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 삼포가는 길 6.
영달이는 흙벽 틈에 삐죽이 솟은 나무 막대나 문짝,
선반 등속의 땔 만한 것들을 끌어모아다가 봉당 가운데 쌓았다.
불을 지피자 오랫동안 말라 있던 나무라 노란 불꽃으로 타올 랐다.
불길과 연기가 차츰 커졌다.
정씨마저도 불가로 다가앉아 젖은 신과 바지 가랑이를
불길 위에 갖 다 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불이 생기니까 세 사람 모두가 먼 곳에서 지금 막
집에 도착한 느낌이 들 었고, 잠이 왔다.
영달이가 긴 나무를 무릎으로 꺾어 불 위에 얹고,
눈물을 흘려 가며 입김을 불어 대는 모양을 백화는 이윽히 바라보고 있었다.
"댁에.괜찮은 사내야. 나는 아주 치사한 건달인 줄 알았어."
"이거 왜 이래.괜히 나이롱 비행기 태우지 말어."
"아녜요. 불때는 꼴이 제법 그럴 듯해서 그래요."
정씨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영달에게 말했다.
"저런 무딘 사람 같으니, 이 아가씨가 자네한테 반했다. 그 말이야."
"괜히 그러지 마슈. 나두 과거에 연애해 봤소.
계집년이란 사내가 쐬빠지게 해줘두 쪼끔 벌릴까 말까 한단 말입니다.
이튿날 해만 뜨면 말짱 헛것이지."
"오머머. 어디 가서 하루살이 연애만 해본 모양이네.
여보세요, 화류계 연애가 아무리 돈에 운다지만
한 번 붙으면 순정이 무서운 거예요.
내가 처음 이 길 들어서서 독하게 사랑해 본 적두 있었어요."
지붕 위의 눈이 녹아서 투덕투덕 마당 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자는 나무 막대기를 불 속에 넣고 휘저으면서 갑자기 새촘한 얼굴이 되었다.
불길에 비친 백화의 얼굴은 제법 고왔다.
"그런데. 몇 명이었는지 알아요? 여덟 명이었어요."
"진짜 화류계 연애로구만."
"들어봐요. 사실은 그 여덟 사람이 모두 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백화는 주점 <갈매기집>에서의 나날을 생각했다.
그 여자는 날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철조망의 네 귀퉁이에
높다란 망루가 서 있는 군대 감옥을 올려다보았던 것이다.
언덕 위에 흰 뼁끼로 칠한 반달형 퀀셋 막사와
바라크가 늘어서 있었고 주위에 코스모스가 만발해 있어,
그 안에 철장이 있고 죄지은 사 람들이
하루 종일 무릎을 꿇고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질 않았다.
하루에 한 번씩, 긴 구령 소리에 맞춰서 붉은 줄을 친 군복에
박박 깎인 머리의 군 죄수들이 바깥으로 몰려나왔다.
죄수들이 일렬로 서서 세면과 용변을 보는 모습이 보였었다.
그들은 간혹 대여섯 명씩 무장 헌병의 감시를 받으며
작업을 하러 내 려오는 때도 있었다.
등에 커다란 광주리를 메고 고개를 숙인 채로 그들은 줄을 지어 걸어왔다.
"처음에 부산에서 잘못 소개를 받아 술집으로 팔렸었지요.
거기에 갔을 땐 벌써 될대루 되라는 식이어서 겁나는 것두 없었구요.
나이는 어렸지만 인생살이가 고달프다는 것두 깨달았단 말예요."
어느 날 그들은 마을의 제방공사를 돕기 위해서 삼십여 명이 내려왔다.
출감이 멀지 않은 사람들이라 성깔도 부리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도 그리 경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밖 으로 작업을 나오면 기를쓰고 찾는 것은 물론 담배였다.
백화는 담배 두 갑을 사서 그들 중의 얼굴이 해사한 죄수에게 쥐어 주었다.
작업하는 열흘간 백화는 그들의 담배를 댔다.
날마다 그 어려뵈는 죄수의 손에 몰래 쥐어 주고는 했다.
다음부터 백화는 음식을 장만해서 감옥 면회실로 그를 만나러 갔다.
옥바 라지 두 달 만에 그는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백화를 만나러 왔다.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병사는 전속지 로 떠나갔다.
그런 식으로 여덟 사람을 옥바라지했어요.
한 달, 두 달 하다 보면 그이는 앞사람들처럼 하룻밤을 지내구 떠나가군 했어요.
백화는 그런 일 때문에 갈매기집에 있던 시절, 옷 한가지도 못해 입었다.
백화는 지나간 삭막한 삼 년 중에서
그때만큼 즐겁고 마음이 평화로왔던 시절은 없었다.
그 여자는 새로운 병사를 먼 전속지로 떠나 보내는 아침마다
차부로 나가서 먼지 속에 버스가 가리울 때까지 서 있곤 했었다.
백화는 그 뒤부터 부대 근처를 전전하며 여러 고장을 흘러 다녔다.
아직 초저녁이 분명한데 날씨가 나빠서인지 곧 어두워질 것 같았다.
눈은 더욱 새하얗게 돋보였고, 사위는 고요한데 나무 타는 소리만이 들려 왔다.
감옥뿐 아니라, 세상이란 게 따지면 고해 아닌가.
정씨는 벗어서 불가에다 쬐고 있던 잠바를 입으면서 중얼거렸다.
"어둡기 전에 어서 가야지."
그들은 일어났다.
아직도 불길 좋게 타고 있는 모닥불 위에 눈을 한 움큼씩 덮었다.
산천이 차츰 희미 하게 어두워졌다.
새들이 이리 저리로 깃을 찾아 숲에 모여들고 있었다.
영달이가 백화에게 물었다.
"그래 이젠 어떡할 셈요, 집에 가면?"
백화가 대답을 않고 웃기만 했다.
정씨가 말했다.
"시집가야지 뭐."
"시집은 안 가요. 이제 와서 무슨 시집이예요.
조용히 틀어박혀 집의 농사나 거들지요.
동생들이 많아요."
사방이 어두워지자 그들도 얘기를 그쳤다.
어디에나 눈이 덮여 있어서 길을 잘 분간할 수가 없었다.
뒤에 처졌던 백화가 눈덮인 길의 고랑에 빠져 버렸다.
발이라도 삐었는지 백화는 꼼짝 못하고 주저앉아 신음을 했다.
영달이가 달려들어 싫다고 뿌리치는 백화를 업었다.
백화는 영달이의 등에 업히면서 말했다.
"무겁죠?"
영달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백화가 어린애처럼 가벼웠다.
등이 불편하지도 않았고 어쩐지 가뿐한 느낌 이었다.
아마 쇠약해진 탓이리라 생각하니
영달이는 어쩐지 대전에서의 옥자가 생각나서 눈시울이 화끈 했다.
백화가 말했다.
"어깨가 참 넓으네요. 한 세 사람쯤 업겠어."
"댁이 근수가 모자라니 그렇다구."
그들은 일곱 시쯤에 감천 읍내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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