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칼 바르트 [Barth, Karl] - 4 생애와 신학

好學 2012. 3. 18. 21:10

 

    칼 바르트[Barth, Karl] - 4 생애와 신학 

 

 

하나님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충만함은 피조적 생명과의 조화를 향하여 기우러져 있다. 더욱이 하나님은 자기의 자유에 매여 있지 않고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이 나와 이 세상과의 진정한 교제로 들어가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심오한 조화에 도달한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피조물들과 연합이라는 이러한 의욕과 결심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근거와 기초로 보았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예수의 성육신, 죽음 그리고 부활 안에서 세상과 언약적 교제를 맺으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이렇게 바르트는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 뒤에 어떤 하나님도 감추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분은 우리가 없는 하나님이기를 원치 않으며 ... 오히려 우리와 함께 나누기 위하여, 즉 우리의 존재와 삶의 행위 안에서 그 분의 비길 데 없는 존재와 삶의 행위를 나누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다(교의학 IV-1, 7)."

 

선택의 교리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들어온 최고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죄악된 인류가 충분히 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진노와 배척을 짊어지고 '먼 나라'로 들어간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게 선택받은 자이자 배척받은(저주받은) 자이고, 그 외에 모든 사람들은 그 분 안에 포함되며 그 분은 대표가 된다. "모든 사람들이 불러일으킨 하나님의 배척, 모든 사람들에게 놓인 하나님의 진노,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하는 죽음을, 하나님은 사람들에 대한 그 분의 사랑을 인하여 영원 전부터 자신에게로 돌려놓고 그 안에서 그들을 사랑하고 택하며, 예수를 필두로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예수를 택한다(교의학 II-2, 123)."

 

이와 같이 바르트의 신학은 그리스도 일원론적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선택이자 유기의 유일한 대상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뜻인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 선택, 구원, 생명을 허락하고, 자신에게는 ... 배척, 파멸, 죽음을 돌렸다(교의학 II-2, 163)." 곧 바르트에게 있어서 예정이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자신에게 엄청난 대가를 돌리면서 인류를 사죄하고자 결정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용서, 구원이 미치는 영역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유기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것을 분명히 하였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척하는 가운데 불경건한 삶을 살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의 이러한 욕망과 노력은 이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에 의하여 무효화되었다. ... 인간에게 놓여진 것은 하나님의 교제 속에서 누리는 영생이다(교의학 II-2, 319)." 그는 만인 구원설(apokatastasis)을 말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서면 응답에서 바르트는 직접적으로 답변하기를 거부했다.

 "나는 그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가톨릭 신학자 한스 우어스 폰 발타사르는 "바르트의 선택 교리에서 분명한 것은 보편적 구원이 가능할 뿐 아니라 필연적이라는 사실이다. 명백한 단 한 가지의 실재는 은혜이며 어떠한 정죄적 심판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잠정적인 것이어야만 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평가: 바르트의 신학 방법의 강점은 계시에 대한 전적 의존에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신학은 철학적 체계들이나 문화적, 지적 유행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진정으로 '신학적'이다. 전반적으로 바트르의 신학은 다른 학문과의 관계에서 신학의 자주성을 보존하고 있다. 신학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과학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의 강점은 또한 약점으로 남는다. 그것은 그가 신학적 자주성을 극단적으로 몰고 간데서 연유한 약점이다. 계시의 진리를 합법적으로 정당화시키려는 여하한 시도도 거부한 결과 그것은 신학의 자주성을 확립시켜 주는 것을 넘어서서 신학을 고립시키게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 신앙을 인간 경험의 지평 안에서 예기 될 수 있는 것쯤으로 축소시키는 것을 거부한 것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믿음과 경험의 연관 관계를 무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스탠리 그렌쯔는 말한다. 후이스틴(Wentzel van Huyssteen)은 "바르트는 신학의 대상을 인간의 종교적 의식이란 것으로 축소시키는 것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정당하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대하여 그가 전제하고 있는 공리적 기준은 출구가 막혀 있다. ... 계시에 대하여 그가 제시한 긍정적인 특성도 신학의 주관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증주의적 계시 신학은 대단히 비의적인 방법을 채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기본적인 신학적 교의들--하나님, 계시, 성경, 영감 등--이 주관적인 변덕(그것이 개인적 차원이든지 혹은 영향력 있는 전통을 따르는 것이든지)이 만들어 낸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납득시키기는 매우 어렵다."

 

바르트의 신학적 방법이 일으킨 논란의 두 번째 요점은 소위 그리스도 일원론이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 분을 아는 인격적 앎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것으로만 제한하였다. 그럼으로 모든 교리가 일종의 기독론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바르트의 선택 교리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예정의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다. 바르트가 성자와 성부와 성령 사이의 구분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기독론에 대한 극단적인 집중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신학은 구속사에서 성부와 성령 그리고 인간의 역할들을 간과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바르트의 성경에 대한 교리는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보수주의 신학자들 양자로부터 상당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오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그가 고등비평설의 학문적 결과들을 무시하여 성경을 마치 축자적으로 영감된 것처럼 취급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지나치게 구분함으로써 성경의 교리적 무오성을 부정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양쪽 모두 바르트의 성경관과 성경의 용도에 대한 그의 이해 사이에 그가 두고 있는 차이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그가 말하는 성경의 용도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인간적인 성격에 대하여 그가 강하게 했던 말들을 무시한다.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그의 성경관에 초점을 맞추어서 바르트가 성경을 신학에서 절대적인 권위로 취급하고 있는 점에 대하여 무시한다. 20세기 신학에 끼친 바르트의 가장 위대한 공헌 가운데 하나는 불분명한 가운데 묻혀 있던 삼위일체의 교리를 회복시킨 것이다. 그러나 삼위일체에 대한 바르트의 입장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는 않았다. 어떤 비평가들은 바르트의 취급 방법이 양태론적(modalistic) 특성을 암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하나님의 본질을 그의 인격(person)과 동일시함으로써, 그리고 삼위일체의 구분을 위하여 존재의 양태(modes of being)라는 용어를 채택함으로써, 하나님을 어떤 단일적 주관성으로 축소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의 본질 속에 있는 세 가지 존재 양태라는 궁극적 실제를 초월하거나, 그 이면에 그보다 더 높은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양태론을 거부했다(교의학 I-1, 382). 그리고 나중에는 양태론에 대한 거부를 극명하게 밝히고 하나님이 영원한 존재 안에 복종의 순서가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 영원한 그리고 환원할 수 없는 구분이 있음을 주장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승리의 "예!"가 인간의 모든 "아니오!"를 무효화시켜 버린다. 바르트에 대하여 가장 동정적인 비평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버카우어(G. C. Berkouwer)는 "마치 케리그마가 아무런 중대한 메시지가 없는 단순한 선언이 되어 버리는 위협 속에 놓이듯이, 바르트 신학에서 은혜의 승리는 인간 결정의 심각성을 막연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말했다. 슐라이엘마허가 인간에 대하여 매우 큰소리로 말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려고 했던 오류를 범했다면, 바르트는 하나님에 대하여 큰소리로 말하면서 인간에 대하여 말하려 했던 실수를 범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