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5

好學 2012. 1. 29. 14:55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5

 

- 그의 부흥설교에 대한 설교학적 분석 - 정인교 박사(본 대학, 실천신학)


 

Ⅴ. 이 성봉 목사의 부흥 설교에 대한 설교학적 고찰


한 사람의 설교를 평가하고 분석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고, 많은 오류를 낳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 이유로서는 우선 쓰여진 설교 (geschriebene Predigt)와 선포된 설교(verkündigte Predigt) 사이에 게재될 수 있는 괴리를 들 수 있다. 선포되는 설교가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이야기하며 성 령의 역동적 역사에 의존하는 영적 차원을 가졌고, 동시에 구체적인 상황을 가 진 회중을 수신자로 하는 현장의 연설이다. 회중은 설교자를 '보며' 집회가 갖는 분위기를 '느끼며' 말씀을 '듣는다'. 즉 시청각적 요소와 현장성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비록 이 때의 설교가 반복되지 않는 일회적 사건이긴 하지만, 말씀에 대한 회중의 동화와 수용이 용이하며, 예배에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의 현장성을 체험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쓰여진 설교에는 현장성이 배제된다. 상황을 따라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로 진행되고 가감되는 강단 위의 설교와 달리 하나의 문장화된 설교는 정 선된 언어의 선택과 숙고된 문장의 배열, 그리고 가시적 청중 대신에 거리를 띄 우고 냉철한 관찰력으로 반복된 검토를 할 수 있는 '독자'를 대상으로 한다. 당 연히 예배라는 상황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갖는 현장성을 설교에서 기대할 수 없고, 동시에 시각적 작업에만 의존하여야 하기 때문에 전달의 효과라는 면에서 도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제한성은 종종 선포되는 설교가 갖는 역동성을 간과해 버리고, 설교 내 용 이외의 설교자 개개인이 소유한 독특한 개성과 언어적, 비언어적 요소가 전 달에 끼치는 영향들을 놓쳐버리는 우를 범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가 시도하는 작업은, 비록 대단한 정도의 주의를 기울인다 해도, 이런 위험성이 내재된 제한 적 작업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제한된 작업'은 먼저 이 성봉 목사의 설교가 갖는 설교 형태상의 특징을 파악하고, 내용상의 특성과 그리고 설교가 행해졌던 시대상황과 설교의 접맥성 을 분석하는 순서로 진행될 것이다. 이런 작업을 통하여 "이 목사가 갖고 있던 신학적 입장이 얼마 만큼 그의 설교 속에 투영되었는가?", 그리고 "설교자로서 의 그의 관심이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부흥설교가 지향해야 하는 제 요소가 어떤 것인가?" 등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A. 설교형태의 특성


설교형태(Predigtform)는 설교내용(Predigtinhalt)을 담아서 실어 나르는 틀로 서 설교를 하나의 연설로 만드는 결정 요인임과 동시에 회중에게 '전달되는 설 교'로 각인되게 하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다. 마차에 비유하면, 설교형태는 설 교내용이라는 금덩이를 - 경우에 따라서는 똥덩이가 될 수도 있는 - 실어 나르 는 마차와 유사한 것이다. 이 마차는 나무로 만들 수도 있고, 철이나 금으로 만 들 수도 있는데, 금덩이에 어울리는 마차가 어떤 마차여야 한다는 것은 명약관 하(明若觀火)하다.

이 목사의 부흥설교가 갖고 있는 형태상의 특성을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먼 저 그가 채택한 설교본문의 경향성과 설교제목의 설정 경향, 설교전개와 설교형 식의 특성을 알아보아야 한다.


