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칼 바르트 [Barth, Karl]의 신학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1

好學 2012. 3. 18. 21:15

     칼 바르트 [Barth, Karl]신학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1

  

(1999.10.11/장로회신학대학원 특강)

 

들어가는 말

올해는 칼 바르트가 서거한 지 어언 31년이 된다(1886-1968). 우리 말로 "강산이 세번 바뀌었다" 할 정도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이 지나갔다. 그는 아직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가? 말하고 있다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는 이미 살아 있을 때부터 교부(敎父)라는 명예로운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온 세계로부터 크나큰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들의 명단을 작성할 때, 어거스틴과 아퀴나스, 루터와 칼빈, 슐라이어마허 다음으로 칼 바르트를 열거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맑스와 야스퍼스와 함께 또 하나의 위대한 칼(Karl)인 그를 말하기도 한다.

박사학위를 정식으로 취득하지 않았으면서도 세계의 유수한 15개 이상의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를 받은 인물이라는 것으로써 그의 위대함이 온전히 평가되지는 않을 것이다. 기독교 신학사에서 불후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그의 미완성 교의학(Kirchliche Dogmatik: 13권)의 어마어마한 분량(9,185쪽)으로도 그의 중요성을 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로 부피가 크고 깨알같은 글자가 많은 이 책의 분량을 일반적인 크기의 책 부피로 계산한다면, 아마도 2-3만쪽은 충분히 될 것이다. 그가 쓴 글의 목록으로도 한 권의 책이 된다.

 

이런 외형적인 부피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바르트의 신학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를 느끼게 된다. 그의 저서의 분량 앞에 기가 질리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하물며 그의 신학의 깊이와 방대함, 복잡하고 긴 문장표현, 때로는 과격하고 때로는 세밀한 내용적, 구조적 변화를 정확히 추적한다는 것은 어쩌면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는 일보다도 더 위험하고 무모한 일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러니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듯, 대충 보고들은 몇 마디 말로 "이것이 바르트다"고 말하는 것은 바르트를 모독하고 자신을 우상화하는 짓이다.

하지만 장님이라도 그를 더듬을 권리가 있고, 더욱이 그가 던진 도전을 받아야 할 임무가 우리 앞에 있지 않는가? 길목을 막고 버티어 선 이 거대한 바위를 우리가 감히 지고 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피해 갈 수는 없지 않는가? 우리의 연약한 팔로는 도저히 깨뜨려 버릴 순 없다고 하더라도, 바위 틈에 작은 구멍을 내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소중한 파편을 우리가 살 집을 짓는 재료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바르트를 말하지 않고 어찌 현대신학을 논하겠으며, 더욱이 미래의 신학을 논하겠는가?

 

그런데 현대의 신학자들, 특히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 등을 말하는 사람들이 "바르트의 신학은 이미 낡았다"고 성급히 말하는 것을 가끔 듣곤 한다. 그리고 요즘에는 "바르트의 신학은 포스트모던(현대이후)적 패러다임에 의해 추월당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과연 그러한지는 차차 밝혀야 할 일이지만, 이들은 대개 바르트 신학이 얼마나 거대한 수원지와 같고 얼마나 장대한 폭포와 같은지 제대로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극복되지 못한 열등감이나 과시적인 우월감 때문에 이런 성급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나도 물론 바르트에 관해 조금 밖에 눈을 뜨지 못한 반(半)장님이다. 그러므로 나도 그를 온전히 알았다고 말할 자격이 없고, 그래서 여러분 앞에 어떤 완벽한 정답을 제시할 능력도 없다. 더욱이 단숨에 고래를 낚아 올릴 도구가 있을 리도 없다. 튀빙엔 대학에서 제출한 나의 박사학위논문(Gestalt und Entwicklung der Ekklesiologie K. Barhts)에서 나는 바르트의 교회론을 중심으로 그의 신학의 구조와 변화를 추적해 보았지만, 지금도 꼭 그리해야 할 필요는 없다. 물론 '교회론'은 그의 신학을 가장 많이 관통하는 실이요, 그래서 아직도 그의 신학을 가장 포괄적으로 꿰맬 수 있는 바늘이다. 하지만 오늘은 '하나님의 나라'와 '역사와 계시'라는 두 관점으로 그의 신학지평을 조금 더 열어 보이려고 한다.

