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韓國文學感想]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5

好學 2012. 2. 22. 20:51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5

 

    지은이:이주향
    출판사:명진출판

 

  제1부    길들지 않은 사랑은 힘이 세다

 

4.  섹스가 운동이 된 이유
 

성의 해방 혹은 문화적 진보를 표방하며 각종 포르노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영화, 비디오, 만화 등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연극, 가요, 무용, 출판에 이르기까지 두루 두루 나타나고 있다.
세계적인 팝가수인 마돈나는 아예 “섹스는 자유와 힘의 원천”이라고 선언하면서

남성 지배 사회의 위선을 ‘섹스 어필’로 대응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지난 해까지 <미란다><마지막 시도>를 계기로 우리 연극계에 불어닥친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논쟁은 아직도 그 열기가 가시지 않고 있다.
논쟁이 무의미한 <젓소 부인>시리즈는 너무도 유명하다.

에로티시즘을 주제로 하는 많은 작품들이 발표되었으며

그 가운데는 단순히 외설로 평가할 수 없는 작품들이 상당수 끼여 있다.

 

 “섹스는 운동이잖아요”
에로티시즘을 다룬 영화 중에서 내가 비교적 충격적으로 본 영화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 <데미지>였다.

말론 브란도와 마리아 슈나이더가 주연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보았나?

사실 나는 이 영화들에 대해, 현대인의 상습적으로 앓고 있는 고독이라는 이름의 병을

도덕도 윤리도 뛰어넘는 섹스라는 원초적 행위로 풀어내고 있다는 상습적인 평에는 관심이 없다.

흥행을 위해 섹스에 끼워져 싸구려로 팔리는 고독은 어색할 뿐더러 천박하기까지 하다.
 

“나는 섹스를 좋아해요. 건강한 운동이잖아요. 밥맛도 생기고.”
잔느 역의 마리아 슈나이더가 이렇게 말할 때 나는 묘한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의 실체가 무엇이었을까는 한참 후에야 알았다.

‘성’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옛날의 ‘성’이 생명을 잉태하는 신성하고 신비한 생명력으로 금기시된 것이었다면

요즘의 ‘성’은 쾌락과 운동이라는 오락으로 개방된 것이다.

사실 잔느의 문장은 성에서 신비의 베일을 거둬낸 이 시대의 성 풍속도 이외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 신비의 베일은 확실히 금기에 근거해 있는 윤리적 규범들이다.

그 금기들이 깨어질 때 그 금기들에 의해 불륜으로 규정된 행위들이 원초적 본능의 이름으로

혹은 본능의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논리적이다.

이때 때론 인생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실존적 변명과 함께

아들의 연인과의 정사가 가능하며(데미지) 진보의 이름으로 동성애 혹은

양성애가 정당화된다(크라잉게임, 패왕별희).
비교적 영화의 요소를 갖춘 이런 영화 이외에도(사실 내가 안 본 영화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안 본 영화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많은 포르노 영화와 만화가 출시되어

이제 성에 눈을 뜨고자 하는 청소년을 유혹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성 관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매춘의 방법이나 성적 자극의 방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

 1백만 부 이상이나 팔려 나갔다고 한다.

공식, 비공식 채널을 통해 그런 책들이 우리 사회에 상륙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한 편에서는 이런 저질 문화의 유입을 원천 봉쇄해야 한다고 한다.

또 다른 한 편에선 아예 완전 자율화를 시행해서

관람자 혹은 독서하는 사람 자신이 판단하게 해야 한다고 한다.

완전히 풀어 놓으면 관심이 시들해져 굳이 보려 하지 않는다나!

미국에서 폴 버호벤 감독의 <쇼걸>이 흥행에 실패한 것을 보면

말초적 신경을 건드리는 작품은 어쩌면 금기시 되었을 때만 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성 윤리가 급속도로 변하는 것이 정말로 저질 만화, 저질 포르노

혹은 에로티시즘을 다룬 영화의 영향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한 개인이 특정한 만화나 비디오 혹은 영화에 묻혀 살 때

그런 것들이 그 개인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편안한 상태에서

비디오나 영화를 볼 때 그것들은 단순한 오락이지만
구체적인 상황에 직면해서 그 기억들은 모방사건을 만드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윤리에 대한 변화의 원인을 사회 전체적으로 규명하지 않고

비디오나 만화에서 찾는 것은 고리키의 <어머니>가

러시아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허무한 것이다.