가. 본문 사용과 제목설정의 경향성

설교에서 본문 사용은 설교를 다른 연설과 구분하는 일차적 기준으로서, 단일 설교의 구성 목적을 위하여 선택된 성경의 부분, 특정한 구절로 한정하여 그 개 념을 정의할 수 있다. 주제설교로 정의되는 중세의 탁발승단에 의한 Sermo를 제외하면, Homilia∼Sermo∼Contio로 이어지는 설교역사에서 성경본문의 사용 은 기독교 설교사에서 일관되게 지켜온 것이다. 본문을 중심한 설교는 청중을 바른 신앙에 설 수 있도록 안내하며, 복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돕는 통찰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성봉 목사의 설교는 그가 신학생, 전도자, 교역자를 위한 부흥지침서로 발 간한 요약식 설교집인 "부흥의 비결"이라는 설교집을 제외하고는 "사랑의 강단" 과 "임마누엘 강단"이라는 그의 저작집 2,3권에 모두 49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설교를 토대로 이 목사의 본문선택의 경향성을 살펴보면, 신약성서 39편, 구약성서 8편 그리고 신구약성서 모두를 사용한 본문이 2편에 이른다.

수치만으 로 볼 때, 이 목사의 본문선택이 신약성서에 집중되고 있는 것은 초기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들의 경향, 그리고 그들로부터 교육받은 한국교회 강단의 그것과 일치한다. 이 경우에 우리는 흔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려는 의도가 신약성서, 그 중에서도 복음서 위주의 본문선택을 하게 되었다고 해석하는데, 총 39편의 신약성서 본문 가운데 복음서에서 19편(마태복음 10편: 마가복음 2 편: 누가복음 4편: 요한복음 3편)의 본문을 선택한 이 목사도 역시, 수치상에 관 한 한, 전통적 맥락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그에게서는 이러한 성경본문의 선택 수치가 별로 의 미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이 목사의 의도와 설정한 주제가 설교의 내용을 이끌 어가고 있고, 본문은 단지 형식상의 설교근거의 기능으로 축소되는 것이 그의 설교특징이라는 점과, 또 그가 신본주의적, 그리스도 중심적 사고를 갖고서 모 든 본문을 풀어간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설교본문에 관한 한, 그 어 떠한 신약-구약성서 간의 괴리도 이 목사에게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 설교주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동시에 부흥 설교에 흔히 보이는 방식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본문의 길이에 관한 한, 이 목사의 설교 49편 가운데서 1절에 국한된 본문이 16편, 2-5절의 분량이 15편, 6절 이상이 7편, 그리고 2군데 이상 의 본문이 11편으로 나타난다. 이 목사의 설교가 주로 부흥집회시에 행해진 부 흥설교를 정리한 것임을 염두해 둘 때, 이러한 분포는 일반적인 부흥설교가 취 하는 본문의 길이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즉 부흥설교에서는 대개 한가지 주제 에 초점을 맞추어 직선적인 도전형의 선포로 일관하고, 대개의 경우에 부흥집회 를 위한 회중의 심령 준비로 인해 이러한 단선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설교자는 이런 목적을 위해 대개 자신이 설정한 핵심적인 주제를 외형적으로 뒷받침해줄 만한 단일 성구를 설교본문으로 채택하는 것이 대개의 경향이다.

 

이에 반해 수치로 보여지는 이 목사의 설교는, 비록 1절을 본문으로 택한 수 치가 일반 설교에 비해 월등히 높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강의 틀과는 다소 거 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부흥설교가 거의 본문이 담긴 상황과 맥락을 무시한 채 단어의 한 표현에 집중하는 것처럼, 이 목사도 역시 본문의 길이가 아무리 길다 해도 대부분 한 구절, 혹은 단어 하나에 국한하고, 다른 부분들은 무시한 채 설교해가기 때문에 내용적으로는 사실상 아무 차이가 없다.

 

설교 본문의 길이는 사실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요즈음 유행되는 강해설교 도 역시 설교본문의 길이와 상관없이 가능하다. 하지만 부흥설교에서 본문의 길 이가 짧다는 것이 곧 본문 중심의 설교 대신에 설교자의 주관을 내세울 수 있 게 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면, 이는 모든 여건과 가치관이 급속하게 변하는 현 대 세계와 설교가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원론적 당위를 염두에 둘 때, 이 것은 반드시 숙고되어야 할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부흥집회라는 한시적 축제에서 행해지는 설교가 곧 부흥설교"'라는 협의의 정의가 여전히 유효하다 하더라도, 말씀 대신에 설교자의 주관이 설교를 지배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이제 설교제목의 경향성과 관련하여 이 목사의 설교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 리는 흔히 설교에서 주제(Subject)와 명제(Prorosition) 그리고 제목(Title)의 개 념을 별 생각없이 혼용해서 사용하지만, 이것들은 마산과 부산이 다른 것 만큼 이나 상이한 것이다. 주제가 설교의 범위를 한정하는 것이고, 명제는 설교를 한 문장으로 축약해 놓은 것이라면, 제목은 설교를 광고할 때 사용되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제안적인 단어나 구(句)로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설교제목은 무엇보다도 사람들로 하여금 그 설교를 듣게 하거나 관심 을 기울이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호기심과 관심,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어야 함과 동시에 설교가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를 다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방향을 추정 케하는 암시성을 지녀야 한다.

