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7

好學 2012. 1. 29. 14:57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7

 

- 그의 부흥설교에 대한 설교학적 분석 - 정인교 박사(본 대학, 실천신학)


 

Ⅴ. 이 성봉 목사의 부흥 설교에 대한 설교학적 고찰

 

B. 부흥설교의 내용 분석

 

3.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복음

이 성봉 목사의 일생을 통해 볼 때, 그는 교단 지상주의자나 교단이라는 틀 속에 안주했던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생애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부흥사역은 교단을 초월한 초교파적인 것이었고, 이 로인해 적지 않은 어려움도 감수해야 했다. 가령 전국 부흥 목사로 임명받은 지 채 1년이 못 되어 그의 초교파적인 부흥사역을 문제삼은 교단에 의해 사역지가 남한으로 제한되었던 것이 그 단적 인 예이다. 그러면서도 이 목사는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을 그대로 받고 그대로 의지하고 그대로 체험하고 그대로 전함을 나의 사명으로 알았다"고 고백할 만 큼 자신의 신학적, 사명적 정체성을 자신이 속한 성결교회와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즉 그는 이 복음이 성결교회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천명하면서 도,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대강(大綱)을 포괄하는 것으로 확신하였기에, 그의 부흥설교에서는 이 사중복음이 대단히 빈번하게 강조된다.


1) 이 목사는 중생을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요 3:36; 고후 5:17)는 성경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 들인다. 즉 중생은 죄 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문제도 결국 중생치 못한 인간들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다. 이 중생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요 1:12) 천국을 보며(심중천국, 요 3:3; 롬 14:17), 죄를 범하지 아니하고 의를 행하 며(요일 5:18; 2:29), 하나님을 알고(요일 4:7), 산 소망을 가지고(벧전 1:3), 세상 을 이기며(요일 5:4), 서로 사랑하게 된다(요일 4:7).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흑암에서 나와 광명으로(요일 2:8), 죽음에서 생명으로(요일 5:24), 슬픔 에서 기쁨으로(롬 14:17),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된 삶을 살게 된 다.


2) "성결"이란 하나님의 지상명령이요(벧전 1:15), 예수의 죽으심의 목적이며 (딛 2:14), 성령의 역사로(벧전 1:2) 인간이 원죄, 죄의 성질, 죄알에서 깨끗함을 받는 것이다. 이 성결은 불의한 습관과 자범죄에서 떠나는 것뿐 아니라 언어 와 사상의 정결까지도 포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목사가 이해하는 성결은 단 순히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삶의 정결까지를 의미한다. 이 성결로 옷 입을 때에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있고(히 12:14; 마5:8), 귀히 쓰는 그릇이 되며(딤후 2:20), 사랑의 사람이 된다(벧전 1:22).


3) "신유"의 복음은 모든 부흥집회에서 가장 매력적인 메뉴로 소개되는 "이 적"의 복음이다. 이 목사 자신이 죽음의 질병으로부터 하나님의 신유를 여러 차 례 체험했고, 그의 목회 사역과 부흥사역에서도 신유가 빈번히 나타났었기 때문 에, 신유는 이 목사가 그 누구보다도 더 확신을 가지고 전했던 복음이다. 그 러나 이 목사가 밝히 듯이, 이 신유는 초자연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그 만큼 신 비주의적인 방향으로 흐를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고, 또 한국교회에 출현했던 이 단의 공통적인 특징이 신유를 빙자한 신비주의의 강조현상을 보였던 것도 사실 이다. 이러한 점을 간파한 이 목사였기에, 그 자신의 분명한 체험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신비주의적 시도를 거부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귀결이다:


우리의 신앙이감정과 기분으로 죄우되지말고 말씀에 굳게서야 될것 이요, 기사이적에 관심을 두지말고 말씀의 지식으로이단과 사설을 퇴치 해야 할 것이다.


