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韓國文學感想]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8.

好學 2012. 2. 24. 20:13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8.

 

    지은이:이주향
    출판사:명진출판

 

  제1부    길들지 않은 사랑은 힘이 세다

 

7 여자가 사랑에 목매는 이유


성교육을 시키면서 남자는 모두 도둑놈이라고 가르치거나

남자는 감각적 쾌락을 위해 여자의 몸을 구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은

대체적으로 경험담일 것이다.

그러나 그 경험을 강조할수록 묻어나는 것은

깊이가 아니라 혼란이며, 신비감이 아니라 피로감이다.

그런 경험을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여자를 사랑속에 묻어두는데

그때 사랑이란 신선한 생명력이라기보다 비하하고 싶은 소녀적 감상이다.
 

여자에게 섹스는 남자를 사랑한다는 표시이고

남자에게 섹스는 단지 육체적 욕망이라는 이분법은 꽤 오래된 우리의 상식이다.

물론 상식이 그냥 만들어지는 법은 없다.

상식은 생활양식속에서 배어난 것이다.

여자에게 다가가는 남자의 궁극적 목적은 “함께 자는 것”이라고 말하는

프란체스코 알베로니의 (에로티스즘)은 그런 상식을 적은 책이다.
 

여자가 몸을 허락한다면 바로 그건 여자가 남자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어서

남자는 승리한 전투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는 군인처럼

 “나 누구 누구를 정복했다”고 떠벌린다는 알베로니는 여성적 에로티시즘과

남성적 에로티시즘이 어떻게 다른지를 상식의 차원에서 구별해 낸다.

그에 따르면 여성적 에로티시즘은 완벽한 총체성을 꿈꾸지만

남성적 에로티시즘은 철저히 분리적이다.
 

사랑과 성을 분리시키는 남성에게 성의 차원은 사랑의 차원과  다르다.

또한 사랑과 삶을 분리시키는 남성에게 사랑은 결코 삶의 핵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성과 사랑을 분리시키지 않을 뿐더러 사랑에서 삶을 떼내지 못하는 여성에게

성이란 삶이란 전체의 판이 짜이기 시작하는 삶의 핵이다.

여자는 몸을 섞은 남자와 모든 행위를 나누고 싶어한다고 한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그런 상식을 충실히 반영한 영화다.

메릴 스트립을 사랑하면서도 역마살을 누르지 못하는 로버트 레드포드는

메릴 스트립 곁을 떠난다.

남성적 에로티시즘을 상정하는 그에게 정착이란 거세와도 같기에

그는 사랑을 가슴 아프게 간직하면서도 야성의 세계를 선택한다.
물론 그가 사랑을 가슴 아프게 간직할 거라고 믿는 것은

많은 여성 관객에게 호소하기 위한 영화적 환상이다.

남자에게 사랑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철저히 삶의 일부이며 그것도 다른 삶에게 늘 밀리는 차선이다.
 

그런데 여자는 다르다고 한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것은 사회생활을 위한 단순한 활력소인데 반해

여자가 남자를 만나는 것은 사회생활을 포기 하는 것이라고 전한다.

남자가 세계인 여자는 자기 세계가 되어 줄 남자가 채워짐으로써

기존의 세계를 포기하고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다.
 

나는 그런 상식을 지리하게 늘어놓은 책이나 영화를 보면 참으로 용감하다는 생각과 함께

아직도 힘을 행사하려 드는 그 봉건적인 상식을 대할 때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하다.
도대체 그 구역질나는 상식을 통용시킨 생활양식은 어떤 것인가?

  

남자에게 사랑은...
나는 이화여대에서 7년 동안 (문화와 사상)과 (현대사상의 조류)를 강의했다.
여학생을 가르칠 때마다 피부로 느끼는 것은 그들의 절망감이다.
이화여대에는 졸업해서 다른 일 하지 않고

소위 ‘곱게 시집 가겠다’를 희구하는 여학생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사회에 나가 세파를 가르며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자 하지만

그들이 여러 번의 이력서를 쓰면서 만나는 것은 역시

여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물론 그 편견과 싸워 이긴 여성이 적지 않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더 많은 여성들이 열심히 일자리를 찾을수록

여성으로서 사회인이 되기에는 어려움이 너무 크다는 데 절망한다.

그들이 숨이 막혀 헉헉 거릴 때 그들 앞에 서 있는 남성이

결혼 상대자로 보이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자기의 정체성을 증명해 주는 것이 주민등록증밖에 없을 때

여성은 남성이 직장을 갖듯이 남성을 선택함으로써

절망감을 감추고 쉽게 사회의 메커니즘으로 들어간다.

직장이 남자의 삶의 주축이라면 같은 이유로 남자는 여자의 삶의 주축이 된다.
그와 같은 상황일 때 여자는 선택의 여지없이 자신의 삶에 주축으로 들어설
남자를 선택하는 일이 중요해지고, 이에 따라 여자에게는

남자와 함께하는 사랑과 성이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일 이된다.

사랑을 총체적 삶의 영역으로 확대하는 여자가 많다면

그것은 직장이 자기 얼굴인 남자가 직장에서 소외되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여자의 삶의 질과 직접적인 여관을 갖도록

사회가 요구해왔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실 총체성이라는 말은 대부분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소외가 아닌 연관성을 말할 때 총체적이라는 말을 쓴다.

관계와 관계가 단절되어 있지 않고 유기적 연관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성의 에로티시즘이 총체적이라고 말할 때 그때의 총체성은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인다.

여성에게 성이 사랑과 관계하고 또한 사회적 안정감과 관계한다고 말하는 것 이면에는

어떤 남성에게 어떤 여성이 성으로 묶이면 그 이외에서는 별 쓸모가 없다는 이념이 들어 있다.
쉽게 말하면 특정한 남성에 속한 표시로 미시즈 아무개라고 불리면서부터
여성은 그 남성과의 삶에서만 총체적으로 성과 사랑과 사회적 안정감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미시즈 여성에겐 이제 다른 사회적 삶이란 없어도 좋다는 것이 아닌가?

그 속에는 확실히 여성이 사회에서 무력한 약자였던 시절의 여운이 배어 있다.

 

남자와 여자의 원초적 본능
물론 나는 여기에서 여성적 에로티시즘처럼 분리적인 성향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원초적인 측면에서 남성과 여성의 에로티시즘이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 것인지 나는 모른다.
구별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하더라도 이분법적 구도를 갖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모든 단순노리가 그렇듯이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상황을 선명하게 드러낼 수는 있지만

그만큼 현실과 동떨어져서 구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여자와 남자의 속성을 비교하는 대부분의 작업이 그렇다
무엇보다도 내가 믿지 못하는 것은 원초적 본능에서부터

여성과 남성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 후에 남성을 여성 위에 군림시키려는 남성적 음모다.
푸코는 분명히 사랑에까지 권력이 개입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사랑에까지 권력이 끼여든다면 정들지 않는 세상, 더 정들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