 

하지만 소위 제목설교와 주제설교라는 용어마저 구분치 않고 사용해 온 한국 교회 강단은 대개 주제를 곧 제목으로 그리고 제목을 곧 주제로 계속 혼동해 왔고, 따라서 설교의 내용은 거의 대부분 제목에서 함축되고, 또 설교가 제목에 따라 진행된다.

이 목사의 경우도 이러한 일반적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목사에 게서 설교제목의 설정(Themasetzung)은 두 가지 양상을 띠고 있다. 가장 특징 적인 것은 그의 설교 대부분에서 보여지는 것으로서 성경본문에 나오는 한 표 현, 한 단어를 그대로 제목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하나님을 믿으라"는 제하의 설교는 그 제목을 설교본문으로 삼은 마가복음 11장 22절의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에서 그대로 발취한 것이고, "주 예수를 믿으라"는 제하의 설교도 역시 성경본문 사도행전 16장 31절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에서 따온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성경구절로 택한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는 대신에 그 본문이 감싸 안고 있는 대강적인 주제를 기초로 설교자의 의도를 연결시켜 제목을 설 정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가령 요한일서 1장 1-10절을 본문으로 한 "생명 체 험자의 특징"과 같은 설교가 이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이렇게 설정된 설교제목은 회중이 그 제목만으로도 설교내용이 어떻게 전개 될 것인지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물론 이 목사가 활동할 당시의 회중의 이해도를 염두에 둔 것이고, 이미 부흥성회라는 특수한 집회가 사전에 고지되고 회중이 심적으로 준비된 상태임을 감안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 만, 제목이 가지는 함축성을 제외하고는 설교 전에 설교 윤곽을 너무 자세히 고 지하게 된다는 점에서, 또 이로 인해 회중의 흥미를 그만큼 반감시키며 진부함 을 더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할 것이다.

 

동시에 그의 설교제목이 단지 하나의 단어나 표현에만 국한될 뿐, 성경본문의 전체적인 정황과 지향하려는 의도를 포괄적으로 담아내지 못하고 제목으로 추 출한 부분 이외의 본문은 대부분 설교에서 취급되지 않고 있는 점은 한국교회 제목설교의 한 단면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할 것이다.

 

나. 설교전개상의 구조 분석

 

한국교회 설교의 전통적, 전형적인 방식의 하나는 설교제목 아래 성경본문을 두고 본론을 몇 개의 제목으로 나누어 각 부분마다 각기 다른 성경구절이 인용 되는 형태이다. 또 다른 경우는 특정한 성경구절 없이 설교자가 정한 주제에 따 라 3-5개의 대지를 구분하고 거기에 맞는 성구를 인용하는 형태이다. 이러한 형 태는 그 설교의 출발점이 성서본문이 아닌 설교자의 관심이고, 설교의 진행도 역시 성경본문이 아닌 설교자의 주관적 사고에 종속된다.

