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韓國文學感想]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4

好學 2012. 2. 22. 20:50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4

 

    지은이:이주향
    출판사:명진출판

 

  제1부    길들지 않은 사랑은 힘이 세다

 

3.목욕탕집 둘째 며느리가 슬펐던 이유

사랑에 매달려 사는 사람은 가볍다.

물론 사랑이 그를 지지해 주는 한에서다.
그때 그 사람은 연못 위를 지지해 주는 한에서다.

그때 그 사람은 연못위를 통통 튀는 조약돌같다. 

가벼워서 환한 얼굴, 그 얼굴은 존재의 무게에 짓눌려 사는

일반적인 삶을 환하게 비취줄 수는 없어도 그 삶에 어떤 미소를 준다. 
그러나 만일 사랑이 그를 지지해 주지 않는다면.... 그는 노래를 부른다.


‘사랑은 없다’고.

그러나 그가 “사랑은 없다”고 말할 때 우리는 본다.

그가 기대하는 사랑을.
그가 시를 읊는다.

사랑은 없다고.

그러나 그것이 사랑이 그를 버렸을 때의 절망감이라면

그 절규는 분명 사랑의 이면이다.
 

여기 사랑의 노래, 허무의 노래를 부르는 여자가 있다.

그 여자(KBS 목욕탕집 남자들의 윤여정)는 왕자에게 구원받은 신데렐라처럼

평생을 시처럼 음악처럼 우아한 사랑을 하며 살게 될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멋있는 왕자여야 할 남편은 펑퍼짐한 아줌마가 되지 못하는 아내를 못미더워하고

그래서 부부의 불협화음은 끊일 날이 없다.

물론 그 여자가 나이 오십에 늦동이를 임신하기 전의 일이다.
 

여자임이 자랑스러운 그 여자는 쉰이 가까워도 모자를 쓰고 다니는 귀여운 여자다.

그러나 그 여자가 정작 사랑받기를 갈구하는 남편은 냉담하다.

부부 침실 영하 50도라나.
고상하고 우아하게 살기를 원하는 그 여자는 분위기 있게 촛불을 켜는 것을 좋아하고

가끔은 남편과 함께 연극도 보고 음악회도 다니면서 그 의미를 나누고 싶어한다.

하지만 일상이란 그저 일상이어야 한다고 믿는 남편은 그런 생활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눈에는 언제나 소녀이기를 꿈꾸는 아내가 유난스러워 그만하라고 짜증이나 내기가 일쑤다.
그 여자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늘 하늘 청초하기만 하던 청춘은 어느덧 가고

아무리 거울을 보아도 얼굴에선 세월의 흔적을 지울 수 없는데,
남편은 점차 멀어져만 가고 금이야 옥이야 키운 자식은 결혼해서 제 식구 편드느라

사사건건 대들 때, 아무도 제 편이 없다고 느끼는 여인은 슬프다.

그때 그 오십에 가까운 여인은 울고 싶을 것이다.

목 놓아 울고 또 울고 싶을 것이다.
목 놓아 울지 않으려고 그 여자는 시를 읊는다.

시에 자신의 마음을 싣는다.
 

그 여자는 혼자 있을 때 시를 읊지 않는다.

언제나 그 여자의 시 읊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때 시를 읊는다.

대체적으로 그 상대방은 냉담한 그 여자의 남편(남성훈 분)이다.

그것은 그 여자를 상처내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를 드러내 준다.

동시에 그 여자의 삶의 터전이 어디인가도 보여 준다.

여자는 남편을 사랑하지만 남편은 나이가 들어서도 소녀 같은 아내가 부담스러워 미칠 지경이다.
그 갈등 상황에 여자의 시 읊기가 있고 그 갈등 때문에 여자에게 시 읊기는 점점 대단해진다.

마지막 보루처럼. 예민한 그 여자의 시 읊기는 그 여자의 유일한 탈출구다.

그 여자는 시 읊기를 양보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의 상처를 달랜다.

 

시 읊는 아내가 징그러운 남자
물론 우리는 그 남편도 이해할 수는 있다.

남편이 기대하는 것은 나이에 걸맞는 변화 혹은 나이에 걸맞는 삶이다.

남편은 도망치고 싶어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연극을 좋아하며 시를 사랑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고 싶어하는 아내에게서.

그래서 그 남자는 징그러워 한다.

할머니라고 불러줄 손자가 있는 여자가 시나 읊으면서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바랄 때

그 여자가 감성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어하는 그 곳에서 그 남자는 확인한다.

세월의 낙인이 없이 유치의 극치인 아내를.
 

그 남자는 시를 모르는 삶을 경멸하는 고급한 그녀의 순수함(?)을

나이의 무게가 없어서 철이 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 남자의 눈엔 그 여자의 시 읊기가 살아내기 위한 실존적 선택이라기보다

아무도 자신을 돌봐 주지 않는다는 투정어린 감상으로만 보인다.

그래서 그 남자는 바란다.

그 여자 스스로가 그것을 깨달아 주기를.
 

정말 그럴까?

그 여자는 사랑의 노래, 허무의 노래만을 불렀지 자신이 부르는 노래가

한갖 투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 여자는 구원받을 수 없는 나르시스트인가?
연못 속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와 사랑에 빠진 나르시스는 어떤 점에서는 자기애의 표상이다.

