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6

好學 2012. 1. 29. 14:56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6

 

- 그의 부흥설교에 대한 설교학적 분석 - 정인교 박사(본 대학, 실천신학)


 

Ⅴ. 이 성봉 목사의 부흥 설교에 대한 설교학적 고찰

 

B. 부흥설교의 내용 분석


설교사(說敎史)를 통해 볼 때, 광의적 의미의 부흥설교가 주로 인간 개인의 영성을 문제삼고 하나님과의 직접적 관계성의 증진에 초점으로 맞추는데 반해, 특정한 부흥집회에서 행해지는 협의적 부흥설교는 개인의 회개와 구원, 이에 따 른 삶의 변화에 일차적 관심을 두기 때문에, 일반적인 예배에서 행해지는 교리 적, 교육적 설교와는 그 전달방식과 다루는 테마에서도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는 것을 2장에서 살펴보았다.

 

한국교회 설교의 결정적인 틀을 제공한 선교사들의 설교가 보수적, 비정치적 그리고 성경중심적인 특징을 보여 주고, 청교도적 신학의 기반 위에 성경적 신 앙과 경건한 삶으로의 변화, 종말과 경성된 삶을 주된 강조점으로 하고 있다 할 때, 이 성봉 목사의 설교도 역시 신학적, 내용적으로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 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 목사의 설교를 '부흥설교'(Revival Preaching)라 규정 하는 것은 설교 내용뿐 아니라 그의 설교의 장이 이 목사가 평생 헌신한 부흥 사역과 밀접히 연결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의 설교는 특정한 집회를 전제한 협의적 의미의 부흥설교이며, 또한 그가 선포한 메시지의 주된 경향은 설교사에서 발견되는 협의적인 부흥설교의 그것과 일치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모든 부흥운동은 사회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혹은 영적 이든 그 운동이 요청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불가피한 상황을 언제나 전제하고 있었다. 따라서 설교를 지탱하는 2대축이 Text와 Context라는 원론적 입장은 차치하고라도, 부흥운동과 부흥회 그리고 부흥설교를 결정하는 하나의 결정요인 으로서의 상황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이 목사의 설교내용을 분석하기 전에 먼저 그가 활동하고 설교했던 당시의 정황을 살펴 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목사가 본격적으 로 활동했던 1928-1963년은 민족사적으로 그 유래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시련 과 고난의 시기였다.

 

1910년으로부터 시작하여 1945년까지 지속된 일본 제국주 의에 의한 한국민의 식민화, 그 뒤를 이어 발발한 3년 간에 걸친 한국전쟁이라 는 최대 비극이 이 시기에 발생했다. 이러한 두 사건은 단지 '정치적 사건'이라 는 언어 유희를 넘어서 민족의 운명 전체를 결정하는 운명적 사건 그 자체였다. 함 석헌의 말처럼 우리는 이 시기를 거치면서 경제적으로 "나라의 힘이 말라버 렸고... 국가사상이 옳게 발달하지 못했으며... 사상적으로 무산이요 지식적으로 무지일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무지"에 이르고 말았다.

그나마 기독교가 정치적 절망의 순간에 민족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용기를 격 려하며 삶에 활력을 주는 긍정적 역할을 하였지만, 신사참배 문제로 인한 후유 증으로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감당치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의 삶이 도탄에 빠질 수 밖에 없었음은 당연하다. 경제적 인 피폐는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정신도 역시 극단의 황폐로 치달을 수 밖에 없 었다. 아무런 희망도 없던 시기, 피어오르던 희망이 절망으로 변하던 시기, 전쟁 으로 인해 삶의 가치가 근본적으로 위협받던 시기!

 

그러나 상황이 만들어 주던 이러한 위기는 역설적으로 복음을 위한 기회에 다름 아니었다. 상황의 비참은 영적 갈급을 높여주는 거름이고, 인간의 교만을 하나님 앞에 무릎꿇리는 호기(好機)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이성봉 목사가 복음을 들고 헌신한 시기는 역사상 부흥운동이 요청될 수 밖에 없었던 필요충 분 조건을 갖춘 시기였다.