4) "재림"의 복음은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 목사의 인생관과 세계관 그리 고 그의 사역과 이생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당위성을 제공하는 틀이다. 그의 세계관과 인간관이 허무주의의 경향으로 해석되어서 안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 재림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철저히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올바로, 적 극적으로, 그리스도의 품격을 닮아가면서 이생을 살지 않는 한, 재림의 주 앞에 설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기사를 믿는다면, 이러한 이 목사의 태도를 재 림이라는 보상을 바라는 심리에서 비롯한 것으로 간단하게 매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주의 재림이야말로 하나님의 최대 계획이요 성도의 최대 소망이라고 본 다(복음의 종교, 66). 주의 재림은 도적처럼 임하는 것으로서 누구도 알 수 없지 만, 그 날이 멀지 않았다. 이 목사는 성서적 신앙을 바탕으로 그 근거를 당시의 국제, 사회의 정세, 자연의 징조, 교회와 인심, 유대 나라의 독립 등에서 찾았으 며,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종말론적 긴박감에서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궁극적 관심은 재림의 시기가 아니라 재림을 대비하는 자세에 놓여 있었 다:


그러면 우리는어떻게 (재림을) 준비할것인가? 먼저 깨어서준비하라 (기도).. 마음의띠를 띠라(진실, 근신, 사랑, 봉사)... 등불을 밝히 켜라(말 씀).


이 재림의 날이 비밀로 덮여 있기 때문에, 이 날에 대한 성도의 준비는 전인 적인 자세로 '항상' 해야 하는 것이고, '생활 그 자체로 일상 속에서 해야 하는 것이고, '오늘이 그날'이라는 종말적 위기감과 긴장으로 해야 한다. 이것은 그의 재림관이 철저한 종말론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재림의 산술적 시기에 집착하 는 일부 다른 부흥강사들과 달리 건전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바탕이기도 했 다.


4. 위로와 희망의 복음

이 성봉 목사의 설교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테마는 위로와 희망이 다. 그가 사역하던 당시의 상황이 '절망', ' 빈곤', ' 낙망', '괴로움' 등으로 정리되 는 민족사 최대의 고난의 시기였음을 생각할 때, 이 요소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 가 아닐 수 없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목사가 제시하는 복음 앞에 떳떳하 게 설 수 있는 교회와 성도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가 외친 회개의 복음이 이 목사가 스스로 진단하는 생명의 길이었기에 이런 강조는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따라서 그의 설교의 특징이 대부분 준엄한 꾸짖음에 있었다는 것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병든 아이가 나을 수 있는 처방이 분명하다고 해서 무턱대고 입에 쓴 약을 복용시키는 것이 당사자에게 대단히 고역스런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처럼, 곤경에 처한 회중을 살리는 처방도 역시 급격한 무리를 피하는 지혜가 요구될 수 밖에 없다 할 것이다.

비록 고통으로 질식당하는 상황에서 생명을 주는 처방 이 급박하다 하더라도, 설교가 위로의 복음, 치료의 복음이 되어야 함은 불문가 지이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도 백성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조금만 참으시오, 애기(광복)를 낳습니다."하며 위로하였고, 한국 전쟁의 상처 가운데서도 이 위로 의 메시지를 멈추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나와야 그턱이지 요사이는 아이낳고훗배앓이를 이렇게 오 랫동안 앓는가? 아니다. 적은 고통이있으면 적은 기쁨이있고 큰 고통이있으면 큰 기쁨이있으니 이것은 우리나라만그런 것이 아니고전 세계적 이다. 세계적인고통이 있으니 세계적기쁨이 있을 것이다. 소망 중에 즐 거워할 것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목사가 회중의 고통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하고 그들로 하여금 고통의 신학적 의미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도록 배려했다는 점이 다:


가시밭이 백합화에게불행이 아니다. 가시밭이없으면 장난꾼 아이들이와서 그 꽃을꺾어갈 것이나 가시밭이있음으로 장난꾼들이 만지지도못 하는 것이다. 오늘날우리 성도들의 사면에있는 환난고통의 울타리가결 단코 불행이 아니라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사랑의 울타리라는 것을아는 자는 참으로행복하다.


