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칼 바르트 [Barth, Karl]의 신학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2

好學 2012. 3. 19. 21:18

       칼 바르트 [Barth, Karl]신학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2

 

 

2. 1919년(로마서 주석 제1판) 이후의 바르트

바르트는 점차로 스승들의 신학 가운데서 결점을 발견하기 시작하였다. 그에 의하면, '종교적 개인주의'와 '역사적 상대주의'로 요약되는 스승들의 신학은 인식론적 상대주의(相對主義), 신앙적 복수주의(複數主義), 교회의 실천적 당위성의 결핍이라는 문제점을 낳는다. 자유주의 신학은 특히 이론적, 학문적 기능만을 할뿐이지, 교회로 하여금 공동으로 실천하게 만드는 데 무력하며, 신학자로 하여금 실천에 무능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바르트는 절감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자유주의 신학의 진보적, 낙관적 역사관을 뒤흔든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칼 바르트는 그 당시의 경험을 스승들의 신학으로부터 결정적으로 결별하게 된 계기로서 술회했다:

 

그 해(1914년) 8월 초순은 적어도 나에게는 암흑의 날이었다.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이 빌헬름 2세의 전쟁선포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지지서명을 발표했는데, 이 지식인들 중에는 이제까지 숭앙해 왔던 신학스승들의 이름(필자주: 하르낙,제베르크, 헤르만 등)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경악케 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이들의 윤리학과 교의학, 성서해석과 역사관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고, 더욱이 19세기의 신학은 더 이상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점을 절감했다.

 

스승들의 신학은 서구 문화의 부르즈와적, 제국주의적 발전의 종착역인 제1차 세계대전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전쟁신학으로 귀착되었다. 바르트에게 이 전쟁은 낙관적, 진보적인 역사이해를 계시와 적극적으로 연결시키려던 고리의 파탄을 의미했다. 신학과 철학, 교회와 문화, 신앙과 종교의 동맹 위에 세워진 범종말론적인 꿈은 인간의 망상(妄想)으로 드러났다.

바르트에 따르면, 스승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온갖 인간 경험의 술어, 종교체험의 현상으로 오해하였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신의 일에 더 몰두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고 하면서 인간적인 말만 늘어놓았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고 하면서 이것을 새로운 변종의 종교성, 경건, 역사적 현상, 인간성의 현실로 바꾸었다.

 

이 날 이후로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허구적 자유의 체계와 그 이데올로기의 내적 모순, 붕괴와 더불어 절대적인 하나님, 철저히 이 세계에 대하여 낯설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로의 새로운 부름의 소리를 들었다. 이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를 그는 성서 안에서 발견했는데, 이것은 그의 스승들이 가르쳐 주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진기하고 새로운 세계'였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로부터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상대적, 주관적 입각점(도덕의식, 종교체험, 역사의식)으로부터 절대적, 객관적 입각점(인간과 세계에 대해 주체로서 자유로이 대면해 있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으로 돌파하였다. 그 결과로 바르트는 역사를 계시와 동일시하였던 스승들의 신학체계를 무너뜨리게 되었다. 역사는 계시의 그릇이 아니다. 물론 계시는 여전히 역사로서 오지만(계시=역사), 역사는 더 이상 계시로서 오지 않는다(역사≠계시).

 

그의 이런 입장변화는 로마서 주석 제1판(1919년)에 잘 드러난다. 여기서 바르트는 특히 블룸하르트(Chr. Blumhardt)와 토비아스 벡(T. Beck) 등의 영향 아래서 진정한 의미의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그 역사변혁적, 혁명적 특징을 재발견하였다. 이 시대의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까지 존재해 온 제 가능성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진, 발전이 아니라(자유주의 신학의 진보적, 낙관적 하나님의 나라 이해에 대한 부정), 모든 시대들을 관통하며 모든 시대들의 신적 가능성을 출현시키면서 유기적으로 성장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존의 것을 유지하지도 않고(부르즈아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부정), 기존의 것을 파국적으로 끝장내지도 않는다(레닌주의적, 공산주의적 혁명에 대한 부정).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 자신의 나라로서 모든 기존 현실을 통과하면서 모든 신적 성향과 가능성을 실현시키면서 성장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이다. 그 나라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인해 가능해졌고 그의 부활로 인해 현실화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이 왔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씨앗, 변혁된 자연 법칙의 원리, 새로운 세계의 결정핵, 새로운 인간과 사물의 유기체의 시초와 머리, 새로운 창조의 배아(胚芽)로서 죽음을 통하여 낡은 요소를 받아서 새로운 갱신된 세계를 조성해 낸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과 세상 및 인간 사이에서 상실된 유기적 일치 관계를 회복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재건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혁명으로서 모든 혁명의 혁명이다. 그리고 혁명의 능력은 하나님의 영이다. 이 영은 기존 현실을 파괴하지도 않고 보존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철저히 변혁시킨다. 여기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나라를 모든 종류의 인간적 혁명 혹은 개혁의 시도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저항운동으로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혁명은 아무리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낡은 나라를 대변할 뿐이지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가 하나님 나라의 혁명을 위한 인간의 협력이나 참여조차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혁명은 물론 우리 밖에서(extra nos) 시작하지만, 우리 안에서(in nobis) 우리와 함께(cum nobis) 일어난다. 하나님은 아래로부터 활동하시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이다. 하나님은 지배구조 아래서 고통당하는 하층민들의 편을 들면서 억압받는 자들에게 활약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인간소외, 인간의 우상생산(국가, 맘몬, 인물, 예술, 학문, 교회, 미덕 등의 우상화), 인간의 물화(物化)와 주인없는 권세들(자본, 국가, 군국주의)의 지배에 맞선 하나님 나라의 혁명에 길들여짐으로써, 하나님의 혁명에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사회민주주의 안의 정치적 참여 속에서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