가. 이 성봉 목사의 부흥관

이 성봉 목사의 부흥사역은 이렇게 갈급한 상황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그가 전국 부흥목사로 발령받고 행한 연설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목사는 자신의 사역 을 '만세전에 예정하신 주님의 계획'으로 믿었고, 역경의 상황을 복음의 황금어 장으로 알고 헌신했던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만약 이 성봉 목사의 설교가 제 3자에 의해 부흥설교로 평가된다면, 이 목사 자신이 생각하는 부흥이라는 것은 무엇이었는 가 하는 것이다. 이 개념에 대한 확고한 인식은 그 자신의 부흥사역의 당위성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인식 위에서 그가 선포하는 메 시지의 방향이 정립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이 목사의 부흥관은 '부흥의 비결'이라는 요약설교집에 실린 두편의 설교 속 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부흥이란 "죽은 자를 살리며(요 5:24), 병든 자를 치료하며(출 15:26), 약한 자를 강건케 하며(고후 12:10), 잠자는 자를 깨우 며(욘 1:6), 꺼진 불을 다시 일으키며(딤후 1:6), 넘어진 자를 일으키며(잠 24:16), 물러가는 자를 전진케 하며(히 10:39), 곁길로 가는 자를 바른 길에 세우는 것이 다(사 42:17)".

 

다른 말로 하면, 부흥이란 영적인 각성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의 무장 과 삶의 변화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이웃사랑에서 증명하는 종횡의 성격을 갖는다. 동시에 이 부흥은 단지 개인적 차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도 깨어 있고 성령으로 넘쳐야 한다 는 의미에서 교회에도 해당이 된다. 이 경우 교회의 부흥이란 오늘날 흔히 이해 되는 교회의 양적 성장이나 외형적 팽창과는 거리가 먼 영적 각성과 참 교회됨 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왜 부흥이 필요한가? 이와 관련해 이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부흥은 "하나님의 요구이며(눅 12:49),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며(신 28:1-14), 회 개의 역사가 일어나고(마 3:5), 천국의 기쁨을 주고(롬 14:47), 형식주의 거짓교 회를 부수며(왕상 18:40), 모든 교회와 신도가 부흥을 원하며(사 8:16-17; 암 8:11-13), 많은 영혼을 구원한다"(행 2:41, 4:4).

이 부흥은 특수한 하나님의 사람(렘 1:18), 하나님의 말씀(시 19:7) 그리고 성 령의 운동으로(욜 2:28) 가능하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죄에 대한 철저한 회 개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목사는 부흥을 참 부흥과 거짓부흥으로 구분하면서 그 각각의 특성을 다 음과 같이 설명한다:

참 부흥은죄와 허물을 깨닫고그 심령에 수치를느끼고 변화되어, 희열 로 산 그리스도를 모시며, 그 심령은 소망을하늘에 두고 달음질을하며, 은혜가 다른사람에게 파급되고(행2장), 성결의 기갈과만족을 느끼고, 모 든사람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그리스도의 용사로서지원병이 된다. 그리 고담대히 승리의 혁명적세력으로 세속의 성벽을무찌르고 악마의 포로 를석방시킨다.


거짓 부흥(유 4-19; 행 19:14-16)은죄에 대한 통회가없고 성결의 무관 심, 천박, 피상적, 기분적, 감상적이며, 그림자로 본체를대신한다. 생명의 운동은없다. 일시적이요 영속석이없고 공허감을 느끼다가절망에 빠진 다.


