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韓國文學感想]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3

好學 2012. 2. 22. 20:50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3

 

    지은이:이주향
    출판사:명진출판

 

  제1부    길들지 않은 사랑은 힘이 세다

 

2.순결이 웃기는 이유


젊은 여성이 애청자라며 편지를 보내 왔다.

순결이라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갖는 문제를 상담하는 편지였다.

 

일부를 소개해 본다.
저는 두달 전에 약혼을 했습니다.

우리는 올 가을에 결혼할 예정입니다.
약혼자는 끔직이도 제게 잘해 줍니다.

그는 어린 왕자 같은 사람입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남자거든요. 요즘 저는 고민이 하나 생겼습니다.

생각해 보면 별 거 아닌데도 저는 자꾸 걸립니다.

다른게 아니라 저의 과거입니다.

대학 다닐 때 사귀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와 4년을 사귀었고 그는 저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저도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구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우습게도 그는 부모님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저를 버리고

돈이 많은 집의 딸과 결혼하여 치과를 개업했습니다.

저는 무척 놀랐고 가슴 아팠으며 그를 증오해왔습니다.
다시는 결코 남자라는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때 지금의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거칠은 세상에 혼자 존재한다는 느낌을 지워주는 남자였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제 의견을 먼저 물으며 저를 보물처럼 대합니다.

신기하게도 남자에 대한 증오심이 사라졌고

헤어진 그와 결혼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 여겨졌습니다.
언젠가 선생님께서 방송에서 말씀하신 대로

악연은 인연으로 가는 징검다리인 것 같습니다.

저는 과거의 악연이 지금의 인연을  만든 것 같아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습니다.

먼젓번의 그와 사귀면서 손만 잡은게 아니거든요.
순결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약혼을 하고도 결혼할 때까지는

같이 잠자리를 하지 않을 이 사람에게 정직하지 않은 것 같아 순간 순간 불안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상황은 매우 단순하지만 의외로 많은 젊은 여성들이 고민하는 문제다.

 

영웅호색과 깨진 쪽박
순결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평가의 문제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

나는 순결을 문제 삼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그 역사적인 흔적부터 추적하기로 했다.

여자의 순결을 문제 삼는 곳에서 항상 문제되지 않는 것이 남자의 동정이다.
사실적 차원에서 본다면 여자의 순결과 남자의 동정은 짝개념이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여자의 순결이 강조되거나 강요되는 곳에선 하나같이

남자의 정조를 문제 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습게까지 생각한다.

남자가 성에 대해 자유로우면 영웅호색이고 여자가 성에 대해 자유로우면 깨진 쪽박이다.

유교를 통치의 이념으로 삼았던 우리의 조선시대가 그랬다.

그 시대는 여자의 정조가 곧 여자의 생명이었다.

이때 나타나는 표현이 몸을 버린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상당히 구역질나는 속물적인 표현이지만

그 표현은 매우 힘 있는 것이었다.
 

사실 숨이 붙어 있는 한 몸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몸을 버린다고 표현함으로써

몸을 버렸다고 공인이 되면 사회적으로 폐기 처분되는 것이 당연했다.

정조 관념이 있는 여자, 정조 관념이 삶의 중심축인 여자를 양성했던 것이다.
 

연산군의 백모인 박씨 부인이 연산군에 의해 소위 ‘몸을 버렸기 때문에’
자살한 사건은 너무나 유명한 조선조의 야사다.

수절을 해야 할 과부가 덜컥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만천하에 ‘나 수절 안했다’고 공표하게 된 사건이었으니

그때 그 여자에게는 조선조 양반공동체에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박씨 부인은 정조를 못 지킨 것이 두려워 자결한 것이 아니다.

정조를 안 지킨 여자, 혹은 몸을 버린 여자라는

죽음의 낙인을 받았기 때문에 살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여자를 죽게 한 남자는

명분이나 힘의 게임 때문에는 죽어도 여자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왕이 그만한 일로 어떻게 죽는가라고 반문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왕이 아니더라도 남자는 여자로 인해서는 죽어서도 휘둘려서도 안 된다.

그것이 동서를 막론하고 봉건사회의 가부장제가 가르친 것이었다.

오히려 여자를 죽게 했으면서도 고개를 들고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바로 남자였다.
 

병자호란 직후에 생긴 ‘환향녀’라는 이름을 기억하나?

전쟁중에 우리의 딸들이 청나라로 포로로 끌려가 온갖 수치를 당했다.

인조대왕이 삼전도로 끌려가 청의 누루하치에게 이마에 피가 나도록 절을 하면서

굴욕적인 사죄를 하고 청을 섬기겠다고 약속한 후 전쟁이 끝났다.

전쟁이 끝나자 청은 그동안 그들이 겁탈해왔던 우리의 딸들을 우리나라로 돌려보낸 것이다.

이들이 바로 돌아온 여자들, 환향녀다.
 

그런데 여자에게 정조를 목숨이라고 가르친 유교 사회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손가락질과 돌팔매질을 한다.

더러운 여자라고.

가부장적 사회에서 가부장들이 무력해 수모를 당하면서도 억울한 세월을 견뎌온

우리의 여인들을 남자들의 그 알량한 권위로 다시 한번 내쫓은 것이다.

돌아온 여자들은 고향이나 집에서 자기 자리가 없었다.

그때 여자들은 대부분 자결하고 자결하지 않은 여자들은

환향녀라고 손가락질 당하면서 질긴 목숨을 이어간다.

이때부터 환향녀는 지독한 욕이 된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저 힘이 없어 이마에 피가 맺히도록 사죄하고,

힘 앞에서 굴욕적으로 충성을 맹세한 억울한 왕과 그왕을 섬겼던 억울한 남자들이

이제는 똑같은 힘의 논리로 사회적 약자인 여자의 피눈물을 요구할 때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힘이 없으면 망한다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다시 확인해야 하는가?

