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인천]역사이야기

인천이야기 - 전화

好學 2012. 2. 11. 18:38

인천이야기-전화

 

우리 나라에 전화기가 처음 소개된 것은 1882년 3월이었다. 청국에 파견되었던 유학생 38명 중 톈진(天津) 소재 남국 전기창에서 전기학을 공부하던 상운(尙澐)이 인천 제물포항으로 귀국하면서 2대를 갖고 왔다. 당시에는 이 개화의 이기(利器)를 '다리풍'( 釐風) 또는 '덕률풍'(德律風)이라 불렸는데 이는 영어 '텔레폰'에서 음만 취해온 가차명이었다. 나중에는 '말을 전하는 통'이라는 뜻으로 어화통 혹는 전어통이라고도 했다.

 

정식으로 전화기를 도입한 것은 그 한참 뒤인 1894년 1월이었다. 궁내부(宮內府·대한제국 때 황실 관리를 맡아보던 관청) 전화를 설치하기 위해 정부가 일본 동경에 주문을 했다. 같은 달 26일 일본 상선 비후환(肥後丸)이 전화기와 운용 시설들을 싣고 입항하자 정부는 인천해관에 면세 조치를 시달하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3월 1일, 한성전보총국은 전화기 시험과 이를 축하하는 연회를 베풀어 참관인들의 탄성을 자아냈으나 정작 전화 가설은 동학군의 봉기 등 어수선한 정세로 실현되지 않았다.

 

궁내부의 전화가 비로소 개통된 것은 그로부터 4년 뒤였다. 1898년 1월 28일 인천항 감리가 “오후 3시에 영국 범선 3척이 입항할 것”이라고 외아문(外衙門)에 전화로 보고한 정부의 기록으로 보아 서울~인천간의 전화가 그 이전에 이미 개통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궁궐과 인천에 우리 나라 최초의 관용 전화가 동시에 설치된 것은 그 지정적 위치가 중차대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전화는 어디까지나 관용이었다. 일반인이 전화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1902년 3월 20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인천 주재 일본영사관 소속 재외우편국이 불법으로 인천~서울간에 전화를 가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우리 통신원이 이날을 기해 서둘러 사업을 개시한 것이다. 이로써 인천은 관용, 공중용 전화가 최초로 가설된 전화 사업의 시발지로 우뚝 서게 되었고 이듬해부터는 인천전화소에서 자체적인 교환 업무를 시작해 민간인들도 혜택을 누리게 됐다.

그러나 전화 덕을 가장 뼈저리게 느낀 이는 백범 김구 선생이었을 것 같다. 명성황후 시해범인 일본군 중위를 살해한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인천감리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천재일우로 죽음을 면했다. 승지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뒤늦게 전해들은 고종 황제가 “오히려 상을 줄 일이다”며 사형 집행 두어 시간 전에 친히 인천으로 전화를 걸어 감형을 명했던 것이다. 훗날의 독립 운동을 전화가 결정적으로 도운 셈이었다.

 

반면 요즘의 전화는 그 쓰임새가 말이 아닌 것 같다. 전화기 자체는 자석식, 공전식, 자동식에서 DDD를 거쳐 최첨단의 휴대폰 시대를 열었지만 초상권을 침해하기 일쑤요, 전화 사기마저 극성이다. ARS 서비스를 이용해 돈을 갈취하질 않나 낯뜨거운 문자 광고가 무시로 뻔뻔한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통화중 상소리를 하거나 심한 다툼을 벌이면 교환수가 통화를 정지시켰던 그 옛날이 오히려 돌이켜지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