즉 모든 부흥운동은 영적인 각성을 바탕으로 가치관과 삶의 모습까지 변화시 킴을 목적하는, 소위 '살리는 운동'으로서, 이것의 진위 여부는 신앙 안에 온전 히 서고 신본주의적 인간으로의 변화와 유지가 인정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 다. 이러한 그의 이해는 1930-60년대에 한국 교회를 흔들었던 일부 사이비종파 의 신비주의적 경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며,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한 그 의 부흥집회가 전인적 차원을 표방하고 있음을 웅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 설교 내용의 경향성

이 목사의 부흥설교는 이러한 확고한 부흥관에서 그 방향과 내용이 정립되었 다. 그렇다면 그가 전한 메시지의 주된 주제는 어떤 경향을 띠고 있는가? 그의 설교는 외형적으로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들은 내용적으로 교리 적 설교와 신앙의 각성을 촉구하는 설교로 크게 구분된다.

 조사한 49편의 설교 가운데 기독교의 특질을 설명한 "복음의 종교"(롬 1:16-17), 성령의 본질을 다룬 "그리스도의 영"(롬 8:9; 고후 13:5), 기도의 본질을 설교한 "응답받는 기도"(마 7:7-11), 십자가의 정체를 분석한 "십자가의 도"(고전 1:18; 갈 2:20), 교회관을 설파한 "간난산상의 미궁"(딤전 3:15), 이단의 문제를 다룬 "거짓 스승을 삼가 라"(벧후 2:1), 그리스도론을 설교한 "예수를 이해하느냐"(마 22:4; 16:15-16), 인 간론을 다룬 "깨달으라"(시 49:12-20), 그리고 성결과 재림의 개념을 접근한 "성 결의 복음"(히 12:14)과 "재림의 복음"(마 24:1-51)등 10편이 기독교 교리에 대 한 이해와 정리로 규정되는 교리설교에 속한다.

 

하지만 이 목사의 경우, 이러한 교리 설교가 지적 정보의 전달에 치중한 건조 한 교리적, 교육적 설교 일방에 치우치지지는 않는다. 비록 다루는 주제와 그 주제에 접근하고 설명하는 것이 논리적 체계적이고, 또 해당 주제에 대한 분명 한 논증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는 교리설교라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이 설교들은 항상 회중에 대한 반응과 결단 그리고 삶의 변화를 교리적 내용으로 부터 이끌어냄으로써, 지적 차원과 정적, 의지적 차원이 연결되고 있다.

이 목사가 지적 정보의 전달만으로 그치지 않고 신앙의 각성과 그리스도 안 에서의 삶의 변화라는 차원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은 그가 이해하고 있는 부흥관 과도 부합하는 것이다.

 

이 성봉 목사의 부흥설교를 보면, 협의적 의미의 부흥설교가 갖고 있었던 설 교 내용상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줄 뿐 아니라, 이 목사 자신이 설파한 부흥의 개념을 정확하게 실천하려했던 그의 노력을 엿보게 한다. 동시에 그의 신학적 경향성이 얼마나 설교에 투영되고 있나 하는 것도 이 작업을 통해 드러난다.

 

1. 구원의 복음

이 성봉 목사에게서 보이는 가장 지대한 관심은 개개인의 구원이다. 그의 신 학적 경향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간과 이 세계의 모든 불행은 죄의 문제에서 비롯한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인생은 다 죄악의 바다에 빠져서 멸망에 직면"한 상태이다:


이 인생을구원해 보려고 정경문제, 정치문제, 예술문제, 과학의발달, 지식만능을 부르짖고있으나 그것보다 먼저인생은 죄악에서 구원받는일 이 급선무란 말이다. 구원받지 못한 인간은제아무리 훌륭한 지식과금전, 지위 명예향락을 가져다주어도 참만족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이 세계, 이 사회는 구원받지못한 사람들이 지배하여멸망의 구렁이로 몰아넣는 것이다.