이 목사가 성회에서 즐겨 사용했던 천로역정을 광의적 의미에서 연속설교라 할 때, 우리는 거기에서도 다음과 같은 그의 해석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달콤한 은혜도 있고쌉쌀한 은혜도 있다. 단것만 너무 좋아하면이가 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쓴 것을화제하여 당신의 자녀들에 게 대접하는것인데 이것을 알지못하는 유치한 신자들은달면 삼키고 쓰 면뱉어 버리니 애석한일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신앙에서 보면, 모든 고난은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 가운데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전제로하여 이 목사는 고난을 하나님의 은 혜의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따라서 환란은 부정적인 의미와 기능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환난은 인간으로 기도하게 하고 기도는 환난을 인간에게서 떠나 게 하여 감사하는 마음과 생활이 되게 한다." 따라서 역경에 처한다 해서 낙 망하거나 실망해서는 안 된다. "캄캄한 밤이 지나면 광명한 아침이 오는 것이 며, 엄동설한이 지나면 양춘가절이 오나니, 고통이나 시험이 올 때에 주께 버림 받는다 의심하지 말고 오직 소망중에 즐거워해야 한다."


절망이나 낙심이옴은 천리원칙이다. 고통은즐거움의 원칙이다. 십자가후에는 부활의 승리, 밤이 지나면 낮이오고 겨울이 지나면봄이 온다. 작 은고통에는 작은 기쁨이있고, 큰 고통에는큰 기쁨이 오나니어려운 일 당한대로족한 은혜를 주신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고통절망 상태이다. 그러나앞으로 세계적 환락산의기쁨이 우리 앞에전개됨을 바라보아 즐 거워할 것이다.



그의 이런 위로와 희망은 어떤 구체적 사안을 예견한 결론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만일 부요하고 평화로운 연락의 계절이 왔다면, 동일한 근거를 들어 이 목사는 경고의 메시지를 발했을 것이다. 이 목사로서 문제가 되는 것은 눈에 보 이는 사건, 상황 하나 하나에 즐거움과 고난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포 괄적이고 거시적인 안목, 즉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제대로 직시하느냐 하는 것이 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성봉 목사의 부흥설교의 핵심 주제들은 구원과 죄, 회개와 변화된 삶, 그리고 희망과 위로의 특징을 갖고 있고, 이런 의미에서 설교사에서 발견되는 부흥설교의 그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대개 부 흥집회에서 설교가 최하 50분 이상의 분량이었음을 감안하면, 우리가 인용한 그 의 설교집에 수록된 설교들은 그가 외친 내용의 핵심부분으로 요약된 것임에 분명하다 할 것이다. 매일 계속되는 부흥집회 속에서 이 목사는 이러한 메시지 를 기조로 복음을 전했고, 이 복음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회개, 각성하여 사회 의 한 부분을 건실히 담당함으로써, 이 목사의 부흥설교는 신앙적 성격만이 아 니라 사회학적인 평가와 의미를 함께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그의 설교에서 '전도'라는 주제가 그리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특정 교회가 아닌, 노천이나 천막집회에서 주로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열렸던 17∼19세기의 미국의 부흥운동이나 80년대 들어 초교파적으로 개최되던 국내의 각종 전도운동 집회가 전도에 치중했던 것 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아마도 이런 특징은 이 목사의 일차적 관심 이 복음에 올바로 서지 못했던 기존의 교회와 신자들을 바로 세우고 그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어 그리스도의 군병으로 양육하는 것에 놓여 있는 데서 비롯한 듯 하다. 올바른 교회와 성도가 없이 교회의 외적 성장에만 급급함으로 써 대책없는 사이비 교인만 양산하는 것의 문제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오 늘의 현실을 감안하면, 이 목사의 이런 부흥 메시지의 방향은 분명히 타당한 것 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다. 부흥설교와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모든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선포되는 설교가 회중에게 올바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단순히 설교가 무슨 내용인가 하는 음성의 명확성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쉽게 이해되고 또 듣고자 하는 흥미를 유발 시키는 것까지도 이 전달의 문제에 포함된다. 더욱이 부흥집회는 개교회의 연중 중요한 행사 가운데 하나이고, 또 축제적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대개의 경우에 부흥집회는 일정한 목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성회가 끝난 후에 이 목적의 실현 여부도 역시 성회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는 주요 요인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부흥설교는 당연히