 

물론 설교에서 설교자의 주관적 입장이 전혀 배제될 수는 없지만, 설교의 출 발이 성경본문이고 해답의 도출도 역시 본문에 국한되는 성서적 설교를 지향하 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델이라 할 때, 설교자의 주관은 본문에 대한 해석과 적용의 선택부분에 한정되어야 한다. 즉 설교자의 자유는 본문 안에 들어간 후 의 자유이지, 본문을 제외한 설교자 자신의 사고전개의 자유는 아닌 것이다. 만 일 이 원칙이 무너지게 되면, 설교는 설교자의 신학적 지식에 근거한 종교담화 로 추락하게 되고, '성서적 그리스도인'의 양성에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성서적 설교에 대한 예찬이 일반적 공예배에서 행해지는 설교의 지향 점이라면, 특수한 목적을 가진 부흥집회의 경우에 설교는 그 집회가 상정한 주 제와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 이런 당위성은 우리가 경시하기 쉬운 주제설교적 접근의 장점을 적절히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실제로 주제 설교는 모든 성경구절이 급변하는 세계와 그 세계가 토해내는 다양한 문제들에 적합한 본문을 만족하게 제시해 주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여전히 필요한 장르 이다. 동시에 특정한 성격이 압도하는 예배, 가령 절기예배나 헌당식 취임식 기 념예배, 특수 집회 등 구체적으로 성취해야 할 목표가 분명한 경우에도 역시 이 형태의 설교가 강점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 목사의 설교가 부흥설교로서 갖는 형태상의 특징은 어떤 것인가? 우선 이 목사의 설교는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구성형식인 서론-본론-결론의 3단 구성으 로 일관한다. 이런 구성은 설교자가 전하려는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주지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더욱이 그 당시 회중들의 전체적인 이해능력 면에 서 단순성의 원리가 효과를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을 고려하면, 이것은 적 절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1) 우선 그의 설교에서 드러나는 서론의 형식을 보면, 두 가지의 특징이 발견 된다. 가장 주목할 특징은 그의 설교가 대부분 설교의 서두부터 설교자가 이야 기하려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회중과 대면시키는, 소위 '직접 들어가는 방식'을 채택한다는 점에 있다. 가령 그의 설교 "회개하라"(마 4:17; 벧후 38-9)를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설교가 시작되고 있다:


회개는 주의명령이요, 주의 소원인것이다. 알지 못하던시대에는 하나 님이 허물치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사람을 다 명하사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이는 하면 하고말면 말고 할것이 아니다. 아니하면아니되는 주의 뜻이니라".


K. Barth는 예배 자체가 설교에서 서론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또 다른 도입 부를 나열하는 것은 시간의 낭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입장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특히 부흥성회라는 특별집회에 임하는 회중들이 어느 정도는 말씀에 대한 기대와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임을 감안할 때, 회중을 말씀과 직접 대면시키는 이 서론 방식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목사에게 보여지는 또 하나의 서론 방식은 설교주제에 간접적으로 접근하 는, 소위 '돌아 들어가는 방식'이다.

가령 이 목사 자신이 만주목회 시의 경험으 로 시작되는 "살았느냐 죽었느냐"라는 설교나, 미국에서 요구하는 인물에 대한 소개로 시작되는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인물" 등이 이에 해당되는 설교라 할 수 있다.

주제에 대해 멀리서부터 돌아 접근하는 이 방식은, 설교의 승패가 설 교 시작후 2-3분 내에 결정되다는 임상실험 조사를 염두해 둘 때, 회중의 들 으려는 욕구와 호기심을 자극시킨다는 점에서 흔히 권장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더욱이 긴장으로 굳기 쉬운 설교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며, 설교자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회중이 무리없이 소화하도록 '이해의 주단'을 깔며 회중으로 듣고자 하는 호기심과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 서론의 주요 기능이란 점에서 설교자의 체험, 다양한 예화로 시작되는 이 방식은 전자에 비해 더 큰 효과가 있다 할 것 이다.

이와 관련해 J. A. Broadus의 주장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사람이란 본디갑작스런 변화를 싫어하고점진적 접근방식을 좋아하는성향이 있다. 어떤건물에 현관이나 출입구가잘 만들어져 있지않다면, 외견상 좋지않을 것이다. 음악에서정성들여 작곡한 대곡이있다면, 그것 은 항상약간의 전주가 있어야할 것이다. 또서론이 없는 작문이나연설 도 불완전해 보이기는마찬가지이다.