 

이처럼 이 목사는 모든 문제의 근원을 인간이 지닌 죄의 문제에서 보기 때문 에, 그의 설교에서는 특히 이 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자주 등장한다. 이 목사 가 이해하는 죄는 "옛 성질이 자주 나타나 발동하는 문둥이 같은 죄성질"인 원 죄와 "어려서부터 지은 모든 무거운 자범죄"로서 보수신학이 이해하는 죄관 과 일치한다. 이 죄는 성결과 대칭되는 것으로서 더럽고 질병, 흑암, 불결, 사망, 고통 그 자체이다. 이 죄가 인간을 지배하기 때문에, 인간은 평화를 누릴 수 없고 서로 사랑할 수도 없으며, 인간이 만들어 내는 일체의 종국은 불행으로 치 달을 수 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죄 - 죄악의 습관, 죄악의 형벌, 범죄한 고통, 죄악의 성질, 모든 환난과 사망에서 구원받아야 비로소 생명이 보 장된다(주 예수를 믿으라. pp. 150-156).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표현을 빌리자면, 죄라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의 깊은 소외, 곧 존재 자체로부터의 소외이고, 이 죄로 인해 존재 자체의 신비를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세계와의 올바른 관계도 불가능하다 할 때, 이 목사 의 설교에서 성도와 교회 그리고 사회 속에 물들어 있는 죄에 대한 지적과 비 판이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가 이러한 죄의 속성과 그 결과를 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목사는 인간에게 가장 시급한 이 구원을 3단계로 이해한다.

첫 단계는 의롭다 하심을 받고(롬 5:1), 중생(벧전 1:23)하고, 후사가 되는(갈 4:6-7) 과거적 구원(엡 2:5-8)으로서 그에 의하면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성취된 구원을 믿으면 주관적 구원이 성취되고 체험 된다. 두 번째 단계의 구원은 생명이 자라고(요 10:10), 생활이 거룩하여지고 (요 17:17), 능력을 받는(빌 4:13) 현재적 구원(빌 2:12-13)이며, 세 번째 단계의 장차 올 구원은(고전 15:49) 주의 재림과 함께 실현되는 것으로서 몸이 변화되 고(살전 4:16, 고전 15:51-53), 보상의 심판을 받고(고전 3:13, 마 25:14-22), 영광 의 왕이 된다(딤후 2:11-12). 즉 이 목사는 과거의 구원을 죄악의 형벌에서, 현 재의 구원을 죄의 지배에서 구원받는 것으로 해석하며, 미래의 구원이야말로 부 활, 완성 그리고 영생을 얻게 되는 최종 단계라고 본다. 또한 인간 모두가 빠짐 없이 구원받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다.

 

이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 자체에 주어진 가능성은 아무 것도 없다. 이 구원 은 오직 위로부터 오는 선물, 즉 높아지고자 했던 인간의 교만을 하나님의 겸비 와 낮아지심, 즉 스스로 육신의 몸을 입고 십자가를 지심에 의해서만 인간에게 가능성으로 열려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가능성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충만한 사 랑이 동인(動因)으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이 목사는 이 구원을 인간에게 가져오는 유일한 통로가 하나님의 사 랑이 동인이 되어 인간이 되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 뿐임을 강조한다:


예수는 인생의근본 문제를 해결해주신다. 예수를 모시기만하면 현재 문제, 미래문제, 개인 문제, 가정 문제, 국가문제, 세계 문제가다 해결되 건만 그저사람들은 몰라서 몇날이나더 살겠다고 썩어질세상, 썩어질 물 질, 썩어질 허영에 속아서먹고 자고 일하고, 먹고 자고 장사하고, 먹고 자 고 애나낳고, 먹고 자고변소에나 다니면서 번민고통에 병들고, 마지막 에는 죽어서땅속에 들어가 해골바가지가되고 화장장에 가서한줌의 백 골, 재와연기로 사라지는 경우가이 시간에도 부지기수가아닌가?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유일한 구원자인 예수와 연결될 수 있는가? 이 목사 는 이를 위해 철저한 회개와 신앙을 제시한다. 회개의 본질에 대해 이 목사는 그의 설교 "회개하라" (마 4:17, 벧후 3:8-9)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회개는 구원의입문이요 기초인 것이니복음의 대지가 회개요, 저주와 멸망을 막는요새가 되는 것이다... 회개는 지적으로 자신의죄를 깨닫는 것이며... 정적으로 죄를 슬퍼하는것이다... 의지적으로 죄를고백하는 것 이며... 행위적으로열매를 맺어야 하는것이다.