 

1. 1914년 이전의 바르트

1914년 이전의 바르트는 전적으로 그의 스승들이 물려준 소위 '자유주의 신학'(Liberale Theologie)의 영향 아래 있었다. 사람들은 종종 이 신학을 일컬어 '문화개신교'(Kulturprotestantismus)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신학은 기독교에서 이른바 낡은 형이상학적 교리의 외피를 벗기고, 기독교를 근대의 문화와 종합하려는 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신학은 문화와 신학, 철학과 신학, 종교와 계시, 역사와 하나님의 나라를 종합하려는 의식 속에 수행되었다. 그리하여 이 신학은 자기 나름대로의 기독교적 경건성을 지닌 채 한 세기 이상 교회와 신학의 심성을 지배했다. 이 신학의 특징은 이 신학의 가장 분명한 대변자라고 일컬어지는 슐라이어마허, 리츨 그리고 헤르만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 1768-1834)는 자연적 세계 안에서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 이상(理想)이 문화의 진보 이상과 범인과성(汎因果性)의 메카니즘의 형태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원인성(原因性)은 신의식(神意識)으로 경험되는 절대의존의 감정인 직접적 자의식 속에서 드러난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하나님과 인간이 일치되는 것이 인류의 역사의 목표인데, 이 일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범적으로 일어나서 인류에게 파급된다.

리츨(A. Ritschl, 1822-1889)은 기독교를 정신적, 윤리적으로 이해하였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세계 안에서 성장, 진보하며, 이 목표는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 목표로 주어진다. 이 목표는 인간이 최고의 윤리적 공동체 안에서 정신화됨으로써 실현된다. 예수는 윤리적으로 완전한 인류의 원형, 모범으로서 이 세상 안에 이러한 이상을 제시하여 인간 안에서 이 이상을 실현시킨다.

 

헤르만(W. Herrmann, 1846-1922)은 슐라이어마허와 리츨의 요소를 결합하여, 예수가 인간에게 주는 인상(印象), 인격의 힘, 인격의 상(象)과 같은 경험의 요소와 예수의 의와 사랑의 계명을 종합하였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인격의 힘에 사로잡힌 자들의 의지의 친교, 공동체 위에 세워진 것으로서 인간에게 시작된다.

이러한 현대학파의 충실한 추종자였던 젊은 시절의 바르트는 이들의 가르침에 따라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역사적 현상이나 압도적으로 종교적, 도덕적인 특징을 띤 내적인 체험의 사건으로 보았다. 바르트는 이 신학의 근본사고가 인간중심적인 것이라고 보았고, 스승들로부터 물려받은 학습의 내용을 '종교적 개인주의'와 '역사적 상대주의'라는 공통분모로 요약된다고 보았다.

 

바르트의 스승들의 신학에서 역사(역사의식, 경건, 도덕, 체험)는 계시의 술어(述語)일 뿐만 아니라 그 주어(主語)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계시는 역사로서 일어날 뿐만 아니라(계시=역사), 역사는 계시로서 나타난다(역사=계시).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 그 자체가 아니라 계시의 모범, 원형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역사 속에서 모형적으로 반복될 수 있다. 그는 구원의 모델이지, 구원자 그 자체는 아니다. 계시는 역사를 통해 중재될 뿐 아니라 역사 그 자체로 나타나며, 인간의 역사는 계몽과 교육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진보, 발전한다.

 

바르트의 스승들이 구상한 하나님 나라의 이상에 따르면, 인류사의 목표는 완성된 인간성, 도덕성, 이성의 목적을 보편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었다. 그들이 꿈꾼 '범종말론적인 꿈'(Paneschatologischer Traum)은 역사에 대한 진보적, 낙관적 이해를 바탕으로 삼고 있었으며, 비록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 나라의 피안성을 인정하고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실현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세계 내의 인간의 가능성에 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