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 인천 학살 사건
인천에서도 6·25전쟁 관련 학살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당일 오후 인천시 송학동 소재 인천경찰서 유치장(현 인성여고 앞)에서 벌어졌다.
세상에 파묻혀있던 이 참상은 김영일(金英一) 선생이 '격동기의 인천'이란 저서에서 사건의 단초를 알렸었고, 50여년이 지난 최근에야 그 전모가 밝혀졌다.
사건 조사는 그 해 10월 17일 유엔군 제3병참사령부 법무관들에 의해 행해졌다.
생존자 김종원, 백윤만, 지하영, 신상득, 신익균 씨 등이 증언을 했고, 진술이 자발적이었다는 자술서를 남겼다.
국문과 영문으로 작성된 '한국전쟁 범죄 제49호 문건'은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됐다가 최근 비밀이 해제되어 세상에 밝혀지게 된 것.
다음은 생존자들의 증언 내용이다.
"그들은 5일째 우리를 감방 벽을 향해 세 줄로 꿇어앉게 했다.
9월15일 저녁, 패색이 짙어지자 1층 잡범들을 석방하고, 7시경 2층에 올라와 다시 두 줄로 앉게 했다.
2층에는 7개 감방이 있었고, 각 감방에는 약 15명씩 갇혀 있었다.
7시 30분 경, 그들은 격자 창문을 통해 느닷없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감방 안은 숨을 데가 없었다.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
총성과 울부짖음이 피비린내와 함께 들렸다.
약 20분간 총질이 계속됐는데 누군가 '총알이 떨어졌어!'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우리는 공포에 떨며 얼마간을 그대로 죽은 듯이 있다가 인기척이 없자 감방 문을 부수고 도망쳐 나왔다."
인천경찰서 경관 출신 생존자 김종원(당시 38세) 씨는 밤새 친구 집에 피신해 있었다.
다음날 아침 10시 미 해병대에 가서 이 사건을 알렸다.
그는 경찰서에 돌아와 처참하게 나뒹굴어 있는 53구의 시신을 확인했는데, 희생자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알기로는 197명이 수감되어 있었고, 이미 가족들이 시신을 옮긴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학살 사건의 최종 보고서는 1954년 2월 27일에 작성되었다.
"인민군 제10방어사단 제6대대 또는 제7대대 사령부 소속의 6명의 정치보위부원들이 1950년 9월15일 인천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던 양민들에게 총을 난사해 53명을 살해했고, 28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21명만이 살아 도망쳤다."고 보고서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인천 출신 좌익 3명이 학살에 앞장섰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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