 

가슴 떨리는 사랑에도 권력이

남녀 사이에도 권력(힘의 논리)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철학자는 미셸 푸코였다.

남녀관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른 것이 사랑의 관계인데

그 사랑의 관계가 권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 권력이란 정치 권력이라기보다 힘이 관철되는 특정한 방식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생각이 낯선 생각이 아니라는 데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 여자는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논리가 아직도 팽배하다.

21세기를 바라보는 시점에서도 “저와 결혼해 주시겠어요?‘라든가

”매일 저와 함께 아침을 맞이하지 않으시겠습니까?“하는 식의 말은

여자의 말이 아니라 남자의 말이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거나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겠어요“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남자가 내민 손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올려놓고

미소를 보내는 것은 아무래도 여자에게 어울린다.
사랑을 청하는 남자가 어쩌면 한 번뿐인 값비싼 순결을 바쳐도 될 만한
남자인지를 탐색할 능력이 없는 여자는 손해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순결을 바치고 나면 엄청 세일을 해야 할 ‘헌 여자’가 될고 마는 여자는

남자가 성실한지, 책임감이 강한지를 살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자가 순결을 바칠 때 그 순결을 거두는 남자는

힘 있고 성실한 남자여야 여자 입장에서는 안전한 것이다.
 

나는 그런 말이나 행동이 보여 주는 진지함에도 불구하고 구역질이 난다.
아니, 그런 행위가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난감하다.

사실 몸이란 더럽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순결이란 물건 상납하듯 바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가 힘이 있고 누가 약자인지를 알려 주는 권력 관계의 바로미터일 뿐이다.
사실 강자는 거두고 약자는 바치고 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다.

바치는 자는 언제나 약자다.

어디 왕이 신하에게 바치는 것이 있었나?

강대국이 약소국에게 바치는 것이 있었나?

신하가 왕에게 충성을 바치듯 여자는 남자에게 순결을 바침으로써

당신의 세계에 속한 사람임을 끊임없이 드러내야 한다.

대칭이어야 할 관계에서 한쪽에 일방적으로 의무가 강요되거나 강조될 때

존재하는 것은 사랑이나 평등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권력일 뿐이다.
 

중세의 영주에게는 초야권이 있었다.

장원에 속한 농노가 결혼을 하기 위해선 장원의 주인인 영주의 허가가 필요했다.

영주는 농노의 결혼을 허략하는 대가로 초야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초야권이란 영주가 농노의 여자와 첫날밤을 지낼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그런 논리가 왜 존재했나? 이유는 간단하다.

장원의 주인인 영주가 농노와 결혼할 여자가 처녀인지 아닌지를 심판해 주겠다는 거였다.
 

영주와 잔 여자는 물론 처녀로 인정되었고 처녀로 인정된 여자는 처녀와 다를 바 없었다.

모든 권력의 역학관계가 그렇듯 그것도 주인이 누구인지의 게임이었지

사실을 밝히는 게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농노의 처가 영주의 아이를 임신할 수도 있지 않았나!

그러나 그 아이가 농노의 아이로 자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장원은 모두 영주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농노의 처가 이웃 농노와 바람이 나 아이를 낳을 경우

자기의 처를 영주에게 바친 그 농노는 생사를 걸고 아이의 아버지를 밝힐 것이다.

농노가 모셔야 하는 것은 영주이지 다른 농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농노가 영주에게 지조를 지켜야 하고 여자는 남편에게 순결을 지켜야 했던 것은

권력이 생활양식에 자연스럽게 실현된 형태인 것이다.
 

순결이나 정조는 물건이 아니다.

가부장 사회가 그것을 그세계에 속하는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하나뿐인 물건으로 취급해 왔기 때문에 순결을 바친 여자는

이제 다른 남자들이 거들 떠보지 않는 ‘따먹힌’ 여자가 되었다.

한 번 따먹힌 열매는 이미 존재하지 않듯이 따먹힌 여자는 끝난 여자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순결이나 정조가 여자를 한 남자에게 묶어 두기위한

사회적 전략이었음을 똑똑히 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따먹는 자 - 먹히는 자의 주객 구도에서

동반자라는 평등한 인격적 관계로 전환하는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인격적이지 않은 건강한 관계는 없다.

그러나 전망은 어둡지 않다. 이제 사회는 ‘순결이나 정조는 물건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은 가부장제로부터 탈출 해가고 있다.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신선함으로 다가오는 사랑은 사랑속에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을 순결하게 하는 것은 물건 취급 당한 ‘순결’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지조를 지킨다.

그때 지조는 지키기가 강요되는 억압의 메커니즘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지키고자 하는 자연스런 힘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다시 편지로 돌아가서 편지의 주인공은 어떻게 해야할까?
사랑 속에서 다시  태어난 주인공은 지금의 남자에게 과거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

그 이야기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아픈 과거는 이미 현실 속에 녹아 이 주인공이 새로운 사람을 알아보고

보다 넉넉하게, 보다 관대하게 사랑하는 힘의 밑천이 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과거는 걸림돌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 형성의 거름이다.

이미 거름이 되어 현실의 힘이 된 과거를 굳이 끄집어낼 필요가 있을까?
 

과거를 얘기하지 않는 것이 지금의 사람에게 거짓 태도를 보이는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어쩌면 가부장 문화의 때를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했을

상대방이 떠 안을 수 없는 짐을 떠넘기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때 과거를 얘기하지 않는 것은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인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런 얘기를 해야 할 상황이 온다 해도

그런 문제가 지금의 소중한 내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웃고 넘겨야 한다.

절대 심각해져서도, 심각해질 이유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