즉 회개는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입술의 사건이 아니라 지, 정, 의, 행의 전인적 사건이요, 반드시 행위가 수반되어야 하는 사건이다. 특히 이 목사 는 회개의 행위적 열매를 강조한다. 즉 소극적으로 변상을 통해 죄를 회개함과 적극적으로 삶이 변하는 의의 열매를 맺는 단계까지 나아갈 때, 진정한 회개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법률적으로 지은 죄, 양심상으로 지은 죄를 다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사람과 관련된 것은 사람과 해결지어야 한다." 이 회개가 인 간을 예수와 관련지우고 죄로부터 구원하는 첫걸음이다. 이런 맥락에서 회개가 이 목사의 부흥설교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또 부흥집회에서 회개의 역사가 활발했던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이렇게 이 목사가 회개를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신학적 이유 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생활이 건덕을 세우는 모범적 성직자의 삶이었 고, 또 이 목사 자신도 대단히 투철한 회개의 실행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청교도식의 철저한 회개를 강조하여, 행동화가 가능한 한 반드시 보상과 변상의 행위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자신이 이런 회개관을 몸소 실천하였 다. 가령 그가 예수를 영접한 후, 어릴 적에 나이를 속이고 차표를 반표로 속여 구입한 것을 회개하면서 나머지 금액을 우편으로 지불했던 것은 이를 잘 반증 한다.

 

이 회개와 더불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될 수 있는 두 번째 단계는 '믿음'이다. 이 목사는 신앙을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대한 인간편의 반응으로 해 석하면서, 참된 신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참 신앙은예수를 통하여 신구약의 3만여 가지의 약속을그피로 인쳐 우리에게주시고 성신으로 알게하시는 지각으로 이말씀 전부를 다나 위하여 주신줄 그대로 받고, 그대로 의지하며, 그대로바라고, 그대로 좇 고, 그대로 증거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구속사건에서 예수가 구세주가 되심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제일주의의 절대적 입장에 서서 모든 것을 주께 맡기는 것이다. 이 믿음 이란 결국 가치의 문제와 연결되는데,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두고 또 최고의 권위가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과 일치한다. 바로 이 신앙과 회개가 함께 병행될 때, 인간의 불가능이었던 구원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 이 목사의 신 앙이다. 성도의 구원! 이것이 바로 이성봉 목사로 하여금 평생을 헌신케 한 일 차적인 동인이었고, 그의 메시지의 일관된 주제였다.


2. 변화의 복음

이 성봉 목사의 부흥설교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주제는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은 개개인의 변화된 삶이다. 여기서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당위로 한다. 첫째는 이 생에 속한 일체의 것들이 가지는 가치 의 유한성과 덧없음이다. 이 목사는 "세상 땅위의 일은 무엇이나 처음에는 좋지 만 나중에는 낡아지고... 보기 좋고 듣기 좋은 것도 처음에는 좋으나 나중에는 싫어지는 것"으로 본다. 문제는 이것들이 인간의 정욕과 어울어져 마치 무한 하고 영원한 것처럼 오해되어 받아들여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추구하며 좇아간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잠깐 동안 가는중에도 눈물과 괴로움으로가득찬 곳이다... 이세상은 벌레가 먹은박넝쿨이다... 솔로몬의 부귀영화도 벌레먹은 박넝 쿨이요, 바벨론의장한 경치도, 진시황의만리장성도, 일본의 천황도, 공산 당의 스탈린도 다벌레먹은 박넝쿨이다. 모든인간들은 자기중심으로 일시 적인 육신의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세상을사랑하다가 망하 고 만다.


청년 시절에 병들어 생사의 기로에서 세상만사의 부질없음을 깨달은 이 목사 로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 유한한 가치들의 정체를 직시하고 그들의 지향점 을 수정하는 것 이상으로 시급한 일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변화라는 것은 일 차적으로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로의 가치의 변화이다.