 

생식이 절박하지 않는 사회
 '성’을 둘러싼 금기가 무너지고 마침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명제를 무슨 선언처럼

강조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 사회에서 기존의 ‘성’에 대한 담론을 유도함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이익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보야야 한다.
기존의 사회에서 성에 관한 금기 중 강력한 금기는 동성연애였다.

그런데 요즘들어 그 금기까지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나는 가끔씩 학생들에게 동성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는 질문을 받는다.

그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검토해 본 적이 없는 나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애매모호한 말로 상황을 넘기지만 정말로 반대할 만한 이유가 없다는 답밖에 가진 게 없다.

생각해 보면 동성애는 생식이 거세된 성 이외에 다름이 아니다.
 

현대 사회는 더 이상 종족 보존의 ‘본능’이라는 어마 어마한 권위로

생식을 절박하게 만드는 사회는 아니다.

생식이 사회적 생존의 문제에서 제외된 것이다.
현대 사회는 이미 성에서 생식을 떠나보냈다.

그것은 해방의 이름이었으나 그것이 가능한 것은 생식을 통한

사회적 노동력의 창출이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닭보다 먼저 일어나 부엉이보다 늦게 잠들어야 가족과 함께 먹고 살 수 있었던

농경사회에서 한 아이의 출생은 고달픈 삶을 나눠갈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남아의 탄생이 여아의 탄생보다 오만 배쯤 기쁜 것은

여자의 노동역이 남자의 노동력보다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의 노동력은

남자의 집으로 출가함으로 인해 빼앗길 노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사회가 변했다.

인간의 노동력이 바로 사회적 생산력으로 연결되지 않는 사회는

가족의 강한 연대를 요구하지 않게 된다.

가족이 여지껏 그가 담당했던 사회적 노동력의 생산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때

생식은 개인에게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되었다.

물론 가족의 연대가 느슨해진 상황에서 자녀는 부모의 노후대책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이때 성은 확실히 생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생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성은 남자에게 뿐 아니라

여자에게도 쾌락을 향해 질주해도 좋은 것이 되었다.

그리고 동성애 논의를 양성화했다. 생각해 보라.
성에서 생식이 문제되지 않을 경우 무엇이 남는지. 사랑이나 쾌락이 남는다.
만일 성의 목적이 쾌락일 뿐이라면 인위적으로 생식을 거세한

남녀간의 성이나 생식이 자연적으로 거세된 동성애는 다를 것이 없게 된다.
동성애의 논의가 활발해지고 예술/외설 시비가 대중화된 것은

갑자기 성 문제가 절실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성을 둘러싼 사회적 담론의 상황이 조금씩 바뀌었기 때문이다.
 

철학도인 내가 그래도 늘 속수무책인 체로 받는 질문이

바람직한 사랑의 윤리 혹은 성 윤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그 질문이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백년 가약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가부장제가

자신의 품을 떠나고 있는 사람들을 탕아로 규정하기 위한 것이건, 아니면‘사랑은 감정이다.

순간적인 감정에 충실하지 않는 것은 허위의식’이라며 순간적인 쾌락을 옹호하려는 것이건

사회적 존재를 무시한 순수한 의식의 윤리를 묻는 물음은 그 순수성만큼이나 의미가 없다.
가부장제라는 권위에 도전하지만 쾌락 혹은 순각적인 사랑이 주제인 영화를 볼 때

나는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다.

쾌락을 억압해 온 이 폭력적이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부장적 권위를 강요해 온 제도가

굴욕적이라면 아무리 해방의 띠를 둘렸어도 사랑이 없는 쾌락은 허무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본능의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쾌락을 향한 욕망’이 쾌락을 매개로

자신을 확대 재생산하려 하는 자본에 의해 점점 더 거품처럼 부풀어 오를 때 나는 슬프다.

<젖소부인>시리즈가 돌아다니고 그 비슷한 영화들이 성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우리들 앞에 노출되어 있을 때 나는 문명의 진보 앞에서 문화의 퇴보를 생각한다.

호텔, 레저 산업 등 고도의 소비문화에서부터 각종 비디오와 출판물에 이르기까지

욕망의 해방을 내세워 장사를 하는 문화는 이윤이 목적인 산업이지

살아 숨쉬는 생명의 문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쾌락을 억압해 온 성이 폭력적이라면 사랑이 근원적으로 거세된 쾌락은 절망스럽다.

무엇보다도 ‘쾌락이 사랑으로부터 떠나 있으면 우리가 마음 붙일 곳은 어디인가’를

깊은 숨을 쉬며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내가 닻을 내리고 싶은 곳은 말이 통하고 기가 통하는 인간의 마음이지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권위체계도, 쾌락이라는 길들여진 욕망도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