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韓國文學感想]

황석영 - 삼포가는 길 1.

好學 2011. 10. 29. 10:13

 


  황석영 - 삼포가는 길 1.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 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 
새벽의 겨울 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밝아 오는 아침 햇볕 아래 헐벗은 들판이 드러났고, 
곳곳에 얼어붙은 시냇물이나 웅덩이가 반사되어 빛을 냈다. 
바람 소리가 먼데서부터 몰아쳐서 그가 섰는 창공을 베면서 지나갔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수십여 그루씩 들판가에서 바람에 흔들렸다. 
그가 넉달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한참 추수기에 이르러 있었고 이미 공사는 막판이었다. 
곧 겨울 이 오게 되면 공사가 새 봄으로 연기될 테고 
오래 머물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진작부터 예상했던 터 였다. 
아니나다를까. 
현장 사무소가 사흘 전에 문을 닫았고, 
영달이는 밥집에서 달아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밭고랑을 지나 걸어오고 있었다. 
해가 떠서 음지와 양지의 구분이 생기자 
언덕의 그림자나 숲 의 그늘로 가려진 곳에서는 
언 흙이 부서지는 버석이는 소리가 들렸으나 
해가 내려쪼인 곳은 녹기 시작 하여 붉은 흙이 질척해 보였다. 
다가오는 사람이 숲 그늘을 벗어났는데 
신발 끝에 벌겋게 붙어 올라온 진흙 뭉치가 
걸을 때마다 뒤로 몇 점씩 흩어지고 있었다. 
그는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담배를 태우고 있 는 영달이 쪽을 보면서 왔다. 
그는 키가 훌쩍 크고 영달이는 작달막했다. 
그는 팽팽하게 불러 오른 맹꽁 이 배낭을 한 쪽 어깨에 느슨히 걸쳐 메고
머리에는 개털 모자를 귀까지 가려 쓰고 있었다. 
검게 물들 인 야전 잠바의 깃 속에 턱이 반 남아 파묻혀서 
누군지 쌍통을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그는 몇 걸음 남 겨 놓고 서더니
 털모자의 챙을 이마빡에 붙도록 척 올리면서 말했다. 
"천씨네 집에 기시던 양반이군." 
영달이도 낯이 익은 서른 댓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공사장이나 마을 어귀의 주막에서 가끔 지나친 적 이 있는 얼굴이었다. 
"아까 존 구경 했시다." 
그는 털모자를 잠근 단추를 여느라고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고 나서 비행사처럼 양쪽 뺨으로 귀가리개 를 늘어뜨리면서 빙긋 웃었다. 
천가란 사람, 거품을 물구 마누라를 개패듯 때려잡던데. 
영달이는 그를 쏘아보며 우물거렸다. 
"내.그런 촌놈은 참. 거 병신 안 됐는지 몰라, 
머리채를 질질 끌구 마당에 나와선 차구 짓밟구. 
야 그 사람 환장한 모양 이더군." 
이건 누굴 엿먹이느라구 수작질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불끈했지만 
영달이는 애써 참으며 담뱃불이 손가락 끝에 닿도록 쭈욱 빨아 넘겼다.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불 좀 빌립시다." 
"버리슈." 
담배 꽁초를 건네주며 영달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긴 창피한 노릇이었다. 
밥값을 떼고 달아나서가 아니라, 
역에 나갔던 천가 놈이 예상 외로 이른 시각인 다섯 시쯤 돌아왔고 
현장에서 덜미를 잡혔던 것 이었다. 
그는 옷만 간신히 추스르고 나와서 천가가 분풀이로 
청주댁을 후려 패는 동안 방아실에 숨어 있었다. 
영달이는 변명 삼아 혼잣말 비슷이 중얼거렸다. 
"계집 탓할 거 있수, 사내 잘못이지. 
시골 아낙네치곤 드물게 날씬합디다." 
"모두들 발랑 까졌다구 하지만서두. 여자야 그만이었죠. 
처녀 적에 군용차두 탔답니다. 
고생 많이 한 여자요. 
바가지한테 세금두 내구, 거기두 줬겠구만." 
"뭐요? 아니 이 양반이." 
사내가 입김을 길게 내뿜으며 껄껄 웃어제꼈다. 
"거 왜 그러시나. 아, 재미 본 게 댁뿐인 줄 아쇼? 
오다가다 만난 계집에 너무 일심 품지마셔." 
녀석의 말버릇이 시종 그렇게 나오니 
드러내 놓고 화를 내기도 뭣해서 영달이는 픽 웃고 말았다. 
개피 떡이나 인절미를 전방으로 호송되는 군인들께 팔았다는 것인데 
딴은 열차를 타며 사내들 틈을 누비던 계집이 살림을 한답시고 들어앉아 
절름발이 천가 여편네 노릇을 하려니 따분했을 것이었다. 
공사장 인 부들이나 떠돌이 장사치를 끌어들여 
하숙도 치고 밥도 파는 사람인데, 사내 재미까지 보려는 눈치였다. 
영달이 눈에 청주댁이 예사로 보였을 리 만무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곱게 치떠서 흘기는 눈길하며, 
밤 이면 문밖에 나가 앉아 하염없이 불러대는 <흑산도 아가씨>라든가, 
어쨌든 나중엔 거의 환장할 지경이 었다. 
"얼마나 있었소?" 사내가 물었다.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보니 그리 흉악한 몰골도 아니었고, 
우선 그 시원시원한 태도가 은근히 밉질 않다고 영달이는 생각했다. 
그가 자기보다는 댓살쯤 더 나이 들어 보였다. 
그리고 이 바람 부는 겨울 들판에 척 걸터앉아서도 만사 태평인 꼴이었다. 
영달이는 처음보다는 경계하지 않고 대답했다. 
"넉 달 있었소.
그런데 노형은 어디루 가쇼? 삼포에 갈까 하오."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조용히 말했다. 
영달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방향 잘못 잡았수. 
거긴 벽지나 다름없잖소. 
이런 겨울철에." 
"내 고향이오." 
사내가 목장갑 낀 손으로 코 밑을 쓱 훔쳐냈다. 
그는 벌써 들판 저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달이와는 전혀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그는 집으로 가는 중이었고 영달이는 또 
다른 곳으로 달아나는 길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집에 가는군요." 
사내가 일어나 맹꽁이 배낭을 한쪽 어깨에다 걸쳐 매면서 영달이에게 물었다. 
"어디 무슨 일자리 찾아가쇼? 댁은 오라는 데가 있어서 여기 왔었소?
 언제나 마찬가지죠. 자, 난 이제 가 봐야겠는걸."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질척이는 둑길을 향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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