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韓國文學感想]

사씨남정기 - 김만중.1

好學 2010. 10. 6. 21:00

 

    사씨남정기 - 김만중.1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 금릉 순천부 땅에 유명한 인사가 있었는데,

성은 유(劉)요 이름은 현(炫)이라고 하였다.

그는 개국공신인 유기(劉琦)의 자손이라,

사람됨이 현명하고 문장과 풍채가 일세의 추앙을 받았다.

나이 십오 세 때 시랑 최모의 딸을 아내로 맞아서,

부부의 덕행과 금실이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소년 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부시랑참지정사에 이르매,

명망이 조야에 진동하였다.

그러나 당시 간신이 조정에서 국권을 제멋대로 농간하였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물러가려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


유현은 부인 최씨와 금실은 좋았으나

자녀의 소생이 없어서 근심으로 지내다가 늦게서 아들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서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부인을 잃은 그는 인생의 무상을 느끼고 더욱 벼슬에 뜻이 없어져서

병을 빙자하고 사직한 뒤에 집으로 돌아와서 한가로이 세월을 보냈다.

 

그 뒤로 국사에는 비록 참여치 않았으나

일세의 명사로서 그의 청덕을 모두 앙망하였다.

그에게 매제가 있었는데 성행이 유순하고 정숙하여

일찍이 선비 두홍(杜洪)의 아내가 되었는데,

초년 고생을 하다가 두홍이 늦게서야 벼슬을 하였다.

유공의 아들 이름은 연수(延壽)라 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숙성하였고

나이 차차 자람에 따라 얼굴이 관옥 같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십 세 때 이미 문장이 놀라웠다.

유공이 기특히 여겨서 사랑하였으나

그 재롱을 죽은 부인에게 보이고 함께 즐기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다.

 

유연수 소년은 십 세 때 이미 향시(鄕試)에 장원으로 뽑혔고,

십오 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즉시 한림학사를 제수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십 년 동안 더 학업에 힘쓴 뒤에

출사할 것을 청하매 황제께서 그 뜻을 기특히 여기시고

특히 본직을 띤 채 오 년 간의 수학 말미를 주셨다.

이에 대하여 유한림이 천은을 감축하고

부친 유공이 더욱 충의를 다하여 국은에 보답하려고 맹세하였다.


유한림이 급제 후에 성혼하려고 하매,

구혼하는 규수가 많으나 좀처럼 허하지 않고

유공이 매제 두부인과 함께 성중의 모든 매파를 청하여

현철한 소저가 있는 집안을 물었으나

마땅한 상대가 없어서 좀체로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 중의 주파라는 매파가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모든 매파들의 천거가 끝난 뒤에 입을 열었다.


"모든 말이 공변되지 못하니 제가 바른대로 소견을 말하겠습니다.

대감의 말씀이 부귀한 곳을 구하면 엄승상댁만한 곳이 없고,

규수 낭자의 현철한 분을 구하려면 신성현의 사급사(謝給事)댁 소저밖에 없으니

이 두 댁 가운데 택하십시오."


"부귀는 본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요, 어진 규수를 택하려고 하오.

 사급사는 본디 대간벼슬을 하다가 적소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라

진실로 강직한 인물인데, 그 집에 소저가 있는 줄은 몰랐소."
"그 소저의 용모와 덕행이 일세에 뛰어나니 더 여쭐 말씀이 없습니다.

저는 중매 일을 본 지가 삼십 여 년에

왕공재열의 모든 재상댁을 다니며 신부를 많이 보았으나

이같이 요조현철한 소저를 보기는 처음이니 두 번 묻지 마십시오."
"우리는 색을 취함이 아니니, 현숙한 덕행이 있는 소저라야 하오."
"사소저는 덕행과 용모가 출중합니다.

대감이 제 말씀을 못 믿으시겠거든 사소저의 현불현(賢不賢)을 다시 알아 보십시오."
하고 그 매파는 사소저를 극력 찬양하고 다짐하였다.

 

매파가 돌아간 뒤에 유공은 매파의 말을 생각하고 두부인에게 상의하였다.

그러자 부인이 묘한 제안을 하였다.
"사람의 덕행과 성질은 필법에 나타나니 사소저의 필체를 얻어 봅시다.

우화암(羽化庵)의 묘혜니(妙慧尼)를 불러서

우화암에 기진하려던 관음화상에 관음찬을 사소저에게 짓도록 청탁하게 합시다.

사소저의 그 친필을 보면 재덕을 짐작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청하러 갔을 때 사소저의 선을 보고 올 것이니

묘혜니는 매파처럼 좋은 말로만 우리를 속이지는 않을 줄로 압니다."


"그거 참 묘안이다.

그러나 관음찬은 매우 어려울 텐데 여자의 글재주로 어찌 감당할까?"
"어려운 글을 짓지 못하면 어찌 재원이라 하겠습니까?"
유공이 매제의 말이 옳다 하고 빨리 사소저의 선볼 것을 재촉하였다.

두부인이 사람을 우화암으로 보내서 묘혜 스님을 불러왔다.
"사가(謝家)와 결친하려고 하나 신부의 재덕과 용모를 알 길이 없으니

묘혜 암자에 기진하려던 이 관음화상을 가지고 가서,

사소저에게 관음찬을 받아서 보내주시오."


하고 화상을 내주면서 간곡히 부탁하였다.

묘혜가 그 화상을 받아 가지고 곧 자기 암자의 일처럼 간청하려고 사급사 집으로 갔다.

소저의 모친은 본디 불법을 신앙하였기 때문에

전부터 출입하던 묘혜가 왔으므로 곧 불러들였다.

묘혜가 안부인사를 하자 부인이 반겨 하면서,
"오래 보지 못하였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우리 집에 왔소?"
"아시는 바와 같이 소승의 암자가 퇴락하여

금년에 정재를 얻어서 중수하느라고 댁에도 와 보일 틈이 없었습니다.

이제 역사가 끝났으매 부인께 한 가지 청이 있어서 왔습니다."
"불사(佛事)를 위한 일이라면 어찌 시주를 아끼겠소마는

빈한한 집에 재물이 없어서 크게는 시주하지 못하겠지만 청이라 함은 무엇이오?"
"소승이 청하려는 것은 재물 시주가 아니옵고

소승에게는 금은 이상으로 귀중한 일입니다."
"궁금하니 어서 말해 보시오."
부인은 묘혜의 말이 의아스러워서 재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