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칼 바르트 [Barth, Karl] - 5 '하나님의 나라' 이해

好學 2012. 3. 18. 21:12

    칼 바르트 [Barth, Karl] - 5  '하나님의 나라' 이해 

                             

     

 

Ⅰ. 들어가는 말

 

칼 바르트는 1909년에 쓴 그의 짧은 논문 '현대신학과 하나님 나라의 일'(Moderne Theologie und Reichgottesarbeit)에서 현대신학 즉 그 당대의 이른바 문화개신교주의, 신개신교주의, 혹은 자유주의 신학의 주요특징을 요약하고(종교적 개인주의, 역사적 상대주의), 이 신학이 갖는 문제점으로서 인식의 상대성, 신앙표상의 복수주의 및 실천관련성의 결핍, 다시 말하자면 공동적이고도 일관적인 실천능력의 부재를 지적한 적이 있다. 이 논문에서 바르트는 그 당대의 신학의 이론적?실천적 한계성을 통찰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을 암중모색하려고 고민했음을 엿볼 수 있다.

 

본인도 여기서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을 이론적?실천적으로 분석하고 검증한 방식대로 그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를 그 이론적?실천적 관점 아래서 규명해 보고자 한다. 그는 과연 그 이전의 신학이 갖는 이론적 문제점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는가? 그는 과연 그의 신학을 통하여 교회가 다함께 일관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든든한 실천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바르트의 '하나님의 나라 신학과 그 일'의 상관성을 추적하는 데 촛점을 맞추기로 하자.

 

Ⅱ. 신학사적 분기점

 

바르트의 하나님의 나라 신학과 그 이전의 하나님이 나라 신학을 확연히 구분하는 분기점은 무엇이며, 무엇이 바르트로 하여금 그의 스승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로부터 갈라서게 만들었는가? 이 문제의 해명은 바르트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기획된 새로운 정통주의(Neo-Orthodoxie) 신학을 이해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조건이 될 뿐만 아니라, 바르트 자신의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관건이 된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는 종교적-신학적 개념(표상,상징)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신학적 개념이기도 하기 때문에, 바르트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를 규명하기 이해서는 그의 신학을 새롭게 태동시키게 만든 신학사적 분기점을 확인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⑴ 이른바 '철저한 종말론'(Konsequente Eschatologie)에 의한 종래의 하나님의 나라 신학의 철저한 해체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이 구상한 하나님 나라의 꿈과 이상은 중세기의 천년왕국 사상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레씽(Lessing) 이래로 특히 독일남부 쉬바벤 지방의 성서주의(Biblizismus)의 구원사 신학으로부터도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인데, 이 새로운 신학적?철학적 천년왕국의 인류사적 구상에 따르면, 인류사의 목표는 완성된 인간성, 도덕성, 이성의 목적을 보편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었다. 신학이 철학과 손을 맞잡고 만들어 놓은 '범종말론적 꿈'(Paneschatologischer Traum)은 역사에 대한 진보적?낙관적 이해를 바탕으로 삼고 있었으며, 비록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 나라의 피안성을 인정하고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실현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세계 내의 인간의 가능성에 두고 있었다(낙관적 인간이해). 칸트(I. Kant)가 '최고선'의 이상을 하나님의 나라와 분명히 동일시한 이래로 철학과 신학의 공생(共生)을 위한 전제조건이 마련되었으며, 양자 간의 돈독한 연대 관계는 특히 하나님 나라의 보편적인 궁극적 목표를 바라보면서 시민계급의 직업윤리를 세우려고 한 리츨(A. Ritschl)의 시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 같이 보였다.

 

철학과 신학, 종교와 문화, 신과 인간의 종합(Synthese) 위에 세워진 천년 왕국적 이상은 리츨의 사위인 바이쓰(1865-1914)에 의해 철저히 문제시되었다. 신학사의 지축을 뒤흔든 바이쓰의 연구(Die Predigt Jesu vom Reich Gottes, 1892)는 비록 67페이지라는 작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신학사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저서가 되었고, 옛것의 종말과 새것의 시작을 가져왔다. 바이쓰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가 이해한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적으로 초세계적 실재로서... 이 세계와 배타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다... 예수의 사고 범주 안에는 하나님 나라의 세계 내재적 진보에 관한 말이 전혀 존재할 수가 없다.

 

이로써 종말론적?묵시적 하나님 나라 이해는 종교적-윤리적 욕구와 철저히 대립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 표상은 세계내재적 진보의 목표와는 오로지 대립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세상과 공통되는 것이라곤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고, 그의 한 발은 이미 미래적인 것 속에 서 있다. 이로써 예수는 산상설교의 도덕교사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메시지를 가진 묵시문학적 열광주의자가 되었다.

쉬바이쳐(A. Schweitzer)에게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서 예수는 더이상 단지 당대의 종말론의 대변자가 된 것만이 아니라, 종말론적?묵시문학적 각본의 배우로서 심리적으로 이해되었다 :

"사방이 고요했다. 거기에 세례요한이 나타나서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친다. 곧 그 뒤를 이어 스스로 와야 할 인자로 자각한 예수가 세계의 수레바퀴의 살에 끼워져서 그것을 움직이며 마지막 회전을 시키고 일반 세계사의 종말을 가져 오려고 한다. 그러나 바퀴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그는 거기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바퀴는 그대로 돌고 그는 갈기갈기 찢겨졌다. 그는 종말을 가져오는 대신에 그것을 파괴했다. 그런데 세계라고 하는 수레 바퀴는 계속 돌아가고, 자신이 인류의 영적 지배자이며 인류역사를 자기의 목적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강하고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사람의 갈기갈기 찢겨진 시체의 조각들이 아직도 그 수레바퀴에 매달려 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승리이며 통치이다."