 

성도들이 변화해야 하는 두 번째 당위는 우리에게 비밀로 남아있는 그리스도 의 임박한 재림이다. 이 목사의 신학 사상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재림은 이 목사의 모든 사고와 삶의 기반이다. 재림이 있다는 것은 곧 영원한 천국이 있다 는 반증이고, 따라서 예수의 재림이야말로 모든 것의 완성이요, 구원의 종국이 요, 세상가치가 예수로 변해야 하는 이유이다. 동시에 성도의 삶을 규정하는 틀 이고, 그 삶에 긴장감과 탄력성을 부여하는 동인이다:

우리가 애모하는신랑 예수님 오실날은 절박해 간다. 자연계의 징조를 보든지, 국제와 사회 징조를보든지, 교회상태를 보든지, 유대나라가 독립 하는 것을볼때에 우리 최대의소망은 신랑되신 주님을기다리는 준비로 예수사랑하는 일 밖에는없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변화의 당위 위에서 이 목사는 성도들의 삶 자체가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혹자는 이 목사의 설교에서 재림과 구원에 대한 강조가 주류를 이루 는 것을 들어서 그가 신학을 정신화하였고 성도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치중 케 함으로써 복음이 가진 수평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을 무시하였다고 오해할는 지 모른다. 만일 그의 메시지가 변화된 삶과 복음의 윤리적 차원을 강조하지 않 았다면, 이런 오해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구원이나 재림의 강조가 결코 염세적이고 허무주의적인 발상으로부터 나오게 된 유일한 대안이 아니다.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이것은 가치와 방향의 문제이고, 이 문제가 일차적으 로 해결됨으로써 동시에 세상적인 것에 대한 집중이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은 성도는 그 가치가 바뀐 것을 토대로 그들의 일상도 바 뀌어야 한다. 그것은 철저한 책임적 존재, 공존(共存)의 존재, 공의(公義)의 존 재, 그리고 사랑의 존재로 살아가는 삶이다. 이런 삶과 복음의 연결은 이 목사 의 사상을 허무주의로 해석하려는 시도와 상치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목사 는 가치의 전도(顚倒)와 그에 따른 삶의 변화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으로 규 정한다:


십자가는 십자가대로나는 나대로 있으면십자가가 상관이 없는것이 다... 철두철미한 회개를하는 때에 세상이나를 향하여 못박고내가 세상 을 향하여못박는 것이다... 죄를미워하고 하나님의 법을중히 여기는 생 활의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것은 주님을 위하여남을 위하여 희생의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에게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께인도하고 중보의 기도로하나님의 사랑 을 인간에게미치게 할 것이며내가 십자가를 지고화목케 하는 직책에충성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지금까지의 모든 죄로 물든 행태를 벗 어 버리고, 모든 죄의 습관을 타파하며, 정신과 육체가 모두 새롭게 그리스도로 채워지는 변화를 체험해야 하고, 이를 삶 속에서 증명해야 한다. 즉 철저한 신 앙인은 삶 속에서 건덕을 보이는 철저한 생활인이어야 한다는 것이 이 목사의 주장이다. 그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유난히도 강조하는 것은 그 가 지향하는 복음의 성격을 여실히 반증하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된 삶은 언제나 현재성을 가져야 하는 현재적 사건이다. 복음과 구원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현재를 문제삼는다.

이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성도에게 주어진 구체적 방법은 무엇인가? 이 목사 는 기도를 그 해답으로 제시한다. 기도는 "신자의 생명이요, 하나님께 대한 신 앙의 행위요, 마귀에 대해 전투적 생활이요, 자신에 대해서는 성결의 생활"이 다. 이 기도가 없이 인간은 사람을 사랑할 수도, 마귀를 이길 수도, 하나님을 기 쁘게 할 수도, 마음에 평강을 유지할 수도 없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이 깨어 있 고, 하나님이 내신 삶의 의미를 완성해가며, 현재의 살아있는 생명으로 기능하 기 위해서 기도의 용사들이 되어야 함을 이 목사는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