그 나르시스를 부정적으로 말하려고 할때 우리는 강조한다.
자기 속에 갇혀 있는 자기애는 사랑이 아니라고.

사랑이란 자기 세계를 뛰쳐나와 상대의 세계에 도달함으로써

비로소 자기의 세계가 충만해지는 어떤 것이라고.
 

분명 그 여자, 이웃에 대한 배려가 힘든 것처럼 보이는 그 여자는 나르시스트로 드러나 있다.

페미니스트인 시조카가 독신주의를 선포할 때
“지가 박사야, 교수야”라고 말해 페미니스트의 어머니인 동서의 화를 자극하기도 하고,

생각 없이 툭툭 말을 내뱉어 식구들을 당황하게 하는 데 천부적이다.
자기 감정에 예민한 그 여자는 남의 감정에 무딘 탓에 자기의 세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여자를 나르시스트로 드러낸 것은

그 여자가 처한 심각한 상황을 코믹하게 처리함으로써

웃음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능력일 뿐

그 여자가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르시스트의 가면을 거둬 보면 그 여자는 심각한 상황 속에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편과 그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아니,

남편과 일상에서 잏어나는 자잘한 일들을 나누고 싶어하지만

그 아내의 작은 꿈을 결코 받아들여 주지 않는 남편.

그렇기 때문에 아내는 더더욱 시 읊기를 중단할 수 없다.
어부는 물고기를 바라고 살고, 농부는 가을을 바라고 살고...

나는 무엇을 바라고 사나.
 

얼마나 허무한 상황인가?

그 여자는 허무해서 죽겠다고 헐떡대면서 유일한 탈출구로 시를 읊어댄다.

허무한 상황에서 웃게 만드는 여자
그러나 그 상황은 좀처럼 허무하지도, 아프지도 않고 그냥 웃음만을 만들어낸다.

분명히 슬픈 상황인데도 슬퍼 보이지 않는 여자가 그 여자다.

그 여자가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쳐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를 웃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역시 작가의 역량이다.
웃게 하기 위해 김수현은 그 여자를 푼수로,

그 여자의 남자를 바람을 안 피우는 성실한 남자로 만들었다.

그 여자를 푼수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그 여자의 허무한 상황을 감춰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허무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하는 50대 중년의 표상이어야 하기에

그 여자의 남자로 하여금 그 여자를 받아주지 못하게 갈등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일상을 나누기 위해 남편과 대화를 하고 싶어하고

부부 사이에 무슨 말이 필요하냐는 남편은 여자의 말을 수다로 규정하고 들어 주지 않는다.

갈등은 자연스럽지만 의도된 것이다.

그 갈등 상황에서 여자는 추락하지 않기 위해 꿈을 꾼다.
언제나 화사한 꿈을 꾸는 그 여자는 질척거리는 삶 속에서

치고 받고 경쟁해야 하는 무리들 속에 들어와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생활인들의 비속함을 ‘동물’로 비하하면서 계속 인간(?)의 꿈을 꾼다.

그러나 그녀의 꿈의 대상이 ‘동물’인 한 사람을 향해 가볍게 날고자 하는

그녀의 날개는 땅으로 무겁게 추락한다.

이미 더러워진 손으로 진흙창에 박힌 날개를 털어낼 때

그 여자의 날개는 더욱 무거워지고 더 이상 날지 못하는 날개를 가지고 그녀는 헛꿈을 꾼다.

시를 읊는다. 날지 못하는 날개를 가지고 날기를 꿈꾸는 가련한 새야....

그녀가 동물이라고 비하할 성싶은 사람이 웃는 공간에서 그녀는 심각하다.

정말 인생은 이렇듯 허무한가 하고.

 

어머니의 하늘

나는 우리 어머니가 허무하다고 하는 소리를, 아니, 표정을 가끔씩 보았다.
내가 그 여자를 그냥 지나치지 않은 것은

그 여자는 나르시스트라는 가면 속에 가리워져 있기는 해도

7,80년대를 살아온 우리 어머니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와 그 여자의 차이는 그 여자는 푼수이고 우리 어머니는 심각하다는 것뿐이다.
내가 어렸을 적 어머니는 가끔 하늘을 보았다.

감나무에 열린 감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어머니가 보고 있는 것이 감나무 사이 너머 하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용하고 무거운 어머니의 얼굴을 훔쳐볼 때면 막연한 두려움이 나를 감쌌다.
그런 날이면 난 더욱 명랑한 척 어머니의 치마꼬리를 따라다녔다.

어머니의 하늘은 내겐 하나의 벽이었다.
 

어머니는 우리들이 웃는 것을 좋아했다.

사랑이 없는 것은 살아갈 이유가 없는 거라고 푼수 같은 내 동생이 선수를 치면

어머니는 우리들의 성장에 대견해 하면서도 말 없이 미소만 보냈다.

그 미소가 사랑하는 법 대신에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했던

어머니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어머니는 시를 읊지는 않으셨다.

하지만 시가 상처 속에서 핀 꽃이라면 우리 어머니의 삶은 하나의  시였다.

나는 목욕탕집 둘째 며느리를 보면서 우리 어머니와 모든 중년 여성의 허무를 생각하곤 한다.

그 허무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허무가 진지하게 묘사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분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래서 작가 김수현은 그 그림을 코믹하게 그려내는 전략을 썼고

그것을 통해 중년 여성의 허무를 따분하지 않게 전달시키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