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칼 바르트 [Barth, Karl]의 신학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3

好學 2012. 3. 20. 20:04

      칼 바르트 [Barth, Karl]신학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3

 

 

3. 1921년(로마서 주석 제2판) 이후의 바르트

스위스의 작은 마을 자펜빌(Safenwil) 교회의 평범한 젊은 목사가 쓴 로마서 주석 제1판은 세인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 탓인지, 바르트는 이 책이 출간된 직후부터 자신의 입각점을 재검토하고, 로마서 주석을 다시 쓰기 시작하였다. 여러 사상가들, 특히 플라톤(Platon), 칸트(Kant), 오버벡(F. Overbeck), 도스토예프스키(Dostoyewski),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 종교개혁자들(Luther, Calvin)의 저서를 읽은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완전히 새롭게 쓰여지고 철저히 논리적으로 재구성된("돌 위에 돌 하나도 얹지 않은") 로마서 주석 제2판은 바르트를 하루 아침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거대한 종소리와 같았고,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놀던 마당에 터진 폭탄과 같았다. 제2판은 제1판에서 인간(교회)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성취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는 여지를 철저히 청산해 버렸고, 제1판보다 더 철저히 인간의 종교와 윤리, 자연적-영적 우주와 대립해 있는 하나님의 독자성, 타자성(他者性), 초월성, 배타성을 강조하였으며, 이에 직면한 인간과 세상, 교회의 위기와 심판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배가 모래 위로 올라가는 것과 같은 위험에 처한 자유주의 신학을 180도 완전히 돌려놓은(나중에 바르트가 술회하였던 것처럼 다소 이교적이고 과격한) 결과를 낳았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시 대신 인간, 인간의 신앙, 경건, 종교, 문화, 정신, 감정, 역사의식을 중심에 둔 신학, 즉 인간이 세운 온갖 우상을 파괴하고 교회를 정화하려던 그의 시도로 인하여 역사와 계시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역사가 계시로서 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역사≠계시), 이젠 계시도 더 이상 역사로서 오지 않는다(계시≠역사).

 

이런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바르트는 여러 가지 표현과 개념들을 빌려왔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 위에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다. 탄젠트 곡선이 선에 무한히 접근하지만 서로 접촉할 수는 없듯이, 계시는 결코 역사가 되지 않는다. 계시와 역사 사이에는 오직 진공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유일한 접촉점인 예수 그리스도마저도 오직 역설적으로만 이해된다(양적-형식적 변증법이 아닌, 질적-내용적 변증법). 예수는 역사적-심리적-종교적 현상이 아니다. 계시는 결코 역사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며, 번개처럼 사라지기 위해 들어온다. 역사 안에는 계시가 머물지 않고, 오직 폐허만을 남길 뿐이다. 계시는 오직 비약, 결단, 역설, 모험적인 신앙 속에서만 파악될 뿐이다. 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적, 은총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인간의 혼합, 인간적인 것의 신적인 고양(高揚), 인간 존재 안의 신적 존재의 주입(注入)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비시간적인 시간, 비공간적인 영역, 불가능한 가능성, 부정 속의 긍정, 시간 속의 영원, 죽음 속의 생명이다. 이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왔다. 그는 역사의 의미이며 시간의 종말이고 오로지 역설(Kierkegaard), 승리자(Blumhardt), 원역사(Overbeck)로서만 이해될 수 있는 자이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단절하는 미지(未知)의 차원이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의 가시성 내에서는 문제꺼리, 신화로서만 이해될 뿐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작은 입자 속에서도 땅에 도래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고상한 형태 속에서도 오지 않았다. 그것은 가까이 왔을 뿐이다. 그것은 선포되고 신앙될 수 있을 뿐이지, 낡은 것의 연속으로서 가까이 온 것은 아니다.

새로운 세계는 가까이 왔지만 어디까지나 영원한 세계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그것의 반사(反射) 안에 있을 뿐이다.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부정적, 불가시적이고 은폐된 것이다. 그것은 이 세계의 소멸, 만물의 종말, 차안의 동요와 소요, 파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제1판과 달리 유기적으로 성장하거나 건설되지 않는다. 볼 수 있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바벨탑일 뿐이다. 우리는 두렵고 떨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나름대로 이룩하려고 노력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머리카락의 넓이만큼도 접촉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원한 순간은 모든 순간들과 비교할 수 없이 대립하고 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시간들과 비교할 수 없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순간들의 초월적 의미, 모든 시간들의 성취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히 배타적으로 하나님 자신만의 일이라고 간주된다. 물론 그것은 우리들을 위해(pro nobis) 일어나지만, 더 이상 우리와 함께(cum nobis), 우리 안에서(in nobis) 일어나지 않고, 우리에게 맞서서(contra nobis) 일어난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혁명, 하나님 나라의 일에 협력하지 못한다. 가장 철저한 혁명조차도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오기는커녕, 단지 기존적인 것을 기존적인 것으로 대체할 뿐이고, 새로운 형태의 악을 불러들인다(인간의 혁명 시도, 특히 레닌 혁명에 대한 비판).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가 여기서 전적인 체념, 윤리적 행동의 상대화, 부르즈와 계급적 반동, 종말론적 비관주의를 장려하자고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세상에 대해 절대적으로 다른 하나님을 통하여 세상을 절대적으로 다르게(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긍정하려고 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활동할 수는 없지만, 기존질서 내에서 사회적 긍정, 억압, 독재에 맞선 개혁정치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준비하고 시위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로마서 주석 제1판에서와 같이 온갖 경직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 속에서 이루어지며, 사회민주주의적 정치 안에서 실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