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칼 바르트 [Barth, Karl] - 6 '하나님의 나라' 이해

好學 2012. 3. 18. 21:13

      칼 바르트 [Barth, Karl] - 6 '하나님의 나라' 이해 

 

 

                            

 

Ⅲ. 바르트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

 

⑴ 로마서 주석 제1판(1919)

로마서 주석 제1판에서 바르트는 특히 블룸하르트와 튀빙엔 대학의 천년왕국적 종말론자 토비아스 벡(T. Beck) 등의 영향 아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유기적인 새 창조로 이해했다. 이 나라는 지금까지 존재해 온 제 가능성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진이나 발전이 아니라(자유주의 신학의 진보적?낙관적 하나님의 나라 이해에 대한 부정!), 모든 시대들을 관통하며 모든 시대들의 신적 가능성을 출현시키면서 유기적으로 성장한다.

 이 나라는 기존의 것을 유지하거나 거기에서 안정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며(부르즈아적?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부정!), 또 그렇다고해서 기존의 것을 파국적으로 제거하지도 않는다(레닌주의적?공산주의적 혁명에 대한 부정!).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 자신의 나라로서 모든 기존 현실을 관통하며 모든 신적 성향과 가능성을 실현시키면서 성장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이다. 그 나라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인해 가능해졌고 그의 부활로 인해 현실화되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이 왔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화되었는가?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씨앗, 변혁된 자연 법칙의 원리, 새로운 세계의 결정핵, 새로운 인간과 사물의 유기체의 시초와 머리, 새로운 창조의 배아(씨앗)로서 죽음을 통하여 낡은 요소를 받아서 새로운 갱신된 세계를 조성해 낸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과 세상 및 인간 사이에서 상실된 유기적 일치 관계를 회복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재건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혁명으로서 모든 혁명의 혁명이다. 그리고 혁명의 능력은 하나님의 영이다. 이 영은 기존 현실을 파괴하지도 않고 보존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철저히 변혁시킨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나라를 모든 종류의 인간적 혁명 혹은 개혁의 시도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저항운동으로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혁명은 아무리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낡은 나라를 대변할 뿐이지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가 로마서 주석 제1판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혁명을 위한 인간의 협력이나 참여조차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혁명은 물론 우리 밖에서(extra nos) 시작하지만, 우리 안에서(in nobis) 우리와 함께(cum nobis) 일어난다. 하나님은 아래로부터 활동하시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이다. 하나님은 지배구조 아래서 고통당하는 하층민들의 편을 들면서 억압받는 자들에게 활약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인간소외, 인간의 우상생산(국가, 맘몬, 인물, 예술, 학문, 교회, 미덕 등의 우상화), 인간의 물화(物化)와 주인없는 권세들(자본, 국가, 군국주의)의 지배에 맞선 하나님 나라의 혁명에 길들여짐으로써, 하나님의 혁명에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사회민주주의 안의 정치적 참여 속에서 이루어진다.

 

⑵ 로마서 주석 제2판(1921)

로마서 주석 제2판은 완전히 새롭게 쓰여지고 철저히 논리적으로 구성된 것으로서, 바르트를 하루 아침에 유명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로마서 주석을 다시 개작하게 된 동기는 특히 여러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접한 것에 있다. 오버벡(F. Overbeck)의 원역사(Ur-geschichte)의 개념으로부터 바르트는 역사적 회의주의를 배웠고(역사에는 무상과 타락의 법이 존재한다. 기독교는 초시간적이다), 도스토예프스키(Dostoyewski)의 소설들에서 바르트는 인간의 악마성, 진리의 파라독스적 성격, 기존 현실에 대한 철저한 회의 등을 수용했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로부터 바르트는 많은 상징적 표현문구들만이 아니라 진리의 실존적?역설적 성격, 하나님과 인간의 철저한 구분, 계시의 순간적?사건적 성격 등을 배웠다. 그 밖에도 바르트는 플라톤(Platon), 칸트(Kant) 및 종교개혁자들(Luther, Calvin) 등으로부터도 새로운 통찰을 획득했다.

 

그리하여 바르트는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의 철저한 초월성, 이질성, 배타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인간의 혼합, 인간적인 것의 신적인 고양(高揚), 인간 존재 안의 신적 존재의 개입(介入)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비시간적인 시간, 비공간적인 영역, 불가능한 가능성, 부정 속의 긍정, 시간 속의 영원, 죽음 속의 생명이다. 이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왔다.

그는 역사의 의미이며 시간의 종말이고 오로지 역설(Kierkegaard), 승리자(Blumhardt), 원역사(Overbeck)로서만 이해될 수 있는 자이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단절시키는 미지의 차원이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의 가시성 내에서는 문제꺼리, 신화로서만 이해될 뿐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작은 입자 속에서도 땅에 도래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고상한 형태 속에서도 오지 않았다. 그것은 가까이 왔을 뿐이다. 그것은 선포되고 신앙될 수 있을 뿐, 낡은 것의 연속으로서 가까이 온 것은 아니다. 새로운 세계는 가까이 왔지만 어디까지나 영원한 세계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그것의 반사(反射) 안에 있을 뿐이다.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부정적, 불가시적이고 은폐된 것이다. 그것은 이 세계의 소멸, 만물의 종말, 차안의 동요와 소요, 파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유기적으로 성장하거나 건설되어지지 않는다. 그처럼 볼 수 있는 나라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바벨탑일 뿐이다. 우리는 두렵고 떨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나름대로 이룩하려고 노력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머리카락의 넓이 만큼도 접촉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원한 순간은 모든 순간들과 비교할 수 없이 대립하고 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시간들과 비교할 수 없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순간들의 초월적 의미, 모든 시간들의 성취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히 배타적으로 하나님 자신만의 일이라고 간주된다. 물론 그것은 우리들을 위해(pro nobis) 일어나지만,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맞서서(contra nobis) 일어난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혁명, 하나님 나라의 일에 협력하지 못한다. 가장 철저한 혁명조차도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오기는 커녕, 단지 기존적인 것을 기존적인 것으로 대체할 뿐이고, 새로운 형태의 악을 불러 들인다.(레닌혁명 비판!).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가 여기서 전적인 체념, 윤리적 행동의 상대화, 부르즈와 계급적 반동, 종말론적 비관주의를 장려하자고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세상에 대해 절대적으로 다른 하나님을 통하여 세상을 절대적으로 다르게(새롭게)하는 하나님의 활동을 긍정하려고 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활동할 수는 없지만, 기존질서 내에서 사회적 긍정, 억압, 독재에 맞선 개혁정치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준비하고 시위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로마서주석 제1판에서와 같이 온갖 경직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 속에서 이루어지며, 사회민주주의적 정치 안에서 실천된다.

