는 생길 수 없다. (p43) 성육신으로 인하여 인간 시간은 이제 그리스도 시간이 되었다.(p44) 시간에 중심점이 생겼다는 말이다.
 
그 중심점으로 인해 구약의 ‘대망의 시간’이 되고 신약은 ‘회상의 시간’이 된다. 그런데 이 두 시간 다 ‘친히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께서 감추고 계신 그런 시간이다. 하나님의 현재는 부활 속에서 성취되었는데(p45) 이로서 현실은 현실을 포착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현실은 성령으로만 포착가능하다. 이 현실 안에서 ‘하나님의 자유’는 ‘인간의 자유’가 된다. 고로 성도는 자유인이다.
 
이 자유 안에서 ‘불경건 자의 칭의’가 일어난다.(p55) 인간이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자유를 인식하고 그 자유의 규정을 받는 곳에서 자기의 자유에 도달한다는 것이 성령 안에서의 신비다.(p56) 이 자유 안에서 사랑은 업적이 아니라 감사다.(p56) 이로서 자기애(自己愛)는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받게 되고 도리어 내가 나를 사랑할 때,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도록 한다.(p58)
 
3. 하나님과 인간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섬으로써 하나님을 인식한다.(p 76) 이로서 하나님 자체보다 하나님께서 내민 관계를 접할 수 있다. 이 관계를 벗어나는 인간이나 세계를 설명할 수는 없다. 즉 누구든지 하나님을 아는 자는 자신을 잃는 그런 관계다.(p 78) 이 관계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에게 대상(이웃)이 되면서도 또한 대립이 된다. 천주교는 이 대립관계를 모르고 ‘존재의 유비’를 주창했다. 즉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적인 유사성이 있다는 주장을 펴는 것이다. 이것은 용서 못할 일이다.(p80) 왜냐하면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자연적 영역에서의 접촉점도 있을 수 없다.
 
성육신은 자연적 영역으로 설명되어질 수 없는 이유는, 성육신에 대한 이해는 예수님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혈육으로 사람과 함께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납득되는 식으로 하나님이 와 계신다는 말은 아니다. 참으로 성육신을 이해할 인간은 ‘그리스도 안’의 인간이 될 경우뿐이다.(p83)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아는 것을 체념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이다. 체념은 하나님의 은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교만이다. 그러니까 반대로 겸손은 체념이 아니다.(pp 84-85) 인간은 인격이 아니라 하나님한테 사랑받고 다시 그 분을 사랑하는 데 근거해서 인간이 인격이 되는 것이다. 곧 주님만이 인격이다.(p 88) 유일한 인격자이신 주님께서 세상을 지었기에 세상의 역사는 그분으로서만 비로소 역사가 된다.(p96)
 
하나님의 영원은 무시간적인 것이 아니다. 제대로 시간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모든 창조가 시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시간의 주님이시다. 그래서 인간은 우리의 시간 안에서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그 분의 시간을 인식하고 경배 드리게 된다.(p 97) 하나님께서 창조의 시간과 은혜의 시간을 주셨다.(p127) 창조의 시간과 은혜의 시간의 차이점은 은혜의 시간 속에는 대립자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창조의 시간이 시간의 원형이 아니라 은혜의 시간이 모든 시간의 원형이다. 기독교 창조론은 어떠한 식으로도 세계관이 될 수 없다. 또한 어떠한 세계관을 뒷받침해 줄 수도 없고 뒷받침 받을 필요도 없다.(p141) 어떠한 세계관도 보증해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창조의 시간은 시간적이지만 비역사학적 시간이다. 그것은 신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신비란 곧 계약이다. 창조는 계약의 외적 근거이며 창조의 내적 근거가 곧 계약이다.(p128) 이로서 역사를 읽으려면 뒤에서 앞으로 읽어야 한다. 은혜의 계약은 성육신이기 때문이다.
 