 통상적인 예배의 설교보다 여러 면에서 다 를 수 밖에 없다. 평시 예배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설교시간, 지적인 면보다는 정적, 감정적 요소에 호소하는 설교, 성회 기간에 맞춘 설교주제 그리고 설교를 들으려는 회중의 준비상태 등이 부흥설교를 다른 설교와 구분하는 요인으로 작 용한다.

 

이 성봉 목사가 한국교회의 대표적 부흥사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은 그의 인 격적인 면은 차치한다 하더라도 그의 부흥설교의 탁월함에 대한 인정이요, 나아 가 그의 설교가 설교전달(Communication)의 한 모범임을 긍정하는 것이다. 추 상(秋霜) 같은 죄의 질책에 가슴을 뜯으며 뒹구는 회중, 재치와 유머에 웃음바 다가 된 예배당, 회중과 설교자가 하나가 된 설교시간, 수많은 사람의 회심과 변화! 이 목사의 부흥집회를 이렇게 정리한다 할 때, 과연 이런 묘사가 가능할 수 있었던 동인은 어디에 있었나? 우리는 설교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몇 가지 사항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1) 먼저 이 목사의 설교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사고의 전개 방식을 보면, 전 설교에 걸쳐 나타나는 독특한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설교 가운데 "천 국"(마 5:2-3)이라는 설교를 예로 들어보자. 이 설교는 설교제목인 천국이라는 개념에 대한 일반적인 진술로 이루어진 서론과 천국의 종류를 다룬 4개의 본론 대지 그리고 본론의 요약과 촉구 그리고 찬양으로 이루어진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목사의 설교는 통상적으로 한 개념, 한 단어에 집중해서 진행되는데, 이 설교에서도 천국이라는 단어가 설교를 풀어가는 핵심개념이 되고 있다. 이처 럼 전하려고 하는 주제를 단순화한 이 목사는 본론으로 가는 경과구(經過句)로 서 "그러면 성경에서 말한 천국을 몇가지로 말 수 있으니 이것을 성경을 근거 하여 말씀드리려 한다"(임마누엘 강단 90.)는 문장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설교 가 다룰 내용이 무엇인가를 회중으로 쉽게 파악하도록 한다.

 