2) 이 서론에 이어지는 설교의 몸통, 즉 본론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의 설교는 철저히 설교자의 주관이 지배하는 주제설교, 설교제목에 의해 진행되는 제목설교가 대강의 주류를 이루고, 서사문학의 장르 에 포함되는 본문인 경우에는 성경이야기를 따라 설교해가는 본문설교가 몇 편 에 걸쳐 나타난다. 그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살았느냐 죽었느냐"(계 3:15; 마 22:32)라는 설교를 보면, "죽은 자의 하나님 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라는 성경본문 속의 내용으로부터 설교제목을 따 온 후, 설교의 진행을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설정 하에 모두 5개의 대지로 풀어가고 있다.

여기서 그는 5개의 대지, 1. 호흡으로(=기도로), 2. 감각으로(=회개로), 3. 활동으로(=움직이는 신앙), 4. 열정으로(=열심), 5. 유연함 으로(=포용)를 설정해서 설교를 진행하고 있다. 이 설교의 본문 접합성은 신앙 촉구의 근거를 제시함과(계 3:15) 하나님의 정체성 고지(마 22:32)에만 국한되고 있다. 즉 설교의 도입부까지만 본문은 기능하고, 실제 설교본문의 각 대지는 성 경본문에서는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철저히 설교자의 주관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의 설교의 대부분이 이런 형태를 띠고 있다.


그의 설교 전개에서 보여지는 또 다른 특징은 본론의 대지 배분이 일정하지 않다는 점이다. "예수를 이해하느냐"(마 22:42; 16:15-16)라는 설교를 보면, 이 목사는 본론을 3대지(1. 성경이 증거함, 2. 신구약의 성도들이 증거함, 3. 예수 자신이 증거함)로 진행시키는데, 1, 2대지가 대등한 분량으로 처리되는 반면, 3 대지는 5개의 소대지(죄가 없으심, 그의 말씀, 그의 하신 일, 십자가에 죽으신 사랑, 부활하심)를 수반하면서 전체 설교의 2/3를 차지하고 있다. 이 말은 곧 이 목사의 설교의 핵심이 바로 이 대지 하나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 대지야말로 그 가 이야기하려는 핵심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물론 강해설교에서 요구되는, 가급적 균등한 대지의 분배가 모든 경우에 합당 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대지가 너무 많은 소대지를 갖게 됨으 로써, 회중들이 설교전체의 윤곽과 흐름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는 사실도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른 한편으로 일정한 줄거리가 있는 서사문학적인 본문의 경우는 어떻게 전 개되고 있는가? 최근들어 우리에게도 점차 알려지기 시작한 이야기식 설교 (StorytellIng)의 본문으로 적합한 구체적인 하나의 사건을 모토로 한 기사는 구 약성서 역사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의 비유를 비롯하여 신약성서의 복음서 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성서 안에 수록된 이런 특이 한 문학 장르를 새로운 설교 방식 속에 담아 전달하는 것은 그만큼 설교의 다 양성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목사의 설교에서도 이런 서사문학적 본문을 취급한 설교들이 모두 7편이 발견된다. 물론 설교 내용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 진행하는 이야기식 설교 는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밖의 다른 설교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을 이 설교들은 보여준다. 가령 "갑절의 신을 주소서"(왕하 2:9)라는 설교를 예로 들어보자. 이 목사는 이 설교의 기본축(명제)을 '엘리사의 신앙을 본받자' 라고 설정한 후, 다음과 같은 4대지를 제시한다:

1. 엘리사는 엘리야를 끝까지 끈기있게 따랐다.

2. 갑절의 신을 요구함

3. 승천하는 엘리야를 바라봄

4. 자기 옷을 찢음

 

이런 류의 설교가 다른 설교와 구분된다는 것은 그 전개방식에서 철저히 본 문의 사건진행을 견지하며 그로부터 대지를 나누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목사 설교가 대부분 제목설교로 정의될 수 있는 반면, 위의 설교를 비롯한 몇몇 설교는 적어도 형태상으로는 철저한 본문설교의 진행방식을 따르고 있다. 특 히 이런 서사문학적인 구약성서 본문은 그 해석에서 자칫 복음과 관계없는 윤 리, 도덕적 차원의 각성 정도로 메시지를 이끌기 쉬운데, 이 목사의 경우는 어 떤 본문이라도 무리한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인한 사건의 영성화 (Spiritualisierung)를 초래하지 않으면서도, 그 본문 속의 한 표현이 가지는 동 작에 착안해 그것을 기독론적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을 통해 이 문제를 무리없이 해결하고 있다. 위의 설교에서 2. 3대지의 '요구', '바라봄'이라는 표현을 인용한 후, 엘리사가 바라본 인물이 엘리야였다면, 우리가 따르고 바라고 요구해야 할 인물은 그리스도라는 방식으로 설교를 풀어가는 것이 그 한 예라 할 것이다.