창조 시간 속에서도 이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나온다. 그 관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어떤 성질이 아니다.(p130) 또한 인간의 소유가 될 수 없다. (p133) 왜냐하면 하나님 쪽에서 내민 관계성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성이 성경 전편에 걸쳐 바닥을 깔게 되는데 그것이 곧 부부라는 비유관계다. 성별의 차이를 통해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관계가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p132)
 
이 부부 관계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님은 짐승까지 동원시켰다. 짐승들이 있는 까닭에 인간은 자기에게 규정되고 자기를 위해 이루어진 도움을 그 자체대로 인식하고 선택하고 긍정하려는 것이다. 이 자유성은 선악과 앞에서도 확인된다. 진정 ‘선다’는 것은 ‘넘어진 ’후에나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p138)
 
이로서 인간관계는 죄로 말미암아 규정되고 죄로 말미암은 그 구조에는 변함이 없다.(p151) 은혜의 시간이란 곧 진짜 인간이란 은혜에 동참하는 죄인이다는 말이다.(p150) 이 은혜의 사건 안에는 대립자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 예수와 인간도 아닌 인간의 대립이다. 하나님의 행위는 인간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다.(p151) “보라, 사람이 있다!”(요 19:5)
 
인간 예수에게는 하나님과 인간은 동일하다. 그 분은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한 존재다.(p157) 인간과 더불어 선택받은 인간이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선 대립자이며 우리 인간은 그 분 앞에서 대립자가 된다.(p156) 인간은 예수와 함께 있기에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인하는 자는 곧 자신을 부인하는 되는 경우를 생각한다면 우선적으로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선택’부터 이해해야 한다.
 
4.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선택에는 하나님의 자유와 하나님의 신비와 하나님의 의(義)가 명시되어 있다. (p99) 이는 곧 이 세 가지를 함유하고 있는 증거는 추상적 논리인 하나님의 전능의지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되고 인간 예수 그리스도에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서는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 선택이 하나의 지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선택받은 인간이시다.(p 100)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셔서 자신의 원수가 된 인간을 위하여 친히 책임지시고 붙잡히었고 그 분이 저버림을 당하고 죽으시는 모든 행위를 자기 자신의 일로 삼으신다. 그리하여 그 분 안에서 참으로 그 사람이 친히 죄인으로 죽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분을 또한 살리셨다.(p102)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을 유기(저버림)를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그러한 뜻에서 볼 때 예정애서 부정(否定)을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어쨌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부정이 아니다. 그러니까 예정을 믿는 신앙 자체는 그야말로 인간이 저버림을 받지 않는다는 신앙이고 인간의 저버림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다.(p 103)
 
이는 예수님에 의하여 그리고 말미암아 수행된 선택이며 이 선택이 바로 당사자인 예수 그리스도한테 일어난 선택이기도 하다. 칼빈의 오류는 예수님을 지나쳐서 하나님 선택과 바로 인간 선택을 연결했기 때문에 선택론에 있어 하나님과 예수님을 분리시켜 버린 것에 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이 다 이루어지기에 선택과 버림(유기) 모두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로 결정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결정이 성립될 경우에만 ‘예수 안에서 예정’(엡 1:4)이 실효적 의미를 가진다. 이 선택으로 인해 악과 악마는 그냥 극복되어버린 힘일 뿐이고 결코 하나님께 대항해서 장난치는 최후의, 실재적 대항자가 못된다.(p103)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결코 순종하는 민족이 아니라 도리어 항거하는 민족으로서 선택하신 것이다.(p192) 교회는 세상에 뭔가 증거하는 단체다. 무엇을 증거하는가? 자기 자신을 넘어섬을 증거하고 만인과 사귐이 가능하게 된 원천을 증거하는 단체다. 교회는 비밀스러운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시다. 이 주님의 선택으로 교회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과 교회 중간에서 양자를 통일하고 구별하고 서 있으신 분은 ‘나사렛 예수님의 영원한 선택 행위’다.(pp104-105) 바르트는 말한다. 하나님의 결심이 예수님의 선택과 동일하다면 교회 공동체의 불신앙을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진지하게 다루지 말라고! 그렇다면 선택받은 증거가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알아채는가? “택한 자체와 저버림 사이의 절대적 구별을 찾으려 하지 말고 불경한 자와 믿는 자의 구별해서 불경한 자와 연대감을 갖고 보면 된다”고. (p107) 신자도 잠재적으로 저버림을 당한 자가 아닌가.
 