 

⑶ 교의학 시대(1932-1968)

로마서 주석 제2판은 신학과 철학, 하나님과 인간을 종합하려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작업마당을 폭파한 효력을 끼쳤다. 인간이 생산해 내는 온갖 우상을 파괴하고 성전을 더럽히는 온갖 혼합주의를 축출하는 데 큰 공로를 세운 이 책은 잠자는 뭇 그리스도인들을 깨우는 닭소리, 종소리가 되었고, 인간으로 하여금 무상한 것을 절대화하려는 시도로부터 결별하여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은혜로운 하나님 앞에서 전율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 책은 로마서 주석 제1판과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의 위기에 촛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폐허, 진공을 남기는 듯 하였고, 시간-영원의 변증법이 하나님의 나라의 희망에 대한 기대를 채워 주기에는 너무 인색한 것 같았다.

 

머지 않아 바르트는 괴팅 대학의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고, 여기서 종교개혁자들의 유산을 더욱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이전 체계를 심화?수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변증법적?수직적 종말론의 체계는 다시금 그리스도 중심적 관점 아래서 성서적?수평적 종말론의 체계에 의해 대체?수정되어 나가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전환은 '바르멘 신학선언'의 제3항("... 교회는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살고 있고…")과 자신의 고백(KDⅡ/1, 716 이하: "...나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피안성을 진지하게 여기느라 하나님의 오심 그 자체를 소홀히 여겼다... 어떻게 내가... 시간에 속하는 목적론(Teleologie), 진정한 종국을 향한 그 출발을 온갖 기교와 능변을 부려서 간과했는지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 종말론적 전환 자체가... 반동으로서는 너무 강했다. 즉 독단적이고 전제적이었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전의 체계에서도 그러했지만, 특히 화해론에서는 더욱 분명하고도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구상되고 설명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진 지배, 그분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인격 안에서 온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리고 바르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화해를 하나님의 혁명이라고 부르는데, 이 혁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의 돌입이다.

이 하나님 나라의 돌입, 하나님의 혁명은 인간과 세계의 급진적?전체적?보편적 변혁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참 혁명가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 나라의 혁명은 사회집단과 관습에 맞선 충돌 안에서 일어나서 모든 인간들의 상황변혁을 목표로 삼는다. 그렇지만 이 혁명은 율법적 강요의 전체주의 속에서가 아니라 은총의 전체주의 속에서 일어난다. 이 혁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인간도 변혁의 주체가 되도록, 하나님의 투쟁에 참여하도록 부름받는다. 이 투쟁은 특히 인간의 소외, 물화, 관료주의화, 억압에 맞선 행동 속에서 구체화되며, 이 행동은 사회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사회, 화해된 사회를 위한 실천 속에서 이루어진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선행적 형태, 비유, 반영, 복사로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지시하고 이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혁명인 화해의 인식으로부터 유래했기 때문에, 사회의 부정적 요소들에 대한 비판적 역할과 더 나은 사회질서의 수립을 위한 건설적인 역할을 통하여 사회변혁을 위한 적합성을 실증할 수 있다. 교회는 이론적?실천적으로 더 나은 화해된 질서를 향해 진군하는 전위대, 선구자로서 자신을 입증할 수 있고 또 입증해야 한다. 그렇지만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적합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비록 주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세속적인 휴매니티, 우주의 빛들과 진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매개하며, 사회민주주의는 인간적?정치적 세속성의 진정한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의 반사로 입증된다. 왜냐하면 사회민주주의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의 정치적 차원과 내용적인 공통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혁명에의 인간참여는 특히 사회민주주의 안에서의 영속적 체제변혁, 영속적 개혁정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Ⅳ. 맺는 말

바르트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일평생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려고 힘썼고, 예수의 실천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 신학을 실천영역에 옮겨 놓고 스스로 실천해 보려고 애썼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사망 직전에도 그의 친구 투르나이젠과의 마지막 통화에서도 "...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렇지만 바르트는 자신을 결코 절대화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복음을 새로이 가리키는 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세례요한의 손 이상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하나님과 이웃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나름대로 노력한 것을 나중의 사람들이 훨씬 더 잘해 주길 바랬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 신학을 어떻게 더 수정?심화할 수 있었을런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그는 다른 내용으로 이를 채우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는 마지막 해답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서 하나님의 나라 신학은 무엇이고, 하나님 나라의 일은 무엇인가? 바르트는 그의 대답을 통해서 보다는 오히려 이런 질문을 통하여 훨씬 더 가까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