 

이 목사의 설교는 본론 구성에서 예외없이 3-5개의 대지를 사용한다. 이 병렬 구조 방식은 한국교회 강단의 전통적, 일반적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부흥설교든 일반 주일 공예배 설교든, 다수의 설교자들에 의해 애용되어온 것이 바로 이러한 병렬적 설교방식이었다는 사실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런 현상은 설교를 듣는 회중의 이해도를 생각할 때, 이렇게 잘게 쪼개어 전 달하는 설교가 복음을 이해하거나 기억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한다. 또 선교 초창기의 회중의 지적 수용도 등이 오늘 날에 비해 월등히 떨어질 수 밖에 없었기에, 보다 쉬운 설교가 요청되었던 것도 이 형태를 고착화 시킨 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설교가 본문의 깊이있는 의미를 드러내 회중의 삶 속으로 해석 해 넣는 '성경적 설교'를 불가능하게 만들며, 전체적인 숲은 보지 못한 채 토막 교훈만을 양산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본문에 따라 병렬적 구분이 가능한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는 점에서, 주일 낮 예배의 정형으로 자리잡는 것에는 깊이있는 재고가 요청되는 방식이다.

 

부흥성회라는 '축제'에서 행해지는 부흥설교도 역시 회중에게 어떤 지식을 전 달하려는 설교가 아니라 죄와 회개 중생과 구원, 삶의 변화를 주목적으로 하는 목적설교이다. 당연히 회중의 지력에 의존하기보다는 심령에 호소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의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전달되려면, 주제 자체도 단일해야 하고 동 시에 그 구조도 가장 평이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많은 대지로 나누어 전달되는 설교가 효과적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책으로 정리된 이 목사의 설교와 그가 실제로 부흥 집에서 행했던 설교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에서 더 욱 개연성이 짙다. 김 진환은 이성봉 목사의 집회가 "저녁에는 천로역정 강화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낮에는 요나서 강화로 흐뭇한 감화를 끼쳤고, 새벽의 회개운동은 특히 놀라워 어디를 가든지 자리가 비좁아 주최측을 당황케 하였다"고 회고하는데, 이것은 이 목사의 문자화된 설교와 부흥회 현장 사이의 괴리를 뒷받침해 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소위 부흥집회의 전문가인 이 목사가 부흥설교의 효과적 전달이란 측면을 누 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고 할 때, 설사 위의 병렬식 구조를 택했다 하더라도, 이 목사 특유의 방식으로 그 전달효과를 극대화하였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사 실이다. 특히 한정된 기간 동안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열리는 부흥집회에서 설 교자가 무엇을 전해야 하는가를 인지하고 주도적으로 구성하는 데 이 설교형태 가 비교적 적합한 방식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가 제목설교의 형태를 즐겨 사 용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3) 이 목사의 설교형태와 관련해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설교의 결론 부분 이다. 변증법적 신학자들은 설교에서 서론과 결론의 불필요성을 주장하지만, 곽 안련이 정의하듯이, "설교 전체의 관이요 불타오르는 중심점"이 곧 결론이다. 설교의 실패와 성공, 이 설교가 나와 상관이 있다고 느끼는 설교와 회중의 접맥 이 모두 이 결론 부분에 달려 있다. 또 설교자는 흩어졌던 회중의 집중도를 끌 어올리고 자신의 메시지를 명확히 전달할 마지막 기회를 결론 부분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서론의 중요성 만큼이나 가치가 있는 것이 결론이다. 많은 설 교학자들이 이 부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설교형태에서 만고불변의 확고한 모범답안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론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결론이 설교의 정점이라는 인식 하에 작성해야 할 것, 논리적으로 설교 전체의 흐름과 자연스런 일치를 이루어야 할 것, 간결성을 유지하면서 설교의 요약을 내포해야 할 것, 회중의 적용을 다룰 것, 그리고 새 로운 주제나 문제를 제기하지 말 것 등이 결론작성에 관해 일반적인 주의사항 으로 제안되어 왔다.

