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1
지은이:이주향
출판사:명진출판
90년대, 길들여지지 않은 내 모습 찾기
나는 가수 강산에를 좋아한다.
특히 그의 노래 중 `공부해서 남 주자!`는 노래를 좋아한다.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아는 게 힘이라지만 그 힘으로 무얼하고 있지?`
나는 `공부해서 남 주자`는 슬로건에 인생을 걸고 실천하는 `선생`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
대학 선생이라는 직업이 그런대로 괜찮은 직업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평생 이십대 젊음들과 어울려 살 수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한평생 늙지 않고 이십대의 열정으로 살아갈 수 있을것 같기도 하다.
특히 철학 선생으로서 나는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중심을 잃고 혼란스러워 하는 학생들과 정면으로 만나야 할 일들이 많았다.
학생들은 남의 땅, 남의 글로 만들어진 철학을 그대로 복창하는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내게 물었다.
“동성애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주팔자를 믿어야 하나요?”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서양 철학자들의 이름과 그들의 이론을 소개하는 것으로
철학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고 믿는 이 땅의 강단 철학 어디에도
그런 문제에 대한 대답은 나와 있지 않았다.
나는 부잣집 철학의 권위에 기댄 채 진정 철학이 맡아야 할 역할을 포기하고 있는
강단 철학을 뛰쳐나와 과감히 내 길을 가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여기, 우리에게 필요한 우리의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철학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시작되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학문임을 보이기로 했다.
나는 안테나를 세워 직장에서, 지하철에서, 시장에서, 영화에서,
소설이나 만화 에 나타나는 문화의 여러 징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는 많은 철학자들이 어려운 말로 들러가는 길을 쉬운 말로 질러서 가기로 했다.
그 즈음에 내가 강의실 바깥으로 외출을 시도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
나를 세상의 한복판으로 외출시켜 숨겨진 나의 욕망을 자극한 이들은
이대에서 내 강의를 듣던 제자들이었다.
방송 PD나 구성작가가 된 이들이 나를 부른 것이다.
첫번째 외출은 MBC-FM (윤상의 디스크 쇼)라는 프로그램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해 `책의 해` 기념으로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거기서 나는 시간의 파괴력을 견디며 살아남은 고전들을 소개했다.
두번째 외출은 SBS 라디오 심야프로인 (밤이 흐르는 곳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한 시간씩
(이주향의 철학이야기) 코너를 맡아 알기 쉽게 철학 강의를 하는 일이다.
이 프로그램은 아직까지 진행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세번째 외출은 월간지 (샘이 깊은 물)에 문화적 현상들을
철학적으로 반성하는 글을 쓰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네번째 외출이 되는 셈이다.
매번의 외출이 그러했지만, 이번 외출은 유난히 설렌다.
90년대도 중반을 지났다.
90년대는 80년대와는 확연히 다르다.
차라리 70년대를 닮아 있다.
신촌에 있는 (우드스탁)이나 (스튜디오 70's)같이 70년대 음악만 틀어 주는 카페에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보면 대체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복고 열풍은 한낱 현상에 불과하다.
90년대는 분명 그 이전 어느 시대와도 다른 속내를 하고 있다.
90년대의 가장 긍정적인 모습을 꼽으라면 다양성이 인정된다는 점이다.
한가지 가치만 존재하고, 한 가지 정답만 있는 사회에서
다양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물론 다양성이 언제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강의실 안에서 혹은 밖에서 만나는 젊은이들은 가끔씩 이런 다양성 자체를 버거워한다.
그들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다 아닌 것 같다고 한다.
그런 친구들은 대체로 진지하며 삶에 대해 지나치게 가벼워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젊은이들이기 때문에 나는 모르는 척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또 하나, 젊은 친구들은 모두들 `나는 남과 다르다`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특별하진 않지만 평범한 것은 싫다는 주의다.
그러다 보니 연예인 못지 않게 옷을 튀게 입어 보거나
머리를 코팅 염색하는 것으로 남다름을 표현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애써 쫓고자 하는 `개성`은 `유행`이라는 위력 앞에 함몰되고 만다.
결국 그들은 하나같이 `어쨌든 튀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다 유행에 길들여질 뿐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삶에 대한 자신만의 코드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기 안에 자신의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는 몇 개의 코드를 가져야 한다.
그것을 준비하고 마련해야 하는 나이가 바로 이십대인 것이다.
나는 위에서 소개한 두 가지 유형의 젊은이들과 만나고 대화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인생이 그렇게 가벼운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젊은이,
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다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젊은이,
진정으로 `나는 남과 다르다`고 주장하고 싶은 젊은이들과 마음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말이다.
나는 이 책에서 우리 시대의 사랑과 문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마음보다 몸이, 이성보다 감성이 추앙되는 시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어떻게 만나고 사랑해야 하는지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
롱다리가 넘실대고 트로픽 오렌지가 춤을 추는 이 시대에 한번쯤 멈추어 서서
진짜 내 모습은 무엇인지 고민해 보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
이 책이 여러분과 나의 작은 만남을 주선해 주리라 믿는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간사스럽고 호들갑스러운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갖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문화상품과 가치관에 당황하고 막막해 하는 우리 세대에게,
열심히 바쁘게 살고는 있으나 불안 이외에 기댈 곳이라곤 없는 젊은 세대에게 이 책을 바친다.
1996. 9월
이 주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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