이렇게 되면 바르트는 만인구원설을 주장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여기에 대해서 바르트는 이런 사랑 보편주의를 이렇게 본다. “세상이 택함 받았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즉 교회가 외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이지 교회가 하나님의 의지를 결정짓듯이 ‘만인구원론’을 전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의 논리적인 귀결이 하나님의 자유를 대체 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어쨌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저버림 받은 자가 믿고서 신자로서 택함 받은 저버림 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p109)
 
5. 계명과 성도의 삶 
계명은 하나님의 자유다. 이 자유는 명령법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관계 자체를 제시할 뿐이다. 그런데 그 관계란 바로 ‘특정 공간’ 안에서 일어난다. 수직적 사건으로 이해되는 공간인데 이 공간 안에서 수직적인 것이 수평적인 것을 절단할 때만 그것 자체가 수직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 까닭은 모두 어떤 특정한 연관에서 일어나는 유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유일한 성격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자유에의 참여다.(p221)
 
인간이 율법을 통해서 듣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생명의 영의 법이다. 곧 하나님이 자유 영역이다.(p223)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비하와 인간의 올리우심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발생되는 것이 ‘화해의 역사(役事)’다.(p286) 인간들은 하나님 아래 있기를 원치 않았다. 즉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그래서 인간들이 노리는 것은 교만의 칭의요, 태만한 성화요, 기만과 위선 속에의 소명과 사명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주로서 우리를 대신하셨다.(p296)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그분의 책임 하에 두셨다. 그리하여 이제 그분은 짐 지고 비난당하고 유죄판결 받은 자로서 가짜로가 아니라 진짜로 고통을 받으신 분이다. 이런 일이 일어남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죄가 인식된다. 즉 그분이 우리의 자리에 서심으로써 무엇이 우리의 자리인지 결정된 것이다. (p297)
 
그분이 우리에게 취하신 바로 그 죄가 우리 자신의 죄로 보여질 수 있다. 우리에게 죄가 용서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용서의 인식이 우리에게 죄의 인식이 되고 이제 물론 자기 인식이 아니라 하나님 인식 및 그리스도의 인식이 된다.(p297) 죄로부터 자유롭기에 순종이 가능한 것이다. (p299)
 
신앙이란 이처럼 예수님에게서 생긴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불신앙과 만나서 충돌을 일으켰다. 오로지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으로 신앙이 발생된 것이다. 부활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으시므로서 그리스도는 그분의 백성들 없이는 계시지가 않게 되었다. 이는 곧 “예수께서 사신다”는 데는 불가피하게 “그분과 함께 나도”라는 것이 따라간다.(p 308)
 
분명히 신앙은 겸손이다. 그러나 결코 자신의 선택한 겸손은 아니다. 옛 교만을 다시 작동 못한다.(p325) 그것은 과거가 끝장났기 때문이다. 낯선 오늘이 들이닥치는데 그 속에서 성도는 미래를 보장받는다. 그리스도의 역사 속을 질주하는 것이요 운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르트는 ‘도중에 있는 자’라고 표현한다.(p326)
 
성도의 운명이 돌이킬 수가 없는 이유는,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낮추심과 올리우심 때문에 예수님은 ‘지금’과 ‘장차’를 자신을 위해 활짝 열어놓으셨다.(p352)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의 판단이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용서’라는 이름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이로서 신앙은 이 약속에 대한 그냥 대답일 뿐이지 결코 자기 자신을 칭의의 수단으로 제공한 대가를 받는 것이 아니다.(p 329)
 
산상수훈이 전하는 ‘새로운 피조물의 삶’은 옛 피조물의 삶을 건전하게 또 가치 있게 지속시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예수님의 운동이 그 피조물에 안에 살아있기에 나타나는 삶이다. (p381)
 
교회란 결코 그리스도인이 이루지 못한 것을 성경이 이루어놓은 것을 말한다.(p392) 교회는 성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장하고 있는 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 바를 물어야 한다.(p 390) 교회 공동체 자신을 정당하고자 하면 교회는 가장 나쁜 방식으로 불법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p391) 이렇게 되면 율법을 가지고 복음을 몰아내는 일이다.
 
교회란 일반적인 인류애(人類愛)를 상관없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선택하시는 사랑이듯이, 인간의 이차적인 사랑도 택하신 사랑이요 따라서 구별하는 사랑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이란 인간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폐쇄된’ 부류내의 인간을 뜻한다. 이웃은 곧 구속사의 관련으로 규정되어 있다. (p 402) 남과 나의 만남은 예수님 증인 이상의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개방적이고 이웃은 고정적이지 않다.
 
바르트는 마지막으로 말하기를, 성도에게는 영원히 남아 있는 본래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신앙도 희망도 남는다. 그 까닭은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고전 13: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