 

이 성봉 목사의 설교는 그 결론이 거의 유사한 두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애용되어온 방식, 즉 설교 전체의 내용을 요약, 반복하면서 실제적인 행동지침을 제시하는 형태가 그것이 다:

하나님과 나사이에 올바른 관계를맺고, 사람과 사람사이에 올바른 관 계를맺고, 기도의 목저이순결하여야 하고, 예수의공로를 의지하여 간절 히 전심으로구하고, 믿음으로 구하고하나님을 기뻐하는 기도를드림으로 써 우리의 기도는응답받을 수 있을것이다... 성도들아 항상깨어 쉬지 말 고기도하세. 주님 부탁하셨으니쉬지 말고 기도하세. 말세에 우리에게 성 신을 약속하셨으니반드시 주실 줄믿고 쉬지말고 기도하세


이러한 결론이 설교내용을 요약함으로써 회중으로 하여금 설교의 핵심을 정 리하게 하고 기억을 돕는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영감 어린 음성에 실려 결론의 부분이 선포되었을 때, 아멘으로 화답하는 회중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요약식 결론에서 동일성 을 피하고 다른 표현과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원론적 지적은 여 전한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목사는 결론부분을 회중의 실천적 영역에 연결시 켜 구체적인 적용지침을 제시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한다. 신앙이 결국은 구체적 틀에 담겨야 하고, 신앙의 진보를 위해서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기도 등의 싱앙 행위가 고착되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이런 방 식은 신앙의 뿌리가 깊지 않은 대다수 회중들을 위해서는 설득력 있는 제안이 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 시작된 설교가 마지막에 윤리적 행동화로 한결같이 귀결 되는 것은 자칫 설교를 윤리, 도덕적 지침의 장으로 변절시킬 위험이 있다는 점 에서 깊이 숙고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결론과 관련한 또 다른 특징은 많은 설교가 이 목사의 노래로 끝맺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목사가 설교 도중에 찬송을 애송한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 이다. 아직도 그가 작시한 찬송 가운데 애송되는 것이 적지 않고, 또 설교 내용 과 연결되는 찬송을 설교에 도입함으로써 메시지의 전달에 지대한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이 목사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분이다. 그는 동경유학 시절에 그가 지은 '허사'가 등을 레코드에 취입하여 음반을 통한 선교를 시도하였으며, 특히 그의 영감어린 음성이 많은 심령에 은혜를 끼친 것도 역시 주지의 사실이 다.

 

특징적인 것은, 비록 그가 많은 곡에 가사를 붙여 애송했지만, 설교의 마무리 부분에서 주로 설교의 내용에 부합되는 곡이나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는 곡을 한정하여 노래했다는 점이다. 가령 "실패의 원인과 회복의 비결"(눅 22:31-32)이 라는 설교를 보면, "죄지은 사람이 지옥가는 것이 아니요, 회개하지 못한 사람 이 지옥가는 것이다. 베드로는 회개하여 구원 얻었고 가룟유다는 회개하지 않았 기 때문에 망하였다... 스스로 돌이키라. 주님 눈동자를 보고 주게 돌아오라"로 결론을 맺은 후, 다음과 같은 찬양으로 끝맺고 있다:


내맘에는 원이로되이 육신이 약하여

때를 따라쓰러져도 주님 나를붙드네

마귀시험 지독하고사람단련 많으나

여호와의 크신사랑 내 승리가되시네.


이처럼 그가 설교를 끝내며 부른 찬송은 그가 정리한 결론의 내용을 가사의 형태로 다시 확신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특히 부흥성회에서 이러한 찬양으로의 끝맺음하는 것은 집회의 분위기를 고조하고, 심령을 메시지의 방향으로 정렬하 며, 동시에 각 심령에 평안과 희열을 심어 주는 순기능을 담당했음은 불문가지 의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