본론에서 사고의 전개 방식은 대지에 대한 정언적 표명 - 예화를 통한 개념 의 경험차원으로의 접합 - 교훈의 진술로 나타난다. 즉 전하려는 하나의 주제를 집중적으로 펼치는 일직선의 전개방식이다. 특히 다양한 예화를 통해 피상적이 고도 형이상학적이 되기 쉬운 한 개념을 경험적 차원으로 끌어 내리므로써, 회 중의 이해를 도우고 동시에 회중의 집중도를 높이는 시도는 우리가 눈여겨 보 아야 할 대목이다. 결론에서도 주로 본론에서 다룬 내용을 다시 한번 더 요약, 정리하고 이것을 회중의 일로 연결시킴으로써, 회중과 말씀 사이의 괴리를 제거 하려고 노력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은 그의 설교진행이 너무 많은 성경구절의 인용에 의존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진행방식은 성경에 근거한 교훈의 전달이 라는 면에서 회중에게 신뢰감을 심어줄 수는 있지만, 본문에 대한 깊이있는 전 달을 방해하고, 또 설교가 하나의 스토리로 전개될 때 가장 이해도가 빠르다는 기본적인 전달의 원칙을 무너뜨림으로써, 회중의 집중도를 유지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한편의 설교에서 오직 하나의 주제만을 다룰 것을 주장하는 독일을 실천신학 자 빈처(F. Wintzer) 교수의 말대로 이런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설교 에서 한 주제에 집중하는 이 목사의 설교는 회중들에게 설교주제에 대한 분명 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적합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2) 이성봉 목사의 부흥설교에서 발견되는 두 번째 특징은 그의 언어 사용이 다. 그가 설교에서 사용하는 표현이나 단어는 대단히 일반적이고 평이하며 많은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것들이다. 그가 하나의 진리나 개념을 설명할 때, 형이 상학적이거나 학술적인 단어의 사용을 철저히 금하였다. 가령 그는 인간의 마음 속에 잠재된 죄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속은 꼭 구정물통같아서 가만히 두면 물이 맑아 깨끗한 듯 하나 한번 막대 기로 속을 휘저으면 생선가시, 콩나물찌꺼기, 김치줄거리가 우그르르 떠오른다" (임마누엘 강단, 45).

 

전하려는 교훈을 생활 속에서 찾아 접맥시키는 이러한 방식이 회중의 이해를 도왔음은 자명하다. 특히 이야기를 듣는 회중이 '회화적'으로 내용을 그려볼 수 있게 설교를 풀어나가는 것은 이 목사의 설교가 갖는 대표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모두에게 익숙한 속담과 표현, 위트와 익살을 즐겨 사용한다. '사돈의 팔촌 콩나물 대가리가 다 와서 뜯어 먹으려 한다', '노루때린 몽둥이 삼 년 우린다는 격으로', '태평양의 물고기가 물이 없어 죽고 요셉의 7년이나 풍년 든 창고의 생쥐가 고파 죽었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다 할 것인가' 등등의 표현은 추상같은 죄의 질책 속에서도 여유와 웃음을 잃지 않게 하는 윤활유의 구실을 했음이 분명하다.

혹자는 이 목사가 설교 시에 부흥사 최초로 욕설을 도입한 장본인이고, 이런 욕설이 별 반발을 불러 일으키지 않은 것은 자기를 비하하는 한국민의 심성 때 문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의 육성이 녹음된 설교 테이프나 어떤 자료, 어떤 증언에서도 이 목사가 설교 중에 욕설을 사용했다는 증거는 없다. 친근미 가 넘치는 생활언어로써 진리를 경험의 차원으로 끌어 내리는 것과 오늘날 흔 히 일부 부흥사들에게서 보이는 저속한 강단 언어는 구별되어야 마땅하고, 이런 맥락에서 이 목사는 철저히 전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이 목사의 설교가 감동을 끼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의 음성이다. 이 목사의 음성은 청명하면서도 약간 허스키한 음색이 가미된, 기도로 단련된 음성 이다. 조용하면서도 중후하고 맑으면서도 기도의 오랜 흔적이 역력한 그의 음성 은 설교자에게서 가장 이상적인 음성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한국교회 성도들의 일반적인 경향이 약간 쉰 설교자의 음성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더 더욱 그러하다. 훈련된 음성이 설교에서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우리는 이 성봉 목사를 통해 교훈받게 된다.


3) 위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이 목사의 설교에서 특징적인 것은 그의 예화사 용과 설교 중의 찬송이다. 이 목사의 설교에는 통상 그 대지수 만큼 예화가 등 장하는데, 주로 이 목사 자신이 각종 집회와 목회에서 체험한 내용과 천로역정 인용이 예화의 주된 특징을 이룬다.