 

바이쓰와 쉬바이쳐가 주창한 소위 '철저한 종말론(Konsequente Eschatologie)은, 비록 참으로 철저하지 못했지만, 즉 철저히 종말론을 붙들고 나가지 못하고 이를 결정적으로 극복, 폐기하고 다시금 자유주의의 예수상으로 돌아갔지만, 기독교에 대한 종말론의 중심적 의미의 발견은 최근의 개신교 신학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 중의 하나로서 충격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었고, 기독교에 위기의식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신학, 교회와 경건, 신앙의 터전을 흔드는 지진과 같았고, "홍수가 나고 제방이 무너지는 것"(M. 켈러)과 같았다.

 

⑵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한 자유주의적?이상주의적 문화의 결정적 붕괴(윤리적 실패)

자유주의 신학의 진보적?낙관적 천년왕국의 지축을 뒤흔든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칼 바르트는 그 당시의 경험을 스승들의 신학으로부터 결정적으로 결별하게 된 계기로서 술회했다:

"그 해(1914년) 8월 초순은 적어도 나에게는 암흑의 날이었다.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이 빌헬름 2세의 전쟁선포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지지서명을 발표했는데, 이 지식인들 중에는 이제까지 숭앙해 왔던 신학스승들의 이름(필자주:하르낙,제베르크, 헤르만 등)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경악케 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이들의 윤리학과 교의학, 성서해석과 역사관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고, 더우기 19세기의 신학은 더 이상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점을 절감했다."

 

바르트의 스승의 하나님 나라의 신학은 결국엔 독일의 이기주의적 영토확장을 뒷받침해주는 세상 나라의 전쟁신학으로 귀착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신학의 필연적 귀결이요, 그 이론적?실천적 실패의 징후였다. "자유주의의 역사는 미로였고 사도(邪道)와 미궁의 역사였다. 그 힘은 모순과 상호파괴에 이르기까지 자유로이 뛰놀았다."

이 날 이후로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허구적 자유의 체계와 그 이데올로기의 내적 모순, 붕괴와 더불어 절대적인 하나님, 철저히 이 세계에 대하여 낯설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에로의 새로운 부름의 소리를 들었다. 이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를 그는 성서 안에서 발견했는데, 이것은 그의 스승들이 가르쳐 주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진기하고 새로운 세계'였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로부터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상대적?주관적 입각점(도덕의식, 종교체험, 역사의식)으로부터 절대적?객관적 입각점(인간과 세계에 대해 주체로서 자유로이 대면해 있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으로 돌파함으로써, 옛 신학의 잔해를 딛고 새 신학의 장을 열게 되었다.

 

⑶ 블룸하르트 부자(父子)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돌입

앞의 두 사건 만큼 그렇게 떠들석하게 대지각 변동을 일으킨 사건으로서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서서히 한 곳에서 지각균열을 일으키면서 마침내는 온 지각을 뒤엎었던 사건의 하나는 바로 블룸하르트 부자가 일으킨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다. 소위 자유주의 신학의 붕괴를 딛고, 아니 그 붕괴에 가속력을 주면서 등장한 이른바 변증법(혹은 신정통주의) 신학의 대변자들 중에서 그들의 영향을 직접?간접적으로 받지 않은 자들은 드물다. 마트뮐러는 말했다:

"종교사회주의와 변증법 신학이라는 20세기의 스위스에 탄생한 저 위대한 신학운동은 그 공통의 뿌리를 받 볼(Bad Boll)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변증법 신학운동을 흔히 "하나의 블룸하르트 운동"(Eine Blumhardtsbewegung)이라고 부른다. 블룸하르트 부자가 찾고 구하고 증언한 하나님은 새로운 행위와 능력과 계시를 기대할 수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단순히 개개의 인간의 영혼 속이나 먼 하늘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고 그리고 우선적으로 인간의 생활 속에, 바로 이 지상의 인간의 실생활 속에서 찾고 기대하려고 했다.

 

아버지 블룸하르트(J. Chr. Blumhardt)는 뜻하지 않는 악귀 추방의 경험을 겪은 이후로 카리스마적 목사가 되었는데, 그 이후로 그는 계속되는 회개와 치유의 역사의 한 복판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악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 간의 투쟁, 승리자인 예수를 생생하게 증거하고 실천했다. 그의 목회를 이어받은 아들 블룸하르트(Chr. Blumhardt)는 점차 부친의 수직적 하나님 나라 이해에 수평적 하나님 나라 이해를 결부시켰고,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이 땅 위의 이상(사회주의적 삶의 방식)과 결합시켰다. 그의 메시지와 활동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철저한 기다림과 적극적인 서두름,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의 돌입과 이를 준비하고 촉진하며 이에 협력하는 인간의 역사변혁적 행동, 하나님 인식과 하나님 나라의 희망이 묘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전적인 갱신자로서의 하나님, 이 세계를 위한 희망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의 메시지는 바르트에게(그를 비롯하여 투르나이젠, 브룬너, 쿠터, 라가츠 등에게도) 심원한 자극과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