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인천]역사이야기

인천이야기/ 소화제 판 濟生堂

好學 2012. 1. 24. 00:53

인천이야기/ 소화제 판 濟生堂  

 

인천에 서양 의술(醫術)이 처음 들어온 것은 개화기 때였다. 1890년 성공회 '코오프'(한국명 高耀翰 고요한) 주교와 함께 내한해 인천에 정착한 미국인 의사 '랜디스'(한국명 南得時 남득시)가 최초의 양의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지금의 중구 송학동 구릉 지대에 성누가병원을 개설하고 환자를 돌봐 칭송을 받았으나 1898년 32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 지금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다.

굳이 당시 사람들은 그의 탁월한 의술과 헌신적 봉사에 대한 존경의 염으로 그를 '약대인'(藥大人)이라 불렀다. 약으로 유명했던 것은 축현리 소재 '제생당'(濟生堂)이었다.

1904년에 설립된 이 회사는 당시 '매약계의 원조'로 통했다. '건위소체' 즉 '위를 튼튼히 하고 체한 음식을 내려가게 한다'는 소화제 '청심보명단'을 발매했는데 '전의 홍철보 각하와 육군 군의 장기무 군의 유효 증명으로 이 약을 발행했으니 널리 사용해 주기를 바란다'는 이색적인 광고를 내고 있었다. 인천 '화평당'(和平堂)도 유명했다.

화평당에서는 불임치료제 '태양조경환', 매독치료제 '사향소창단'을 제조해 전국에 판매하였다.

의약계 역시 일본인의 독무대였다. 1906년 일본인들은 지금의 인성여고 자리에 거류민단병원을 지었고, 이 병원은 인천부립병원, 도립인천병원 등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1920년대에 들어서야 한국인 병원이 문을 열었다. 그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21년 율목동에 세워진 '부인병원'이다.

이 병원은 서울 '홀'병원 원장 '홀' 여사가 인천에 여성 전문 의원이 없는 데에 착안, 거금 5천환을 들여 집을 구입하고 여의사 김영흥씨를 초빙해 진료를 시작해 호평을 받았다.

광복 후 도립병원 외에는 변변한 종합병원이 없어 불편을 겪었다.

1987년에 중앙길병원이 구월동에 개원함으로써 인천은 비로소 민간 종합병원 시대를 맞게 되는데 이 역시 여성의 힘에 의해서였다.

전국에 7개 병원을 거느리며 국내 굴지의 의료 기관으로 자리잡은 길의료재단과 1996년 문을 인하대병원, 1997년 송림동으로 신축 이전해 간 지방공사 인천의료원이 트로이카로써 인천사람들의 건강지킴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