예화의 기본적 기능이 철학적, 형이상학적 진리나 개념을 경험의 차원으로 연결시켜 회중의 이해를 돕고, 이완된 회중의 집중력을 다시 끌어 올리며, 성서 시대와 현대를 이어줌과 동시에 격렬한 설교 진행으로 회중에게 정신적 여유를 준다는데 있기 때문에, 적절한 예화의 사용은 설교의 성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더욱이 이 목사의 경우에는 예화들이 자 신의 체험과 부흥사역의 실화에서 얻어진 것이거나, 천로역정과 같이 회중에게 생소한 소재였기 때문에, 회중에게 주는 인상은 더욱 강력한 것일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만큼 효과적이었다 할 수 있다.

 

그가 사용하는 예화들의 주제는 대단히 다양한데, 주로 신앙으로 인한 삶의 변화, 불신이 가져온 결과 등 신앙과 관련된 예화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부흥사역의 목적이 심령의 변화와 그에 수반하는 삶의 변화 에 있었기 때문에, 회중들에게 구체적인 체험적 차원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경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목사의 예화 사용이 드러내는 한계도 간과할 수 없다. 그의 예화 사용의 특징은 교훈과 진리, 한 개념의 진술을 예증하는 방식으로만 설교에 도 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예화는 한 개념이 사건화된 실상을 소개하는 형식 만을 취하고 있어서 진행되는 논리에 잘 부합할 뿐 아니라, 전하고자 하는 내용 과도 정확히 연결되는 장점이 있지만, 한 개념 뒤에 이어 나오는 설명과 예증으 로서의 예화라는 일률적 양식만을 고집함으로써, 예화 자체를 설교논리의 전환 이나 설교구성의 한 고리와 틀로써 활용하는 다양성은 그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이 목사는 자신의 설교 중에, 혹은 설교를 마치면서 자신이 찬 송가 곡조에 맞추어 작시한 찬송을 즐겨 애창함으로써, 한국교회 강단에 찬송과 설교의 연결을 보편화하였다. 설교 중에 찬양하는 것은 이미 서구의 부흥집회에 서는 일반화된 것이지만, 이 목사가 활동할 당시만 해도 한국강단에는 낯선 형 태였고, 따라서 이 목사 이후 설교 중의 찬양이 부흥설교 뿐 아니라 일반설교에 도 널리 사용된 것은 그가 끼친 영향에서 비롯한다고 하겠다.

 

그의 설교집에는 대략 17편의 설교가 찬양으로 끝맺고 있지만, 실제 부흥사역 의 현장에서 이 형식히 훨씬 빈번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특히 그가 애창한 찬송의 가사는 자신이 직접 작사한 것이었기 때문에, 회중에게 전달되는 감화가 더욱 더 체험적, 사실적이었다. 이와 동시에 설교 도중의 찬송은 설교가 '연설'이라는 일관된 형식으로 진행됨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설교수용의 구태성 에 새로운 리듬을 부여함으로써, 전체 분위기를 일신하며 계속되는 설교에 탄력 을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시도이다. 더욱이 그가 사용한 가사는 설교내 용을 정리, 보강하는 경향을 띠고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설교의 연장선상 으로 수용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설교의 대미(大尾)에 사용된 찬양내용이 주로 성도들에게 희망 을 주고 위로와 용기를 심어 주는 내용과 하나님의 돌보심, 그리고 성도의 각오 와 봉사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설교 도중 에 사용된 찬양내용이 주로 인생의 허무나 덧없음 등과 관련되는 것과 대비되 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설교의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기능도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성도의 삶과 어려움 속에서도 낙망치 말고 하나님으로 인한 소망 가운데 살 것을 회중들에게 권면하려는 이 목사의 치유적 의도가 동시에 깔려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도로 단련된 은혜와 영감의 음성에 인생의 체험으로부터 나오는 달관(達觀) 의 신앙을 실어 노래하는 이 목사의 찬양은 그 자체로서 설교였고, 온 회중을 은혜의 포근함으로 감싸는 이불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