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韓國文學感想]

사씨남정기 - 김만중.2

好學 2010. 10. 6. 21:00

 

 

 

  사씨남정기 - 김만중.2  


"소승의 암자를 중수한 뒤에 어떤 시주댁에서 관음화상을 보내 주셨는데

이 화상은 당인(唐人)의 명화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 뒤에 제명(題名)과 찬미의 글이 없는 것이 큰 흠이니,

댁의 소저가 금석 같은 친필로 찬문을 지어 주십사 하고 청하러 왔습니다.

찬문은 산문의 보배라 그 공덕이 칠보를 시주하는 것보다도

더 중하고 찬문을 써 주신 소저의 수명이 장원하실 것입니다."
"스님의 말이 고맙소.

우리 집 아이가 비록 고금시문에 통하나

이런 글을 지을 수 있을지 좌우간 시험삼아 물어봅시다."


하고 시녀에게 소저를 불러오라고 명하였다.

이윽고 소저가 나와서 모친에게 무슨 말씀이냐고 대령하였다.

묘혜가 한번 소저를 본즉 용모가 쇄락 기이하고 우아 자비함이

실로 관음보살이 강림한 듯이 황홀하였다.

 묘혜는 심중으로 놀라며 생각하되,
'진세 속에 어찌 이런 아름다운 소저가 있으랴.'
감탄하면서 합장배례하고 물었다.
"소승이 사 년 전에 소저께 뵈온 일이 있었는데 기억하고 계십니까?"
"스님을 어찌 잊었겠소?"
소저와 묘혜의 인사가 끝난 뒤에 부인이 소저에게 물었다.
"스님이 멀리 찾아와서 네 필체로 관음찬을 구하는데 네가 그 글을 지을 수 있겠느냐?"
"소녀에게 지으라고 하시더라도 노둔한 제 재주로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더구나 시부 짓는 것은 여자로서 경계할 일이라 하였으니

스님의 청일지라도 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승이 구하는 것은 원래 시부가 아니고

관음보살님의 그 높으신 공덕을 찬양코자 할 따름입니다.

관음보살님은 본디 여자의 몸이신 고로 여자의 글을 받아야 더욱 좋습니다.

그러니 요즘 여자 중에서 소저가 아니면 누가 이 글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소승의 간청을 소저는 물리치지 마시오."
부인 또한 은근히 딸에게 권하고 싶어하는 눈치로,
"네 재주가 미치지 못하면 하는 수 없지만

그 글은 보통의 무익지문(無益之文)과는 다르니

웬만하면 지어 보는 것이 어떠냐, 나도 보고 싶다."


이에 반가워하는 묘혜가 얼른 족자 싸 가지고 온 책보를 풀어서

관음보살의 화상을 펼치매, 화폭 위에 바다 물결이 끝이 없다.

그 가운데 외로운 정자가 서 있는데 관음보살이 흰 옷을 입고

머리도 빗지 않은 채 어린 사내 아이를 품에 안고

물결을 헤치고 앉아 있는 장면이었다.

그 화법이 정묘하여 관음보살과 동자가 살아서 움직일 듯이 보였다.

그 그림을 본 사소저가 머리를 한 번 갸웃하고,
"내가 배운 것은 오직 유가의 글이요,

불서(佛書)는 모르니 비록 찬사를 시작(試作)하더라도

스님의 마음에 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소승이 듣건대, 푸른 연잎과 흰 연근은 한 생명이요,

석씨(釋氏)의 자비가 공씨(孔氏)의 인(仁)과 한 가지라 하니,

소저 비록 불서를 애송하지 않더라도

선비의 글로 보살을 칭송하면 더욱 좋을까 합니다."


사소저는 그제야 더 사양하지 않고 손을 정결히 씻은 뒤에

관음화상의 족자를 벽에 걸어 모시고 분향 배례하였다.

그리고 채필을 들고 앞으로 가서 관음찬 일백 이십 자를 족자 밑 여백에 가늘게 쓰고,

다시 그 아래에 연월일과 <정옥은사 배작서(精屋隱士 拜作書)>라고 서명하였다.
묘혜가 그 글의 뜻과 글씨의 모양을 극구 칭찬하고 유공댁으로 돌아왔다.

묘혜의 회답을 기다리고 있던 유공과 두부인은

묘혜가 돌려주는 관음화상의 족자를 받으면서 물었다.
"그 소저를 자세히 보았소?"
"족자 속에 그린 관음님 얼굴과 같은 용모였습니다."
하고 사급사 댁의 모녀와 수작한 이야기를 자세히 보고하였다.

 

유공이 묘혜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고,
"이 관음찬의 글과 글씨를 보니 그 재주와 덕행이 범인이 아니다."
하고 족자를 걸고 다시 보매,

글이 청아쇄락하고 필법이 정묘하여 한 곳도 구차한 데가 없었다.

온화하고 유순한 성품이 글에 나타났을 것이라고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그 글에는,
'관음경은 필경 옛날의 성녀(聖女)일지니, 주나라의 임사(任思)와 같도다.

그런데 외롭게 공산(空山)에 있음이 본뜻이 아닐지언정

직설은 세상이 돕고 백이숙제는 주려 죽었으니,

처지가 다름이 아니라 의취가 다름이로다.

화상을 보니 흰 옷을 입고 아이를 데리고 있으매,

이 그림으로 생각컨대 오직 뜻을 취하도다.

슬프도다. 서녘의 풀이 잔결하고 세속이 괴이하니 글을 좋아하는도다.

신지(神地)를 전희(專戱)하면 윤기(輪機)의 해로움이 있는데, 관음님은 왜 여기 계심이뇨.

죽림에 하강하시니 상운오채(祥雲五彩)가 임중(林中)을 둘렀도다.

그 덕이 세상에 비치니 억만창생이 뉘 아니 공경 흠탄하리오.

극진한 공부의 거룩함이 윤회에 벗어나니, 목이 숨 잃음 같아서 불생불멸하리로다.

지공무사한 덕이 천추에 유연하니 그 덕을 한 붓으로 찬양하기 어렵도다.'


유공과 두부인이 관음찬을 보고 칭찬하여 마지 않고,
"문자와 필법이 이처럼 기묘하여 재덕이 겸비함을 알겠다.

매파의 말이 허언이 아니었으니 곧 예를 갖추어 다시 통혼하자."
남매가 합의하고 다시 매파를 사가(謝家)로 보내서 통혼하려고 부탁하였다.
"사소저의 덕행을 알았으니 잘 부탁하오.

그 댁의 허혼을 받아 오면 후하게 상을 주겠소."


매파가 기뻐하며 장담을 하고 사급사의 집으로 갔다.

사소저는 개국공신 사일청(謝逸淸)의 후예요, 사후영(謝厚英)의 딸이었다.

후영이 본디 청렴 강직하매 조정의 소인배가 꺼려하였다.

마침 소인배가 반란을 음모할 적에 사후영이 대간의 언관으로 있었으므로

간신들의 작당농권을 분하게 여기고 여러 번 상소하다가

도리어 간신의 모해를 받고 소주로 귀양갔다가 거기서 죽었다.

부인이 비분을 참고 소저를 데리고 고향 본집에 돌아와서

슬픈 세월을 보내며 소저를 애지중지 길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