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김용기 장로

好學 2012. 1. 29. 15:00

김용기 장로


“한 손에는 성서를 쥐고 한 손에는 괭이를 들고, 머리에는 애국의 면류관을 쓰고, 허리에는 겸손의 띠를 두르고, 발에는 개척의 신을 신고…” 안병욱 교수가 20세기 한반도의 예언자로 묘사한 이 인물은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장로다.

‘노동의 종말’을 얘기하는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라는 김용기 장로의 주장은 아직도 유효하다. 지금도 많은 청년들과 기업인, 공무원, 심지어 수녀와 승려들도 그의 노동철학을 배우기 위해 가나안 농군학교를 찾고 있다.

그는 1912년 경기도 양주 봉안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춘교는 농부이며 한학자였지만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김용기는 한때 ‘만적이 돼 조선독립의 선봉장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만주에 가기도 하지만 그곳에서 오히려 신앙을 되찾고 강화도 마리산에서 40일간 기도를 한다.

그의 나이 23세 되던 해 부친이 세상을 뜨면서 “농사야말로 산업의 원동력이다. 주권을 회복하려면 경제 자립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지식인일수록 농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부친의 유언에 따라 농민운동에 투신한 김용기는 농업기술의 개발과 신앙으로 모두 일하고 모두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이상촌(理想村) 건설을 꿈꾸기 시작한다. 33년 황무지를 개간해 일군 봉안이상촌은 그 꿈의 첫 실현이었다. 그는 40명의 마을사람에게 영농기술과 함께 신앙을 전했다. 모두 하나님 앞에 평등한 자녀이며 근로와 봉사, 희생이 예수님의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봉안이상촌은 설립 5년만에 6500평의 밭이 1만3700평으로,9000평의 논이 1만3900평으로,4000평의 과수원이 1만2000평으로 늘어나는 대성공을 거뒀다.

봉안이상촌은 독립운동 기지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몽양 여운형이 이곳에 몸을 숨기기도 했고 일제의 쌀 수탈에 반대해 논농사를 줄이고 밭농사를 짓는가 하면 강제 징용에 끌려갈 처지의 젊은이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미군도, 소련군도 물러가고 농민들이 뭉쳐 이상촌을 만들 것을 주장하다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는 황무지로 변한 해방된 조국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개간해 이상촌을 건설했다. “우리에겐 자본도 기술도 없다. 그러나 땅이 있다. 땅을 일구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그는 이런 주장을 온몸으로 실천해 입증했다.

삼각산 농원과 에덴향을 세웠고 농민들의 자녀를 위한 교육기관 복음농도원을 설립한데 이어 54년 경기도 광주에 가나안 농장을 설립했으며, 62년 흙의 철학을 전파하는 가나안농군학교의 문을 열었다. 농군학교라는 이름에는 외적의 침략보다 더 무서운 것은 가난과 부패로 이것을 물리치기 위해선 농군(農軍)이 필요하다는 정신이 담겨 있었다.

73년 원주에 제2가나안 농군학교, 82년에는 가나안농군사관학교를 설립했다. 가나안 농군학교는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정신의 용광로다. 그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근검절약을 강조하고 이를 몸소 실천, 농민운동을 정신운동으로 승화시켰다.

1966년 필리핀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김용기 장로는 수상 연설에서 당시 세계로 확산되던 핵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날 길을 역설했다.

“이 지구상에 핵폭탄이 있는 한 인류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조물주의 지혜와 총명, 사랑만으로 인류의 평화가 가능합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인류에게 빈곤을 몰아내자, 평화를 수립하자, 영생을 얻자는 세가지 구호를 높이 외치고 싶습니다”

김용기 장로는 1988년 8월1일 영원한 동산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의 장례는 온민장으로 치러졌다.